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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5)화 (5/108)

5화

“지금 뭐…….”

“…….”

조금 전까지도 말만 잘하던 남자는 입을 다문 채 위에서 날 내려다보기만 했다.

뭐 어쩌자는 건지, 덩달아 나 역시 말을 잃었다.

그렇게 1시간 같은 30초가 흘렀을 무렵. 그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가 싶더니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가 총구를 내 이마에 가져다 댔다.

“세 놈한테 당하는 건 막아줬잖아. 그럼 적당히 고맙습니다, 고개 숙이고 떨어질 줄 알아야지.”

“…….”

“그러기 싫어?”

“…….”

“그럼 말해봐. 내가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널 거둬야 하는 이유가 뭔지. 내 생각에는 말이지, 널 데리고 가는 것보단 이 자리에서 총알 하나를 낭비하는 게 더 이득이란 생각이 들거든.”

XX, 할 말이 없네.

분하고 이 상황이 X 같은데, 맞받아칠 말이 없었다.

이 자식이랑 나는 혈연도 뭣도 아니고 조금 전 처음 본 사이다.

어떤 소설인지 감은 왔지만 읽지를 않았으니 아는 게 없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천치가 된 기분인데, 그렇다고 이 남자가 날 도와야만 하는 이유 따윈 없었다.

시퍼런 눈동자가 날 노려봤다.

계속 동정에 호소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히겠지.

“그래, 당신 말이 맞아.”

“…….”

“네 말이 맞다고, X새끼야.”

분해 죽겠는데 놈을 눌러줄 말이 생각나지도 않았다.

“맞아? 근데 왜 울어.”

흐른 눈물이 귓바퀴에 고였다 떨어졌다.

분을 못 이겨 울음을 터트린 게 얼마 만이지. 초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인 거 같은데.

“아마 당신이 날 데려간다는 선택을 하면 여기서 총알 하나를 낭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낭비해야 할 거야.”

“…….”

“그래, 너는 사람 목숨 구하는 일을 고작 총알 한 개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X새끼지.”

남자가 미간을 구겼다.

X새끼면 X새끼라 지칭하는 말에 수긍하고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인상 쓰긴.

“내가 말발이 훌륭하면 너 같은 X새끼의 글러 먹은 사고방식도 뜯어고칠 수가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렇진 못하거든. 그래서 나는 눈물이야.”

자꾸 X새끼라 불러대서 그런가. 내 대답에 남자의 허여멀건 얼굴이 더 창백해진 기분이 들었다.

가로로 굳게 다물린 남자의 입술을 보며 내 할 말을 이어나갔다.

“네 말 맞아. 그러니까 여기서 총알을 낭비하든지 그건 네가 알아서 해. 근데 여기서 비켜주진 않을 거야. 적어도 내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고 더러워진 시트를 네가 청소하는 꼴은 봐야겠으니까. 곱게 내려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배 아프거든.”

이건 내 마지막 도박이었다.

사실 놈이 정말로 날 죽일 생각이었으면 진즉에 죽이지 않았을까. 집 안에서 날 구해주지도 않았을 테고.

그러니까 총을 갖다 댄 남자의 이 행위는 내가 곱게 차에서 내리길 바라는 위협에 불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재감지 완료: 위협 수준 〘최하〙]

놈의 위협 수준은 내 이마에 총구를 가져다 댄 순간 이미 최하로 내려가 있었으니까.

“하…….”

남자의 희미한 탄식 뒤로 황당해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 이런 게…….”

“난 할 말 끝났어. 쏴 죽이든지 말든지 네가 알아서 해.”

그는 한동안 말도 몸짓도 없이 위에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건데. 움직이지 않고 무겁기만 할 거면 떨어져 나가든가.”

“…….”

너무 작게 말해 들리진 않았지만, 입 모양과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다.

남자가 소리 없이 욕설 비슷한 말을 읊조리는 것을.

결국 그는 원래 자신이 앉아 있던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와,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네.

“이제 출발할까?”

도리어 그를 보채자, 그는 기가 막히다는 옆얼굴이었다.

진짜 출발하려는 듯, 핸들에 한 손을 올린 그가 갑자기 뒷좌석을 살폈다.

“아, 이거 네 거지?”

남자가 차 뒷좌석에서 집어 든 것은 내 빨간 패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추위에 니트 한 겹만 입고 오들오들 떨고 있던 나는 반가움에 손을 뻗었다.

“어? 맞아요. 내 패딩…….”

“가져가라.”

“뭔 짓인데!”

그가 내 패딩을 열린 차 문 밖으로 내던졌다.

이 X자식 내 소중한 패딩을.

나는 선녀 옷처럼 눈밭에 내려앉는 패딩을 따라 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탁.

???

뒤돌았을 땐, 놈이 급하게 차 문을 닫고 난 후였다.

나는 패딩을 안고 벌떡 일어나 절박하게 차 유리창을 두드렸다.

“이봐요! XX 종말이라며, 세상 끝났다며! 이렇게 무책임하게 굴 거면 왜 살려준 거냐고! 종말이고 나발이고 모른 채로 콱 죽어버리게 두든가!! 이게 더 고문이잖아 이 X새끼야아아!!”

“…….”

차를 두드리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나를 가만히 보던 그가 입을 벙끗거렸다.

‘말 다 했냐.’

“그래, 다 했다!”

‘그래, 간다 그럼.’

어?

야?

진짜 간다고?

“야, 야, 야…….”

-부우웅.

“야, 이 그지새끼야아아!!!!”

그렇게 빨간 패딩과 나는 눈 쌓인 벌판에 버려졌다.

-휘이이이잉.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정말이지 개춥다.

눈밭에 패딩을 끌어안고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나는 추위에 몸을 떨며 주섬주섬 일어섰다.

우선 패딩을 입고, 지퍼를 목 끝까지 채웠다.

이제 뭘 해야 하지.

“……후.”

일단 그 아저씨한테로 갈까. 떠난 놈을 두고 언제까지 원망이나 해대는 일은 관두자 싶었다.

이 패딩이 내게로 돌아왔으니 아저씨는 아마 대단히 추운 상태일 것이다. 춥든 덥든, 더 이상 온도를 느낄 수 없는 상태라는 말이 정확할 테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고 해도, 죽은 이의 몸을 저렇게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쳐 두고 싶지는 않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따로 요청하는 일이 없다고 해도, 묻어줘야 하잖아? 그도 나도 사람이니까.

뽀드득뽀드득 새로 쌓인 눈을 밟으며 그 자리로 가자, 역시나 싸늘한 시신이 된 아저씨가 누워 있었다.

아까 내가 들어갔던 집 마당에서 챙겨온 삽으로, 나는 그 옆자리에 땅을 파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이니까 좀 덜 춥네요, 아저씨. 아저씨도 움직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대답이 불가능한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은,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근데요, 아저씨. 어쩌면 제가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게 아닐까요? 아저씨 아세요? 여기 남녀주인공이 끌어안고 얼어 죽는 개막장 소설 안이에요. 주인공들도 뒤지는 소설 안으로 보내버리면 나더러 뭐 어쩌라는 걸까요. XX.”

나쁜 생각들이 밀려왔다. 엄마가 걱정할 텐데, 그리고 난 이제 혼자 어떻게…….

“…….”

볼을 타고 흘러내린 한 줄기 눈물을 옷소매로 급하게 닦아냈다.

우니까 눈이 시렸다.

“뒤지게 춥네.”

그때, 멀리서 부아앙 하는 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삽질을 멈추고 저 멀리,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주 작은 점처럼 보이던 차가 점점 커졌다.

넋 나간 사람처럼 나는 차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윽고 내 앞에 정차한 차에서 남자가 내렸다.

다가와 서서, 죽은 이와 나와 내 삽을 번갈아 보던 남자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멈췄다.

“아깐 세상에서 제일 기 센 사람처럼 말하더니 또 울고 있냐.”

“뒤…….”

뒤지게 추워서 우는 거라고 대답하려는데, 이 추위에 밖에서 오래 삽질을 했더니 망할 입이 얼어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한동안 우두커니 내 얼굴을 바라보던 놈이 고개를 돌려 저 멀리로 시선을 던졌다.

“골칫덩이를 주웠네, 내가.”

“골칫덩이라고요? 그럼 왜 돌아왔어요?”

“뭐. 돌아와도 문제야?”

아니요, 반갑죠. 더 잘생겨 보여요, XX. 내 눈이 삐었나 봐.

“그냥 뭐…….”

남자가 잠시 대답을 얼버무렸다.

“사람 죽는 거 한두 번 보는 일도 아닌데.”

파란 눈동자가 아래로 또르르 굴러 바닥에 누운 아저씨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가.

“…….”

다시 또르르 올라와 자길 바라보는 내게 시선을 맞췄다.

“개 같은 책임감이 생겼달까.”

“개, 개 같은…….”

책임감?

“말 좀 예쁘게 해요. 여기 우리 말고 듣고 있는 아저씨도 있잖아요. 게다가 우리 초면이잖아요? 이름도 모르는 사인데.”

“이름도 모르는 사인데 같이 갈 필요가 있나? 간다, 그럼?”

어, 진짜 등 돌린다.

“야……. 야!”

“왜.”

“가, 가지…… 말아주세요.”

같이 가, 이 새끼야.

자존심 내다 버린 말을 해놓고 수치스러움에 땅만 보고 있자, 머리 위에서 픽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짜식, 안 그런 척하지만 결국 내가 마음에 걸려서 온 거 아냐? 개 같은 책임감이라고 별 마음 없는 척 포장하지만 어쨌거나 책임감이 생겨버렸다는 거 아니냐고.

게다가 나는 지금 홀로 눈물을 흘리고 있던, 연약하고 가련해 도저히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는 모습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추우니까 이제 그만 차로 들어가자며 내게 쑥 뻗어질 그의 손을 기대했다.

그러나.

“안 와? 거기서 그냥 살래?”

하고 눈을 퍽퍽 밟으며 차에 타는 게 아닌가.

끝까지 X자식이네, 저거.

“네,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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