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나는 숨을 죽인 채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위협 수준이 하로 내려간 걸 보면, 살려주겠다는 남자의 말은 진실일까.
한 가지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남자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면 내겐 끔찍한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제발 그의 말이 사실이길 바라며 남자의 허리 근처 옷자락을 주먹으로 말아쥐었다.
그의 시선이 힘이 꽉 들어간 내 주먹에 잠시 앉았다가 떨어졌다.
“신참, 여기 있나?”
일행이 남자를 부르는 호칭 같았다. 내 몸을 짓누르던 남자의 몸이 천천히 멀어져 갔다.
마지막으로 남자의 손이 입에서 떨어졌다. 내게서 고개를 돌린 그가, 계단 밖으로 제 동료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
“다 뒤졌어? 여자는?”
계단 안쪽에서 나는 조용히 나무밀대를 움켜쥐었다.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아, 여자?”
“…….”
“다 뒤져 봤는데 없네.”
“아…… 그래?”
남자의 그림자가 뒤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소리를 죽였다.
“눈치 빠르네.”
“그러니까 저 새끼가 무전기 받게 두면 안 됐다니까.”
“뭐, 이 새끼가. 내가 어때서.”
“목소리가 딱 악당 느낌이잖아.”
세 놈이 지들끼리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숨어 있는 계단 뒤로 오는 복도를 막아선 남자의 발이 계단 아래로 보였다.
“여자가 튄 게 내 잘못이냐? 이런 상황에서 살려달라고 무전기 친 쪽이 정신 나간 거지.”
“그렇지. 나 잡아가쇼, 하는 꼴이지.”
“그럼 이만 가지.”
남자가 제 동료들에게 가자는 말과 함께 한 발을 뗐으나.
“어이, 신참.”
“…….”
“제대로 뒤진 거 맞아?”
“…….”
그의 동료들은 아직 떠나길 원치 않는 모양이었다.
아, 동료가 가자면 좀 가. 새끼들아아악.
곧이어 놈들이 신참이라 부르는 은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하나 못 찾았을 거 같아? 이 집에 얼마나 오래 있으려고? 아쉬우면 말해. 여기서 너랑 같이 뒹굴면서 살림이라도 차려줄 테니까. 대신 네가 엎드려라.”
“푸하핫.”
“이 신참 XX 새끼가.”
쟤들 동료라기엔 음, 아직 덜 친한 사인가.
“야, 야. 적당히들 하고 가자. 여자가 쥐새끼도 아니고 대충 뒤졌는데 안 보이면 없는 거지.”
“그래, 좀 그만들 해라.”
험악해진 둘을 말리는 나머지 둘의 목소리가 들렸다.
떠나자는 쪽으로 정해지는 분위기라 나는 조금 긴장의 끈을 놓았다.
못 박힌 듯 서 있던 남자의 발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직 안 본 집 두 개가 남았잖아. 거기 있을지도 모르지. 가자구.”
그 말을 끝으로 문 열리는 소리, 우르르 나가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싶었으나.
“너네 먼저 가.”
“뭐?”
“난 우리 신참이랑 할 얘기가 남은 거 같아서 말이야.”
“…….”
“적당히들 하고 와라.”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다시 끔찍할 정도로 고요한 적막이 찾아들었다.
남은 둘은 한동안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우리 신참이 말이야, 내가 보기엔 영 어설퍼 보여서 말이야. 혹시 놓친 게 있는지 형이 다시 찾아봐 줄게.”
거 되게 끈덕지네.
좀 가! 라고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 볼까……. 2층부터 찾아서 내려올까, 아니면…….”
멀뚱히 서 있는 남자 옆으로 다가서는, 건들거리는 동료 놈의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다. 부엌부터 가보는 게 좋겠네.”
X됐다.
내가 있는 계단 뒤 바로 옆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저놈이 부엌을 뒤지러 오면 나는 100퍼센트 발각된다고 봐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만히 서 있는 은발 놈의 그림자를 쳐다봤지만, 그는 허수아비처럼 서 있기만 했다.
그래, 사이가 나빠 보이긴 했으나 어쨌든 동료인데.
한 번은 막아줬지만 처음 본 날 구하겠다고 동료의 뒤를 치는 일은 안 하겠지.
하는 수 없이 나무밀대를 든 손에 힘을 줬다.
그때.
“서.”
오?
짧디짧은 남자의 음성이 조용한 공간에 짙게 깔렸다.
“서~어?”
건들거리며 다가오던 그림자가 말꼬리를 늘어트리며 멈춰 섰다.
그러나 그가 건들거릴 수 있는 시간은 그게 끝이었다.
-퍽, 푹, 팍, 콱, 부욱.
한 놈이 다른 한 놈을 야무지게 두들기는 소리였다. 쫄깃한 파열음을 감상하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누가 처맞는 소리일까.
아니, 맞는 놈이 누구인지 추리나 할 때가 아니지.
놈들이 정신없이 뒹구는 이때, 몰래 여길 빠져나가야 했으니까.
-퍽, 퍽, 퍼버벅, 퍽.
‘아씨…….’
저 신나게 처맞는 소리가 혹시 흰 머리 놈은 아니겠지.
그래도 날 동료들에게 일러바치지 않고 어떻게든 구해주려다 이런 상황이 된 건데…….
아, 뭔 생각을 하는 거야. 끼어들지 마. 남 생각은 네가 안전할 때나 하라고.
그렇게 무게를 잡았는데 뭔가 자기 몸 방어할 정도는 되니까 잡은 거겠지.
생각을 정리하고서 뒷문으로 몸을 틀었을 때였다.
시야에 하얀 머리가 쑥 들어왔다.
남자는 어디 한 군데 멍도 없이 멀쩡했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뒤로 나가라는 듯 뒷문을 곁눈질했다.
‘네가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처음 보는 놈에게 생겨버린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느낀 순간.
“으아아아악!!”
[감지 완료: 위협 수준 〘최상〙]
머리 위에 시뻘건 최상 글씨가 뜬 붉은 인간이 괴성을 지르며 하얀 머리에게 날아들었다.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에 놀라고 피떡이 된 그 모습에 놀란 건 두 번째였다.
놀란 건 흰 머리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죽었다 살아난 살인마를 보는 표정으로 동공이 커져 있었다.
“엇.”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프라이팬을 밟고 미끄러진 흰 머리 위로 피떡이 된 놈이 올라타고 말았다.
하얀 머리가 급하게 두 팔로 가드를 올렸다.
“하.”
이걸 어쩌냐.
이렇게 소란을 떨었으니 앞으로의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나머지 집 두 채를 살피러 갔던 놈들이 곧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 전에 밖을 나가 숨는 게 내 목숨 유지에 현명한 일인 건 뭐 말할 필요도 없고.
하지만 이대로 내가 나가면, 눈앞의 저 흰 머리 놈이 묵사발이 나 죽을 거 같았다.
피떡이 된 놈의 동료는 내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지, 방어하고 있는 흰 머리의 머리와 팔 부분을 흠씬 두들기고 있었다.
프라이팬은 실패했지만 이번엔 실패하지 않으리라.
나는 나무밀대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이야압.
-퍽.
박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놈이 옆으로 굴렀고.
“…….”
가드를 내린 하얀 머리는 조금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그대로 몸을 일으킨 하얀 머리는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가더니 얼마 후 되돌아왔다.
정황으로 보아 남은 두 놈을 처리하고 온 것 같은데, 그 둘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아서 묻지도 않았다.
“…….”
내 일격을 맞고 쓰러진 동료 곁에 쭈그려 앉은 그는 놈의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차 키를 꺼내 드는 모습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다가, 문을 열고 나가는 흰 머리의 뒤를 쪼르륵 따라나섰다.
‘나쁜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지만, 동료를 저렇게 만들었는데 괜찮은 건가.’
또 흰 머리가 그의 다른 동료들이 있는 장소로 간다면, 나는 그를 따라가도 괜찮은 걸까.
묻고 싶은 게 많았고, 해야 할 말도 많았지만 무슨 말부터 꺼내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보이는 게 눈밖에 없는 이곳에서 사람이라곤 저 인간 저거 한 명뿐이었다.
펑펑 내리던 눈은 어느새 그쳐, 날씨는 한층 포근해진 상태였다. 여전히 바람은 거셌지만.
차 키를 돌리고 문을 여는 그를 옆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를 따라 조수석에 탑승했다.
차에 시동을 걸자, 요상한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던 차는 생각보다 꽤 듣기 좋은 배기음을 들려주었다.
남자는 여전히 한마디 말도 없었다.
‘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인가.’
웅웅거리는 차 소리를 들으며 나 역시 속으로 말을 삼켰다.
먼저 말을 꺼내기가 거참 쉽지 않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쪽이었다.
“저기요…….”
“내려.”
“예, 예?”
남자는 불이 들어온 차 계기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려.”
똑같은 말을 해대는 옆모습에서 냉기가 뚝뚝 흘렀다.
내리라니, 내려서 뭐?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 내려요? 이동하려고 시동 건 거 아니에요? 아직 여기서 할 일이 남았어요?”
“이동할 거야.”
“…….”
“나만.”
“??”
“넌 내리고.”
“???”
너무 황당해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말을 토했다.
“설마 지금…… 절 여기다가 버리고 간다는 말이에요?”
그제야 그가 내가 앉은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맞아.”
세상 가볍고 경쾌한 “맞아.”였다. 아주 아기처럼 해맑고 밝게 웃으면서.
“내려, 그러니까.”
“후…….”
내리라는 냉정한 말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소심하고 작게 한숨이나 내쉬는 일뿐이었다.
기가 막혀.
평소 성격대로라면 “어, 그래.”라고 되받아친 후, 내려서 차 문짝을 빠개지듯 세게 닫아주고 돌아섰겠지만.
‘당장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저놈 말곤 없어. XX 나 이 소설 안 읽어서 아는 게 거의 없다고!’
그래서 나온 결론이 호소였다.
“저기, 이봐요. 방금 나 구해준 거 아니었어요? 당신 동료들인데도 불구하고, 그자들이 내게 나쁜 짓을 할 것 같으니까 그쪽이 나 구해준 거잖아요. 맞죠. 근데 바로 버린다고요? 여기다가? 여긴 아무것도 없고, 나는 연락 수단도 없고 어디 보이는 사람 하나 없는데……. 세상이 종말을 맞이했다면서요. 나는 그걸 당신 입을 통해서 조금 전에 알았다니까요. 근데 그런 도움이 필요한 나를 버린다고요?”
남자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내 말이 끝날 때까지 경청했다.
표정의 변화는 그다지 없지만 잠깐 흐려지는 얼굴을 본 듯도 싶었다.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지가 사람이면 동정심이 조금은 생겼겠지, 안 생겼겠어?
“어, 내려.”
XX.
놈이 상체를 숙여 조수석 문을 열어 재꼈다.
“발로 차보시든가. 난 안 내릴 거니까. 안 내려. 응, 못 내려. 네가 구해줬으니까 끝까지 책임져.”
조수석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었다.
못 내리지 못 내려. 밖은 추워 뒤지겠다고.
“…….”
노려보는 따가운 눈살이 느껴졌지만, 어쩌라고. 난 안 내려.
나는 버티기에 들어갔지만 속으로는 사실 빌빌 쫄고 있었다.
체급 차가 나는 저놈이 나를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버티기는커녕 다 쓴 휴짓조각처럼 구겨져서 차에서 굴러떨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
“…….”
“왜?”
왜라니.
남자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지. 조수석과 한 몸이 된 나를 건조한 얼굴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 절실한 호소를 듣고도 왜라는 질문이 나오냐. 방금 내 딱한 사정에 대해 열변을 토하지 않았니?
노려보는 눈빛에 맞서, 나도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그의 두 눈을 쳐다봐 주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러자 그가 무언가 결심한 듯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왔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야만 하는 순간이.
그가 나를 힘으로 밀어낼 거라 예상했기 때문에, 나는 조수석 의자를 있는 힘껏 부여잡았다.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내 예상과 달랐다.
“??”
조수석 쪽으로 먼저 넘어온 것은 남자의 긴 다리였다.
비좁은 조수석 위, 더 정확히는 내 위에 무릎을 굽혀 앉은 남자는, 능숙한 손길로 조수석을 뒤로 젖혔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뒤로 누웠다.
실로 낯뜨겁고 민망한 자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