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말물에서는 남주를 줍지 마세요 (1)화 (1/108)

1화

볼이 어는 듯한 시린 느낌과 함께 눈을 뜨자, 펼쳐진 것은 온통 하얗기만 한 광경이었다.

고개를 치켜들자 하늘 위에서는 세상을 하얗게 만든 주범인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다. 눈 내리는 배경만 가지고서 다른 세상이라는 걸 누가 바로 알아챌 수 있겠는가.

그것도 한 줌 희망 없는, 소설 속의 끝장난 세계라는 것을.

소설은 제목부터가 <얼어붙은 세계에서 체온을 유지하는 법>이었다.

갑작스러운 빙하기로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배경에서, 여주가 남주들을 한 명씩 주워가며 생존해 나간다는 이야기였다.

표지에 선명한 19금 딱지가 붙어 있던 그 소설은, 사실 체온을 유지하는 화끈한 방법보다도 개박살 난 엔딩으로 유명했다.

남녀주인공이 마지막에 끝내주는 씬을 보여주고 그다음 날 얼어 죽는, 일명 얼죽아 엔딩.

얼어 죽는 아이스 엔딩이란다.

주인공들은 망해버린 세계에서 ‘최후의 낙원’을 찾겠단 희망 하나로 버텼는데, 결국 찾질 못해 둘이 끌어안고 자살하고 만다.

그런데도 나는 나중에 읽어야지, 라는 생각으로 소설의 초반 회차를 구매했었다. 엔딩이 얼죽아라 그렇지, 기승전까지는 다양한 남주 후보들 때문에 쫄깃하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속을 모르겠는 은발에, 날뛰는 게 일상인 빨간 머리, 흑막인 걸 숨기는 서늘한 흑발 군인에, 시한부 금발 신관까지?’

이런 걸 안 보면 뭘 보고 사냐.

라고 생각했던 나, 이리 와 좀 맞자.

나는 눈 내리는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어제저녁, 나는 자선냄비 봉사활동에 나가 기계처럼 종을 흔들고 있었다.

입고 있던 패딩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자,

-딸랑.

종소리의 맑고 청아한 울림이 흰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저녁 내내 무아지경으로 흔들어 댔던 구세군 핸드벨이었다.

‘생각을 정리해 보자.’

어제저녁 내내 봉사활동을 했고, 자선냄비 모금을 잘 끝마친 후 냄비를 전달하러 사무실에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도둑놈!’

사건은 거기서부터였다.

봉사활동 내내 나는 종을 울리며 자선냄비에 기부금을 넣는 사람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자선냄비로 들어오는 현금을 보며 감사 인사를 외칠 때마다 그들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어떤 이들은 “많이 넣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는 인사를 해왔다.

많이 넣지 못해 죄송하다니요.

그 말과 쑥스러워하는 표정이, 취업 자소서에 한 줄이라도 더 채우기 위해 봉사에 나온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항상 돈이 생기면 가지고 싶던 걸 사느라 기부 같은 건 해본 적도 없는 나였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저녁 내내 따듯한 사람들을 만나 마음이 뜨끈해져 있던 나는 세상이 그런 사람들로만 차 있다는 환상에 잠깐 사로잡혔다.

곧바로 환상은 깨졌지만.

“내놔.”

강도였다.

후미진 골목, 차 뒤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강도는 강도질이 뭐가 그리 떳떳한지 내 앞에서 당당히 외쳤다.

너무 당당해서 내가 강돈 줄 알았다.

평소 같았으면 “네, 얼른 가져가세요.” 하고 나 살자며 뒤돌아 튀었을 테지만…….

‘이게 어떤 돈인데 너 같은 도둑놈한테?’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자선냄비를 가슴께로 옮겨와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강도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떨어트렸다. 어둠 속에서 올라가는 입꼬리를 본 듯도 하고.

그 순간 나는 등을 돌려 냅다 튀었다. 늦은 시간대였고 후미진 골목이라지만 서울이었다.

이 골목만 빠져나가면 사람이 있고 불을 밝힌 상점이 나올 테니까.

‘조금만 더…….’

-덥석.

망할.

마음은 수비수 없는 골라인으로 달려가는 공격수였는데, 몸은 그렇지 못했다.

골목이 거의 끝나, 어둠 속에서 막 빛을 밟으려던 때에 나는 놈에게 잡혔다.

“이 강도새끼가아악!”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이 틀어막혔다. 그리고 골목 안쪽, 어두운 주차장으로 질질 끌려갔다.

나는 뛰느라 힘이 다 빠졌는데 강도는 아니었는지 그는 내게서 너무나도 쉽게 자선냄비를 갈취했다.

여유롭게 뒤를 돌아 도망가려는 놈의 등을 보며 나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놈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뭔가가 필요했다.

주머니 속에 만져지는 무언가가 뭔지 떠올릴 겨를도 없이 일어나 팔을 높이 쳐든 순간.

-딸랑.

아, 맑고 청아한 종소리여.

종의 신이 있다면 지금은 조용히 해줘야 할 때가 아니냐.

-퍽.

강도는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은 채 자선냄비로 내 얼굴을 내려쳤다.

그래서 나는 눈을 떴을 때, 이곳이 소설 속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강도한테 납치돼서 어디 러시아로 끌려온 줄 알았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갑자기 바뀐 날씨와 배경을 설명할 길이 없었으니까.

보통 납치를 생각하면 외부로부터 시야가 차단된 창고나 지하에 가둬 두는데, 눈 내리는 허허벌판에 내버려 뒀다는 점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먼저 구조 요청을 하고 집에 연락부터 하자.’

주위에 날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 이때 빨리 도망쳐서 도와줄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하필 이런 날 핸드폰을 집에 두고 나올 게 뭐란 말인가.

꺼냈던 핸드벨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조심히 몸을 일으키던 그때.

“사람이 있습니까?”

“아, XX.”

깜짝 놀라 나와버린 욕을 다시 집어삼키며 상체를 낮추고 주위를 재차 둘러보았다.

분명히 개미 한 마리 없었는데, 어디서 소리가 난 거지.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으니 제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당신도 납치된 사람인가요? 생존자예요?”

“납치는 모르겠지만 아직 살아 있으니 생존자는 맞는 듯하군요.”

“이봐요, 어디서 말하고 있는 거예요?”

목소리는 들리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요. 이쪽입니다. 여기…….”

말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다 죽어가는 말소리는 소복하게 쌓인 눈더미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거 이제 보니까.

‘눈이 쌓인 형태가 사람 모양이잖아!’

쌓인 눈을 재빨리 파헤치자 드러난 건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외국인 아저씨였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외국인 아저씨가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정말……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아저씨 도대체 얼마 동안 이러고 있던 거예요? 일단 이 눈부터 치울게요.”

제 몸에 쌓인 눈을 치워내는 나를 외국인 아저씨는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녹색 눈동자에 투명한 물기가 차올랐다. 죽는 줄만 알았던 상황에서 나를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울까.

“아저씨 여기 어딘지 알아요? 구조 요청을 해야겠는데 핸드폰 가지고 계세요? 없으면 사람 사는 곳으로 좀 가야 할 것 같은데. 제 핸드폰은 집에 두고 나와서.”

“핸드……폰? 그런 건 없지만 꼭 줄 게 있습니다.”

“뭐든 구조 요청을 할 수 있는 거라면 주세요. 제가 빨리할게요.”

“이걸 받아주십시오.”

외국인 아저씨의 손에 들린 건 가죽으로 된 가방 손잡이였다.

“이 안에 있어요? 오케이, 아저씨. 제가 바로 구조 요청할게요.”

아저씨가 건네준 갈색 가죽 가방은 뭐가 잔뜩 들었는지 꽤 빵빵했다. 가방을 열자.

‘뭐야, 이게.’

수북이 들어 있는 작은 종이봉투 한 개를 열자 나온 건 씨앗이었다.

다른 봉투를 열어도 마찬가지였다. 모양과 색, 크기가 각기 다른 다양한 씨앗들이 가방 안에 빼곡했다.

“아직 얼지 않은 땅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중히 간직해 주십시오. 언젠가 이 세상이 다시 녹게 되는 그날에…….”

“저도 식물 좋아하는데요, 아저씨. 근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식물일까요?”

외국인 아저씨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가방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종이봉투들 사이로 단단하고 묵직한 작은 물체가 손안에 들어왔다.

끄집어내어 확인해 보니 까만 정사각형의 물체였다.

‘이거 무전기인가?’

언젠가 건설 현장을 지나다 비슷한 모양의 무전기를 본 기억이 났다.

어떻게 켜는 거지?

작은 기기를 이리저리 돌리다 작게 튀어나온 곳에 힘을 주자, 딸깍 소리와 함께 기기가 작동하는 듯했다.

기기에서 미세한 잡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아. 누구 계세요? 도와주세요. 구조 요청합니다. 사람은 둘인데 한 사람이 많이 아파요. 여기가 어디냐면…….”

“…….”

“아저씨, 여기 위치 아세요?”

그새 눈을 감고 있던 외국인 아저씨가 다시 가늘게 눈을 떴다.

“생존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에 혼자가 아니라 기뻤습니다.”

“아저씨, 무슨…… 아저씨!”

그 후로 감겨버린 아저씨의 눈이 다시 뜨이는 일은 없었다.

얼굴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자, 숨이 붙어 있긴 했는데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아…… 어…….”

놀라 떨어트렸던 무전기를 다시 손에 쥐었다.

‘아직 구할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빨리 구조만 된다면 아직은…….’

“이봐요, 거기 아무도 없어요? 사람이 죽는다구요! 제 앞에서 사람이 죽어간다구요! 제발……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그때.

-치, 치직.

무전기가 반응함과 동시에 눈앞에 처음 보는 푸른 창이 떴다.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동기화 진행 중: 〘1%〙]

여기가 러시아라면 이런 창이 뜨는 건 많이 이상한데.

나는 소설이나 게임 속에서만 보던 상태창의 실물 버전을 노려보았다.

연이어 다른 상태창이 와다다 떴다.

[튜토리얼: 사람이냐 짐승이냐, 그것이 궁금하다 (0/5)]

[튜토리얼 진행 중 플레이어의 사망을 막기 위해 ‘위협 감지’와 기본 무기 사용이 주어집니다.

튜토리얼 진행 중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무기화’합니다.]

상태창이 나와서 냅다 무기 사용부터 알려준다?

나는 어딘가 익숙한 전개에 입술을 깨물었다.

‘러시아 아니네. 생존물 빙의네, 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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