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3 재벌에이스 =========================
노태섭은 어차피 뛰지도 못할 시합이지만 덕 아웃에서 눈빛을 빛내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누군가를 쭉 주시해 왔다. 그 누군가는 바로 자신과 동년배로 현재 대한민국에서 최고 에이스로 꼽히고 있는 최민혁이었다.
“진짜 대단하네. 천재는 천재야.”
그는 공수에 걸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최민혁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가 가장 놀란 건 최민혁의 수비였다. 유격수로서도 엄청난 활약을 보이더니 중견수로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완전 사기다. 사기야.”
저 정도 실력이면 당장 1군에서 뛰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태섭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1군에서 중심타자로 뛰어야 할 수준이었다. 현재 실력이라면 수비적인 측면에서 오히려 자기보다 나았다.
노태섭은 수비가 약해서 매번 1루수에서 수비를 봤으니까. 하지만 공격적인 측면에서 노태섭은 자신이 최민혁에 뒤진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최민혁이 3연타석 홈런을 치고 있어도 말이다.
노태섭에게 홈런을 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 정도로 노태섭은 타고난 장타력을 자랑하는 타자였다. 그런 그에게 5회 말 태산 베어스 2군 공격이 끝나고 봉준석 감독이 다가왔다.
“준석아. 대타로 한 타석만 나와 줄 수 있겠니?”
그 말은 홈런 한 방이 필요하단 소리였다. 팀의 분위기가 그 만큼 안 좋다는 소리기도 했고.
“그러죠.”
사회인 야구단을 상대로 홈런? 그건 노태섭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최민혁 같은 괴물 에이스들이 있는 1군 무대가 아니면 노태섭은 언제든 담장을 넘길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6회 말에 노태섭은 봉준석 감독의 부름에 기꺼이 대타로 나섰다.
쐐애애액!
펑!
타석에 들어 서기 전 상대 투수의 연습 투구를 엿봤다. 제법 빠른 공. 사회인 야구단의 투수가 던질 수 있는 공이 아니었다.
거의 150Km/h의 구속이 나오는 거 같았으니까. 하지만 같은 150Km/h의 구속이라도 에이스와 아닌 투수의 차이는 있었다.
바로 구질, 즉 공의 종속의 차이 말이다. 날아오는 공의 구속이 갈수록 떨어지면 그런 공은 노태섭이 언제든 맞춰 때릴 수 있었다. 하지만 공의 구속이 덜 떨어지면 그 만큼 노태섭도 그 공을 맞춰 때리기 어려웠다.
지금 타이탄스 마운드에 투수는 전자에 해당 되었다. 때문에 150Km/h에 가까운 패스트볼이라도 노태섭에게는 배팅 볼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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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배트를 휘두르고 타석에 들어선 노태섭은 제법 이 악물고 던지는 상대 투수의 공을 가볍게.....
‘뭐, 뭐야?’
그런데 갑자기 몸이 묵직해졌다. 평소 최악의 컨디션일 때 나오는 몸의 반응이었다. 물론 그래도 이 정도 공을 칠 수 있었다.
따악!
칠 수는 있는데 그 타구를 그가 원하는 곳을 보낼 수는 없었다. 배트 스피드가 조금 늦었는지 타구는 좌측으로 날아갔다. 운 좋으면 폴대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런 운은 없었다. 그랬다면 갑자기 이렇게 몸이 나빠지지도 않았을 터.
노태섭은 파울 홈런을 쳐 놓고 일단 타석을 물러섰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부웅!
컨디션이 나쁠 때 그가 그걸 극복하기 위해 취하는 일종의 제스처였는데 그래도 최악의 컨디션은 극복이 되지 않았다.
따악!
이번에 타구는 우측으로 날아갔다. 배트 스피드가 조금 빨랐던 것이다.
“쳇! 귀찮게 하는군.”
노태섭은 자신의 컨디션 조절이 쉽지 않자 투덜거렸다. 하지만 감은 잡았다.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타이밍. 그 타이밍대로 공을 치면 공을 펜스 너머로 넘길 수 있을 테니까.
그때 마운드의 타이탄스 투수 원성우는 이를 꽉 깨물었다. 상대가 노태섭이란 걸 아는 순간 원성우는 투지를 불태웠다.
그가 대화 이글스 마무리 투수 때 원성우는 노태섭에게 끝내기 홈런을 무려 3개나 맞았다. 그러니 그와의 만남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렇다고 승부를 피할 순 없는 노릇. 원성우는 이번 만은 노태섭을 깔끔히 잡아 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2군으로 내려 온 노태섭이었다. 발목 부상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정상 컨디션은 아닐 터. 원성우는 자신이 노태섭을 충분히 잡아 낼 수 있을 거라 봤다. 하지만 웬걸 그에게 공을 던져 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괴물!’
노태섭은 원성우가 이 악물고 던진 2개의 패스트 볼을 통타해서 좌, 우로 파울 홈런을 쳤다.
그 때문에 원성우는 자신이 마치 배팅 볼 투수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 타이탄스의 투수가 재미있는 사인을 냈다.
원성우가 요즘 배워서 던지고 있는 포크 볼을 타이탄스의 포수가 바로 지금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무조건 배트를 휘둘러 대는 노태섭이라면 먹힐 수도 있는 유인구였다.
원성우는 바로 고개를 끄덕인 뒤 호흡을 골랐다.
“후욱! 후욱!”
그리곤 와인드업 뒤 힘차게 공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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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우가 던진 공은 직구처럼 한 복판으로 날아갔다. 그걸 보고 노태섭은 일고의 망설임 없이 배트가 나왔고.
‘됐다.’
노태섭은 이번 타구는 정상적으로 펜스를 넘길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헉!’
그런데 잘 날아오던 직구가 홈 플레이트 앞에서 확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라차차차!”
바로 그때 노태섭이 휘두르던 배트를 앞으로 쭈욱 더 내밀며 퍼 올렸다. 이건 아무 타자나 할 수 있는 배트 스윙이 아니었다. 이미 나온 배트의 궤적을 바꾸다니 말이다. 그런 짓을 지금 노태섭이 했다. 그것도 최악의 컨디션인 상태에서.
따악!
노태섭은 떨어지는 공을 기어코 걷어 올렸다.
“젠장.....”
그래 놓고 노태섭의 얼굴이 바로 일그러졌다. 그럴 것이 하필 걷어 올린 타구가 정타로 펜스를 향해 날아간 것이다. 이럴 때는 살짝 빗맞아서 파울이 되야 하는데 말이다. 노태섭은 일단 배트를 던지고 1루로 뛰기 시작했다.
타구는 운 좋으면 펜스를 넘어 갈 거 같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 팔로스윙이 약했다. 즉 임펙트 있는 스윙이 이뤄지지 못했기에 타구가 더 뻗지 못할 공산이 컸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막을 모르는 양팀 선수들은 다들 벌어진 입으로 그 타구를 지켜봤다.
태산 베어스 덕 아웃의 선수들은 저 공이 넘어 가기를, 반면 타이탄스 덕 아웃의 선수들은 그 공이 넘어가지만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타구는 점점 펜스쪽으로 날아갔고 누가봐도 넘어 갈 거 같았다.
“아아!”
제일 먼저 마운드의 원성우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가 봤을 때 타구가 좌측 펜스를 넘길 거 같았던 것이다. 실제로 타이탄스의 좌익수는 워닝 트랙 앞에서 멈춰서 있었다.
그때였다.
“어어?”
원성우의 눈에 갑자기 같은 팀 선수가 한 명 더 나타났다. 그는 워닝 트랙을 지나서 곧장 펜스로 뛰어가더니 펜스를 발로 밟고 몸을 솟구쳐 올렸다. 그리고 쭈욱 뻗은 팔!
그때였다. 타구가 급격히 힘을 잃고 떨어져 내렸고 갑자기 등장해서 펜스 위로 몸을 솟구친 그 선수의 팔 위쪽 끝에 끼고 있던 글러브 속으로 타구가 빨려 들어갔다.
“맙소사!”
원성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세상에 저런 홈런 성 타구를 잡아내다니. 그 선수가 누군지 모를 원성우가 아니었다.
“최민혁!”
원성우의 입에서 그 선수의 이름이 나왔고 동시에 그는 최민혁을 향해 글러브 박수를 쳐 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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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그 타구를 친 주인공인 노태섭은 1루를 막 돌아서 2루로 뛰다가 최민혁이 펼쳐 보인 환상의 펜스 플레이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씨발......”
그리고 입에서 자연스럽게 욕설이 튀어 나왔다. 왜 안 그렇겠는가? 홈런을 쳤건만 그걸 최민혁이 억지로 걷어 내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노태섭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내 잘못이다. 녀석이 잡지 못하게 확실히 넘겨 버렸어야 했어.”
노태섭은 이내 몸을 돌려서 덕 아웃으로 향했다. 당연히 덕 아웃으로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노태섭의 아웃으로 태산 베어스 2군의 6회 말 공격도 득점 없이 끝나고 말았다.
스코어 5대 10!
여전히 태산 베어스 2군은 타이탄스와의 점수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7회 초 수비에 나섰다. 대타 노태섭은 발목이 성치 않아서 당연히 수비에 나서지 못하고 교체가 되어 덕 아웃 안으로 들어갔다.
“............”
그런 그에게 봉준석 감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봉준석 감독도 오늘 노태섭이 운이 나빴단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쳇!”
덕 아웃 벤치에 앉은 노태섭은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고는 투덜거렸다. 타석에 섰을 때와 달리 몸 컨디션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 온 것이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최민혁이 아니라 최민혁이 사다리를 타고 펜스 플레이를 해도 그 머리 위로 타구를 날려 버릴 자신이 있건만. 이미 그에게 주어진 기회는 사라지고 없었다.
노태섭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마운드로 돌렸다. 태산 베어스 2군의 마운드는 앞서 6회 초에서 타이탄스 타선을 잘 막아 낸 마윤석이 올라가고 있었다.
노태섭은 마윤석이 8회까지 무난히 타이탄스의 타선을 막아 내 줄 거라 여겼다. 그 정도로 마윤석은 까다로운 공을 던지는 투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웬걸 막상 7회 초가 시작 되자 마윤석은 타이탄스 첫 타자에게 너무도 쉽게 안타를 허용했다. 마윤석의 2구 슬라이더를 기다렸다는 듯 상대 타자가 때린 것이다.
따악!
잘 맞은 타구가 2루수 키를 훌쩍 넘겼다. 그리고 타석에 오늘 문제의 그 타자. 3연타석 홈런의 주인공 최민혁이 등장했다. 당연히 양팀 모든 시선이 녀석에게 집중 되었다.
“설마......”
노태섭은 최민혁이 이번 타석에서는 홈런을 치기 어려울 거라고 봤다. 마윤석은 다른 건 몰라도 홈런은 잘 내주지 않는 투수였으니까. 그래서 팀 내 타자들 중에서 마윤석에게 홈런을 친 타자는 자신과 지금 4번 타자로 뛰고 있는 윤동석 뿐이었다.
“재미있겠네.”
노태섭이 싱긋 웃으며 팔짱을 낀 체 마운드와 타석을 주시했다. 마운드의 마윤석과 타석의 최민혁 간의 두뇌 싸움에서 과연 누가 이길지 노태섭의 궁금증을 자아내기 충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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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와 6회를 삼자 범퇴로 잘 처리한 마윤석은 7회도 마찬가지로 그런 분위기를 이어 나가고 싶었다. 물론 2번부터 시작하는 상위 타선에 오늘 3연타석 홈런의 주인공인 최민혁을 상대해야 하기에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와의 승부를 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 마윤석이었다.
마윤석은 홈런을 잘 안 주기로 유명했다. 반면 안타는 많이 맞았다. 그 때문에 그가 지금 2군 무대에 있는 거고.
때문에 마윤석은 오히려 큰 걸 노리고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는 잘 잡아냈다. 만약 최민혁이 4연타석 홈런을 노리고 타석에 들어선다면 한 번 해볼 만한 승부를 펼칠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