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6 재벌에이스 =========================
민정숙을 데리러 온 잘생긴 중년 남자의 정체는 바로 그녀의 남편 최한성이었다. 서부지검 차장검사인 그는 아내가 사흘 동안 어떻게 싸워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민정숙이 수시로 그에게 전화해서 그와 모든 일을 상의했기 때문에.
그는 남편으로서 그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그가 서부지검의 차장 검사로서 그녀를 위해 해 준 일은 하나도 없었다. 비록 민정숙이 자신의 부인이라고 하지만 사사로이 자신의 권력을 그녀를 위해 쓰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민정숙은 그의 도움 없이도 결국 싸워서 이겼다. 그리고 성장했다.
최한성도 사실 민정숙이 경찰서장을 끝으로 경찰 옷을 벗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각성을 했고 그로 인해 더 성장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최한성도 깨달은 게 많았다.
최한성의 꿈은 지검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 꿈은 이대로 무난히 지검 생활을 하다보면 이뤄질 꿈이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부인인 민정숙을 보고 자신의 꿈이 너무 하찮게 느껴졌다. 물론 지검장이 되기도 어렵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높은 곳, 그가 원하는 검찰 개혁을 이룰 수 있는 위치. 최한성은 그 곳까지 오르는 것으로 꿈을 바꿨다. 그러기 위해서 최한성도 더 이상 몸을 사리고 있어선 안 됐다. 자신의 부인처럼 세상 전면에 나서야 할 터였다. 그런 자신의 생각을 부인에게 말하자 민정숙이 그를 보고 말했다.
“저도 응원할게요. 당신이라면 분명 멋진 검찰총장이 될 거예요.”
최한성은 아내의 응원에 용기백배해졌다.
“근데 우리 어디가요?”
집에 가는 길은 이미 지나쳤다. 민정숙의 물음에 최한성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민혁이가 준 게 있소.”
그러더니 운전 중 안쪽 호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서 민정숙에게 건넸다. 민정숙은 의아해 하며 봉투를 받아서 그 안을 살피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이건 백제 호텔의 숙식권이잖아요?”
“녀석이 특별히 전망 좋은 방으로 잡았다고 했소.”
남편의 그 말에 민정숙이 얼굴을 붉혔다. 마치 지금 신혼여행이라도 가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때 최한성이 이어 말했다.
“민혁이 말이요. 많이 바뀌었지?”
“네. 확실히 바뀌었죠. 좋은 쪽으로요.”
“낼 모레에 괌으로 간다고 했소?”
“네. 그렇다고 들었어요.”
“으음. 녀석이 가고 나면 집이 또 조용하겠군.”
“다혜가 있잖아요.”
“그래도.........”
한 동안 말이 없던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그걸 보고 두 사람이 각자에게 물었다. 왜 웃었냐고. 그러자 최한성은 최민혁이 어릴 때 자기 앞에서 당당히 야구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가 생각나서 웃었다고 했고 민정숙은 어릴 때 최민혁이 바쁜 부모 대신 여동생 최다혜를 업어 재우고 있을 때가 생각나서 웃었다고 했다. 그래봐야 그때 그도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의 아이였을 때였는데 말이다.
백제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두 사람만을 위한 디너가 따로 준비 되어 있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아들에게서 받은 숙식권이 보통 티켓이 아님을 깨달았다. 환상적인 디너 뒤 그들이 하룻밤 묵어 갈 방으로 호텔직원이 직접 안내를 해 주었다.
“맙소사. 여긴.........”
그랬다. 최민혁이 부모님을 위해서 스위트룸을 예약해 둔 것이다. 그날 밤 최민혁의 부모, 최한성과 민정숙은 호텔 스위트룸에서 의미 있는 하룻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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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숙 총경이 보직 해임 된 직후 오성그룹의 비서실장 유태국은 강동 경찰서에서 바로 풀려났다. 그런 그를 경호 2팀장 주민성이 직접 강동 경찰서에 나타나서 그를 픽업했다.
“본사로 가자.”
하지만 유태국을 태운 차는 오성그룹 본사가 아닌 서울 외곽으로 나갔다. 순간 유태국이 긴장한 얼굴로 주민성에게 물었다.
“회장님이 날 보자시던가?”
그러자 주민성이 짧게 대답했다. 주민성과 오성그룹 경호원들이 유태국을 싣고 간 곳은 바로 뉴서울CC, 즉 골프장이었다. 그곳엔 유태국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던 방이 있었고 그 방엔 유태국이 여기서 골프를 칠 때 입던 옷들도 있었다. 유태국은 그 방에서 골프 칠 준비를 마치고 골프장으로 안내 되었다.
따악!
온통 푸른 골프장에서 박규철 회장이 시원스럽게 공을 치고 있었다.
골프장은 평소 사람이 많은 토요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도 한 명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말은 박규철 회장이 이곳을 통째 빌렸단 소리였다. 아니. 이곳이 그의 소유이니 빌렸다는 말은 맞지 않았다. 박규철 회장을 위해 오늘 하루 휴업한 거라고 봐야했다.
유태국은 쭈뼛거리며 박규철 회장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자 힐끗 그를 쳐다본 뒤 박규철 회장은 계속 공을 쳤다.
박규철 회장은 보기와 달리 꽤 장타를 쳤다. 그래선지 그가 치는 공을 쭉쭉 잘 뻗어 나갔다.
그때 갑자기 들고 있던 골프채를 박규철 회장이 캐디에게 건넸다. 그리고 말했다.
“이걸 들고 있으면 저 새끼 머리통을 날려 버릴 거 같아서 말이야.”
이때 박규철 회장이 말한 저 새끼가 누군지는 뻔했다. 이곳 골프장에 캐디들과 경호원들 빼고 나면 유태국 밖에 없었으니까.
털썩!
유태국이 박규철 회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송, 송구스럽습니다.”
그런 유태국을 보고 박규철 회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내가 사람을 영 잘못 봤어. 영준이 서포트는 해 줄 거라 여겼는데. 너 이것 밖에 안 되는 놈이었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유태국은 변명을 하려다 그만뒀다. 박규철 회장은 약자나 패자의 변명 따위를 들어 줄 정도로 아량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유태국을 보고 이미 결심을 굳힌 듯 박규철 회장이 말했다.
“한 달 주도록 하지. 김정필이 한데 인수인계하고 그만 쉬도록 해.”
“회장님!”
박규철 회장의 얼굴이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그 얼굴을 본 순간 유태국은 깨달았다. 그에 대한 박규철 회장의 총애가 끝났다는 걸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다음 비서실장이 될 김정필이 유태국이 직접 키운 자란 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자기 사람인 건 아니었다. 그래도 유태국과 사이가 나쁘지 않는 게 어딘가?
“수고 했어. 마지막으로 나와 같이 라운딩이나 돌도록 하지.”
“네.”
유태국은 이것이 박규철 회장과 함께 하는 마지막 라운딩이란 게 서글펐지만 그걸 티내지 않았다. 그리고 열심히 쳤다. 여태 박규철 회장과 골프를 치면 늘 져왔던 그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11홀에서는 이글까지 쳤다. 그리고 16번 홀부터 쭉 보기로 마무리 하며 박규철 회장을 10타차로 앞서 이겼다.
박규철 회장은 자신이 져서 기분이 나빴는지 아니면 앞으로 유태국을 볼 수 없는 것이 서운해서 그런지 굳은 얼굴로 말없이 골프장을 빠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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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혁은 오성그룹의 힘을 새삼 실감했다. 최민혁의 의도대로 된 것은 서울경찰청장의 비리 사실을 폭로 하는 것 까지였다. 그 뒤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모든 것이 빠르게 정리 되었다. 최민혁이 뭔가 해 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핵폭탄 급 사건이 터진 것이다.
바로 국민배우 안요섭의 자살! 그로 인해 대한민국이 다 침울해졌다. 그리고 유태국도 서울경찰청장의 비리도 다 묻혔다.
최민혁은 그 사건의 배후가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과거 차성국으로 살았을 때 오성그룹에 대형 악재가 터졌다.
바로 다른 그룹에서 박규철 회장의 문란한 사생활을 몰래 찍은 동영상을 공개 한 것이다. 그때 오성그룹에서 그 사태를 덮기 위해 쓴 것이 바로 다른 스캔들이었다.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남자 톱 배우와 여자 톱 배우간의 스캔들. 문제는 그 두 배우가 유부남, 유부녀였단 점이었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어졌고 결국 두 배우는 사랑의 도피를 선택하면서 그 스캔들도 마무리가 되었다.
그 스캔들에 묻혀 박규철 회장의 동영상에 대한 건 소문일 뿐이라며 유아무아 되었고 대신 그 동영상을 몰래 찍은 자들은 구속되었고 그 그룹은 오성그룹과 거액의 소송에 휘말렸다.
그 소송의 결과는 오성그룹의 승리로 돌아갔고 그 그룹은 그 문제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최민혁은 안요섭의 자살을 보고 그때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최민혁은 박규철 회장으로 능력빙의를 했다.
“역시........”
최민혁의 예상이 맞았다. 국민배우 안요섭의 자살은 오성그룹의 작품이었다. 평소 우울증에 시달리던 안요섭을 오성그룹에서 손을 쓴 것이다. 그 자세한 내막까지 박규철 회장은 알지 못했다. 아니 알 필요도 없었다. 그에게는 그 결과가 중요했을 뿐.
거기에 더해서 최민혁은 박규철 회장이 결국 유태국 비서실장을 물러나게 하기로 결정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임으로 김정필 오성 전자 전무를 염두에 두고 있음도.
김정필 전무는 차성국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당연히 박규철 회장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그룹 전반에 대해 잘 알았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그가 후계 구도에서 멀어진 박민주와 인연이 깊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박규철 회장의 의중이 아들인 박준영에게서 딸인 박민주에게로 기울고 있음을 이번 새로운 비서실장의 선택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박규철 회장이 딸인 박민주에게 회사를 넘기지는 않을 거라고 봤다.
실제로도 박규철 회장은 박민주를 마라톤에서의 페이스메이커 정도로 여기는 듯 했다. 즉 경쟁자인 박민주를 급부상시켜서 박영준을 긴장하게 만든 뒤 박영준이 정신 차리게 만들고 나면 박민주는 또 내 칠 생각이었던 것이다.
같은 자식인데 딸에만 유독 가혹한 박규철 회장에 최민혁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서 박민주가 안 됐다는 생각도 들었고.
박민주도 양반은 못 되는 게 최민혁이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네. 민주씨.”
-잘 지냈죠?
“네. 민주씨는요?”
-저도 잘 지냈어요. 근데 민혁씨. 비시즌 중인데 야구 하세요?
아마 구단주인 그녀의 귀에 최민혁이 사회인 야구단에서 뛰고 있단 소리가 들어 간 모양이었다.
“네. 뭐 가볍게.....”
-구단 사람들이 말이 많아요. 곧 전지훈련 갈 선수가, 그것도 팀의 에이스가 비시즌 중에 야구를 한다고요. 공도 던졌다면서요? 나정 히어로즈 2군을 상대로?
역시나 박민주는 다 알고 있었다. 그렇단 건 구단의 불만을 그녀가 잠재웠단 소리기도 했다. 안 그랬으면 구단에서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났을 테니까.
“하하하하. 아시는 군요. 그게 좀 심심해서 몸 좀 푸는 수준에서 던져 봤을 뿐입니다.”
-제가 그런 일로 선수에게 연락해서 귀찮게 하지 말라고 지시는 내려 뒀지만 그래도 조심하세요. 부상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요.
최민혁의 예상이 맞았다. 역시 박민주의 개입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