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8 재벌에이스 =========================
그렇다고 이미 선곡 되어 있는 곡을 바꿀 수 없었다. 또 바꾼다 해도 무슨 곡으로 바꾼단 말인가?
이번에 그가 선곡한 곡도 그가 부를 수 있는 고음의 끝판이었다. 여기서 더 올렸다간 그의 목이 상할 판이었다.
“어쩔 수 없네. 여기서 쫑 나는군. 그나저나 노PD 대단해. 어디서 저런 녀석을 구한 거지? 근데 목소리만 들어선 분명 젊은 녀석인데. 누구지?”
이정훈이 사실상 자포자기 한 상황에 빠져 있을 때 그의 대기실에 노크 소리가 울리고 빼꼼 안으로 고개를 내미는 사람이 있었다. 그를 보고 이정훈이 말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어서 들어와.”
이정훈의 말에 노우석 PD가 그의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준비 잘 돼 가요?”
“여기 짐 쌀 준비?”
“에이. 또 말을 그렇게 하시나. 우리 사이에.”
“너 말 한 번 잘했다. 우리 사이에 이럴 수 있어? 나 6회 우승 만들어 주는 게 그렇게 배아팠냐?”
“그게 아니라 위에서 하도 쪼아대서. 왜 저번 회 시청률이 10%였잖아? 10%밑으로 떨어지면 나보고 어떻게 책임 질 거냐며 어찌나 국장이 닦달을 해 대는 지.....”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녀석 대체 누구야?”
“누구?”
“네가 말한 다크호스! ‘천하무적 대왕 쥐’ 말이야.”
“아아!”
노우석PD는 차마 이정훈에게 ‘천하무적 대왕 쥐’가 그가 말한 다크호스가 아니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굳이 할 필요도 없었고. 대신 이정훈에게 차마 그 다크호스가 야구 선수 최민혁이란 말을 할 수 가 없었다.
물론 뒤에 알게 되겠지만 지금 알면 성질 더러운 이정훈이 그의 멱살을 잡을 지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그 책임을 자신의 상관인 예능국장에게 돌렸다.
“사실 나도 ‘천하무적 대왕 쥐’가 누군지 몰라.”
“뭐? 그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담당 PD가 모르면 누가 알아?”
“국장님이 직접 섭외해 온 사람이야. 그래서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 있고.”
“김 국장이?”
“궁금하면 국장님에게 형이 직접 물어 보던가.”
MBS예능국장과 이정훈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예전에 술 마시고 서로 멱살잡이를 한 이후 지금껏 두 사람은 화해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MBS예능국장에게 이정훈이 죽었다 깨도 ‘천하무적 대왕 쥐’가 누군지 물어 볼 리 없었다. 그걸 알기에 노우석 PD가 MBS예능국장 핑계를 댄 것이고 말이다.
“쳇! 그 녀석이 누군지 오늘 알 긴 틀린 모양이군.”
하지만 이정훈도 그리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다. 노우석PD가 자신에게 일부러 ‘천하무적 대왕 쥐’가 누군지 알려주지 않기 위해서 MBS예능국장을 끌어 들인 것쯤은 그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PD였다. 그가 말하기 싫다는 데 억지로 알아내려다 오히려 그와 척이라도 지면 이정훈 자신의 손해였다.
방송계에 잔뼈가 굵은 이정훈은 이럴 때 그냥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최선이란 걸 알았다.
“시간 다 되어 가네요. 무대에서 봐요.”
“그래.”
이정훈은 노우석 PD가 대기실을 나가기 전까지 웃고 있다가 그가 나가자 바로 얼굴을 굳혔다.
“개새끼. 나와 달라고 애원 할 땐 언제고 5주 동안 이용할 거 다 이용해 처먹고 나니 이제 내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는 단 말이지?”
씩씩거리든 이정훈은 스스로 화를 참아냈다. 그리곤 가면을 쓰고 오늘 자신의 마지막이 될 무대를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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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
짝짝짝짝짝!
‘가면 노래왕’의 노래왕 ‘철혈의 공작’이 무대에 등장하자 관객들이 열렬히 그에게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춤추는 마징가’는 그 동안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5주 동안 노래왕 자리를 지켜왔다. 그는 항상 위기에 강했고 이번에도 그가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노래왕의 자리를 지킬지 관중들도 궁금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상대가 너무 셌다.
노래왕은 무대에 서자 MC윤봉규가 그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춤추는 마징가’님. 오늘 어떻게 노래왕 자리를 사수하실 수 있으실 거 같으세요?”
MC윤봉규의 그 물음에 ‘춤추는 마징가’는 한숨부터 내 쉬었다.
“하아. 이번 도전자는 너무 강해서......... 자신 없지만 최선은 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기대하겠습니다.”
MC윤봉규는 빨리 인터뷰를 마치고 무대를 내려갔다. 그리고 무대 한 가운데에 선 ‘춤추는 마징가’가 노래 부를 준비가 되자 바로 뒤쪽 밴드와 오케스트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지휘자가 그걸 보고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울리고 ‘춤추는 마징가’가 노래를 시작했다. ‘철혈 공작’가 도전을 저지하기 위해 선택한 곡은 ‘썸머 타임’이란 락발라드였다. 그걸 자기에 맞게 편곡해서 ‘춤추는 마징가’가 불렀는데 절로 탄성이 흘러나올 만큼 멋들어지게 노래를 불렀다.
“역시........”
썩어도 준치라도 ‘춤추는 마징가“는 5주 우승자다운 실력을 선보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오케스트라 연주가 뚝 끊기더니 밴드만 연주를 했다. 그런데 그 탬포가 빨랐다.
“어어!”
그리고 다들 놀란 눈으로 무대 위를 쳐다보았다. ‘춤추는 마징가’가 빠른 템포의 음악에 맞춰서 율동을 선보인 것이다.
그걸 보고 패널들은 물론 방청석의 관중들도 흥이 나서 따라 춤을 췄다. 그 장면을 보고 노우석 PD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저 형 진짜 별짓을 다하네.”
그러면서 노우석 PD는 이정훈이 말한 비장의 무기가 바로 저 춤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비장의 무기는 상당히 효과가 있어 보였다. 관중들이 다들 흥겨워하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만약 최일환이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출연했다면 어땠을까? 노우석 PD는 자신했지 ‘훨훨 나는 귀뚜라미’로 이정훈을 잡지 못했을 공산이 더 컸다. ‘춤추는 마징가’가 저렇게 춤까지 추며 노래를 부를 거라곤 예상치 못했으니까. 그런 점에서 노우석 PD는 최민혁이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MBS예능국장은 아직 5주 우승의 벽이 깨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게 오늘 깨졌다면 아마 노우석 PD가 국장에게 오지게 깨졌을 터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노우석 PD는 뭐가 허전했다. 그게 뭔지 주위를 살피며 곰곰이 생각하던 그의 머릿속에 그게 뭔지 생각이 났다.
“영철이 이 새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바로 노우석 PD의 수족 노릇을 해주고 있는 FD이영철이 2라운드 무대가 끝난 이후부터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야! 영철이 빨리 찾아와.”
노우석 PD는 근처 스태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FD를 찾아내서 빨리 자기 앞으로 데려 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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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노래왕’의 FD 이영철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를 했다.
‘제발 최민혁이 3라운드에서 떨어지게 해 주세요.’
그의 기도는 처음에 먹혀드는 거 같았다. ‘훨훨 나는 귀뚜라미’가 멋지게 노래를 불러 준 것이다. 이영철도 여기 FD생활이 벌써 2년째다. 딱 노래를 들어 보면 그 출연자가 노래왕이 될지 아닐지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영철이 보기에 이번 주에 노래왕이 바뀔 거 같았다. ‘훨훨 나는 귀뚜라미’로 말이다.
무엇보다 이영철은 ‘가면 노래왕’의 노우석 PD가 5주 우승자인 현 노래왕 ‘춤추는 마징가’를 왕좌에서 끌어 내리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훨훨 나는 귀뚜라미’가 노래왕이 되는 건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최종 결정은 방청객들이 하겠지만 제작진은 얼마든지 그들이 원하는 출연자를 관중들이 찍게 만들 수 있는 노하우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노하우들을 총 동원하면 ‘춤추는 마징가’는 떨어지고 ‘훨훨 나는 귀뚜라미’가 새로운 노래왕의 왕좌를 차지하게 될 터였다.
물론 그 전에 ‘훨훨 나는 귀뚜라미’가 3라운드에서 ‘천하무적 대왕 쥐’를 이겨야 할 테지만.
“헉!”
그런데 최민혁이 3라운드에서 단단히 사고를 쳤다.
“미친......”
이영철이 봐도 미친 무대였다. 그리고 그 무대가 끝났을 때 이영철은 최민혁이 노래왕이 되는 게 당연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노래왕이 되어선 안 됐다. 왜냐하면 그는 노래왕이 될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니 노래왕은 되더라도 도전을 받을 수 없는 노래왕이었으니까.
“젠장...... 이거 어쩌지?”
최민혁은 전지훈련을 핑계로 아까도 출연 계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때 다시 그에게 이따 보자고 했지만 다시 그를 본다고 그가 순순히 출연 계약서에 사인을 해 줄 거 같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FD에 불과했고 PD가 출연 계약서에 사인을 받아 오라고 했으면 무슨 수를 쓰던 사인을 받아내야 했다. 그걸 못하겠다면.........짐을 싸야 할테고.
이영철은 다시 부딪쳐 보기로 하고 3라운드 후 10분간 주어진 휴식 시간에 최민혁의 대기실을 찾았다.
“최민혁 선수. 정말 노래 잘하시네요. 이 정도 일 줄 몰랐습니다.”
이영철은 일단 최민혁을 극찬했다. 하지만 그가 왜 온 줄 아는 최민혁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래봐야 소용없어요. 난 그 계약서에 사인할 생각 없으니까.”
“그럼 출연료도 받지 못합니다.”
“안 받아도 돼요. 그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는 것 보다 나을 테니까.”
이영철은 어떡하든 최민혁을 설득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서 발끈한 이영철이 버럭 소리쳤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러실 거면 오늘 여기 나오지 말았어야죠. 사람이 무책임하게.”
“무책임?”
이영철의 말에 최민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영철은 당당하게 말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가면 노래왕’에 출연했고 노래왕이 되면 당연히 도전자의 도전을 받아 줘야 할 거 아닙니까? 그게 싫으면 여기 출연하지 말았어야지요.”
이영철의 그 말에 최민혁이 갑자기 고개를 끄덕였다. 이영철은 그걸 보고 자기 말이 최민혁에게 먹혀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잘 들어요. 사람 귀찮게 사는 FD님. 나는 ‘가면 노래왕’에 출연하고 싶어서 여기 온 게 아닙니다. 그 사정은 내 입으로 말하기 짜증나니까 여기 MC에게 물어 봐요. 그리고 나는 ‘가면 노래왕’에서 노래왕이 되면 도전자의 도전을 받아 줘야 한다는 사실도 몰랐어요. 그러니 거기에 대한 책임도 질 필요가 없겠지요. 자. 내 할 말은 다 했으니까 그만 나가 주실래요?”
최민혁이 문쪽을 손짓으로 가리켰고 이영철은 최민혁의 대기실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장 MC윤봉규의 대기실로 향했다.
“뭐, 뭐라고요? 세상에. 그런 식으로 사람을 섭외하는 게 어디 있어요?”
거기서 MC윤봉규에서 최민혁을 어떻게 급하게 섭외했는지 모든 전모를 전해들은 이영철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왜 최민혁이 출연 계약서에 사인을 안 하려는 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어쭈? 너 이 새끼 지금 뭐하자는 거야? 어디서 눈을 부라려. 하아. 이제 하다하다 FD새끼도 날 우습게보네.”
MC윤봉규가 소매를 걷으며 소리쳤다.
“너 일루 와!”
MC윤봉규는 잡히면 정말 이영철을 칠 기세였다. 그래서 맞기 전에 후다닥 MC윤봉규의 대기실을 빠져 나온 이영철은 이 사실을 알리려 노우석 PD에게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