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0 재벌에이스 =========================
곰탱이도 고기를 다 먹고 나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곧 깨달았다.
“잘 먹었습니다.”
그래서 눈치껏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고 그 자리를 떴다. 곰탱이가 위층으로 자진해서 올라갔을 때 이미 갈비는 뼈만 수북이 남았고 한돈(돼지고기)도 다 먹고 삼겹살 두 줄 정도만 남지 않은 상태였다. 최민혁은 그걸 전기 팬에 올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기 좀 더 사올게요.”
최민혁의 그 말에 그제야 구겨져 있던 가족들의 얼굴이 펴졌다. 최민혁은 곧장 집을 나서서 아랫동네 중형 마트로 가서 돼지고기를 부위별로 한 근씩 사서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열심히 가족들과 그 고기를 구워 먹었는데 그때 곰탱이가 슬그머니 밑으로 내려오려 시도를 했다. 그걸 보고 모친이 바로 외쳤다.
“야! 너 휴지 가지고 너희 집에 가!”
모친의 서슬 퍼런 그 말에 염치도 없는 곰탱이도 바로 돌아서 2층으로 도로 올라가게 만들었다. 그 뒤 고기가 넉넉했기에 최민혁의 가족들은 맛있게 그 고기를 구워서 먹었다.
“아아. 배불러.”
먼저 여동생인 최다혜가 젓가락을 놓았고 그 뒤로 모친, 그리고 부친과 최민혁이 남은 고기를 마저 다 구워 먹었다.
최민혁의 부친도 꽤나 고기를 많이 드셨다. 특히 최민혁과 주거니 받거니 소주를 마시면서 고기를 먹었는데 그들이 비운 소주병이 5병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 모두 전혀 취한 기색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피는 속일 수 없나 보다. 네 아빠처럼 너도 술이 강한 걸 보니 말이다.”
그 동안 최민혁은 운동선수란 이유로 집에서 거의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던 최민혁이 올해 들어서 부모님과 같이 술도 마시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부친과 술 대작까지 하니 그 모습이 모친은 그리 싫진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술 좋아하는 남편과 달리 자신은 술이 워낙 약해서 남편과 같이 술을 마셔주지 못하는 게 늘 아쉬웠는데 그걸 아들인 최민혁이 대신 해 주니 대견하기도 하고 또 자식 키운 보람도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부친에게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어. 어. 알았어. 곧 들어가지.”
아무래도 부친이 일하는 곳에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두 분 다 특별한 공직 생활을 하시는 터라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그리고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셨고.
“제가 운전할게요.”
“그래 주겠소?”
술을 마신 부친 대신 모친이 운전을 해서 부친을 서부지청으로 데려가고 최민혁도 외출을 준비했다.
“오빠도 나가게?”
그런 최민혁을 보고 여동생 최다혜가 물었다.
“어. 재익이와 같이 친구들 좀 만나려고.”
최민혁은 자신이 MBS방송국에 간다는 걸 일부러 여동생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럼 여동생이 쪼르르 그 사실을 자기 베스트 프렌드인 강하나에게 얘기할 테니 말이다. 최민혁은 앞으로 가능한 강하나와 엮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 중이었다.
“운전은?”
“재익인 술 안 마셨잖아.”
“맞다. 돼지는 술 안마시고 고기만 처먹었지.”
그 말을 근처에 조재익도 들었지만 그냥 모른 척했다. 오늘 자신의 식탐이 과했다는 건 조재익 자신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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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익은 최민혁과 같이 집을 나서자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 뱉었다.
“하아. 숨 막히서 뒤지는 줄 알았네.”
그런 조재익을 보고 최민혁이 웃으며 말했다.
“너도 부담스러워 할 때가 다 있었네?”
“뭐라카노? 쳇! 내가 먹고 시퍼서 먹은 줄 아나? 다아 안먹으면 안 된께 먹은기라.”
무슨 말도 안 되는 괴변을 늘어놓는 조재익에게 최민혁이 차 키를 던졌다.
척!
그걸 포수랍시고 또 잘도 받는 조재익에게 최민혁이 말했다.
“MBS방송국까지 네가 운전 해.”
“MBS방송국? 거 잘 모르는데?”
“네비 찍어.”
“아. 맞다. 내비게이션 있었제.”
조재익은 내비게이션에 MBS방송국을 입력하고 차를 출발 시켰다.
“새 차라서 그란 지 잘 나아간다.”
그렇게 그들은 8시 50분쯤에 MBS방송국에 도착했고 9시에 '가면 노래왕' 촬영을 하는 실내 세트장에 들어섰다.
“오오! 최민혁 왔어?”
거기서 최민혁은 뻔뻔한 얼굴의 MC윤봉규를 만났다. 하지만 반갑게 웃고 있는 윤봉규와 달리 최민혁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윤봉규씨. 뭐 할 말 없습니까?”
최민혁이 형님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웃고 있던 MC윤봉규의 얼굴에서도 웃음 끼가 싹 사라졌다. 그도 지금 최민혁이 단단히 화가 나 있는 걸 눈치 챈 것이다. 그리고 그 화를 최민혁이 쉽게 풀 거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아니 그와의 사이가 확실히 틀어 졌음을 직감했다.
“미, 미안합니다. 제가 워낙 급하다 보니까 그만 실수를 저질렀네요.”
최민혁은 그래도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MC윤봉규를 보고 더 화를 내진 않았다. 하지만 그와 다시 호형호제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여기 출연하러 온 이상 최민혁은 자신이 해야 할 건 다 할 생각이었다. 물론 강하나도 그가 여기 온 이유 중 하나였다. 여동생 베스트 프렌드가 잘못 되는 건 그도 원치 않았으니까.
“최민혁 선수!”
그때 '가면 노래왕'의 PD가 최민혁에게 다가왔다.
“MBS 노우석 PD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뇨. 제가 더 영광이죠. 저 같은 야구 밖에 모르는 사람을 여기 다 불러 주시고요.”
“하하하하. 얘기는 들었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신다고요?”
“아이고 아닙니다. 노래는 저보다 이 친구가 더 잘 부르죠.”
최민혁은 이때다 싶어서 조재익을 MBS PD에게 소개 시키려 했다. 하지만 MBS 노우석 PD는 힐끗 조재익을 쳐다보곤 바로 최민혁에게 말했다.
“저희 FD가 민혁씨가 쓰실 대기실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아니 그게.....”
최민혁은 재빨리 MBS 노우석 PD에게 자기보다 조재익이 더 노래를 잘 부르니 그가 자기 대신 방송에 나가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러자 MBS 노우석 PD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대기실에 가시면 쓰실 가면이 있을 겁니다. 야! 경철이. 너 뭐해?”
그 말 후 MBS 노우석 PD는 휑하니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대신 FD가 최민혁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따라 오시죠.”
“잠깐만요. 제 말이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MBS 노우석 PD은 내색은 안했지만 기분 나쁜 티가 확 났었다. 그래서 혹시 자기가 무슨 실수 한 게 있나 FD에게 물은 건데 FD가 바로 대답해 주었다.
“당연하죠. 최민혁 선수야 워낙 유명한 스타급 선수 아닙니까? 그런데 저분은 뭐하시는 분이신데요?”
FD는 아예 대놓고 조재익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최민혁에게 물었다.
“제 친구도 저와 같이 야구 선순데요?”
“그래요? 전 처음 보는 데. 저기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요?”
FD가 조재익에게 물었다.
“조, 조재익입니다.”
“조재익? 지금 어디서 뛰시죠?”
“오, 오성 라이온즈요?”
“오성 라이온즈? 제가 거기 선수들은 다 아는데. 조재익이란 선수는..... 으음. 오성 라이온즈 1군에서 뛰시는 거 맞죠?”
“아, 아뇨. 전 2군에서 포수로.....”
조재익의 입에서 2군이란 말이 나오자 FD의 얼굴이 확 굳었다. 그리고 최민혁을 보고 말했다.
“최민혁 선수. 정말 너무 하시네요. 저희 방송이 지금 우습습니까?”
“네?”
최민혁은 FD를 통해서 '가면 노래왕'이 스타들만 출연하는 예능 버라이어티 프로란 걸 전해듣고 그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더불어 그것도 모르고 조재익을 여기까지 데려 온 것에 대해 조재익에게도 사과를 했고 말이다. 최민혁은 염치없지만 FD에게 부탁을 했다. 조재익이 방청석에서 '가면 노래왕'을 녹화하는 걸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이다.
FD는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며 최민혁을 그의 대기실에 안내해 주고는 조재익을 데리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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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혁은 자신의 대기실에서 자신이 써야 할 가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가면은 쥐 가면이었다. 그나마 햄스터 모양으로 귀엽게 만들어서 다행이긴 했는데 가면에 보니 최일환이라는 이름이 가면 안쪽에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원래 이 가면을 쓰기로 한 사람이 최일환인 모양이었다. 최민혁은 혼자 대기실에 있는 게 심심해서 최일환이 누군지 핸드폰으로 확인해 봤다.
“아아. 이 사람이 최일환이었구나.”
최민혁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명품 조연으로 등장해서 많은 웃음을 준 최일환을 알아봤다.
“가만.....쥐 가면이면......”
최일환은 조연 배우보다 다복이 아빠로 유명했다. 그는 5명의 아이의 아빠였고 아마 그 때문에 다산을 상징하는 쥐 가면을 그에게 만들어 씌우려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붙여진 가면 쓴 최일환의 별명은 바로 ‘대왕 쥐’였다. 그러니까 최민혁이 그 쥐 가면을 쓰면 MC윤봉규가 그를 대왕 쥐로 부를 거란 소리였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고 최민혁을 여기 대기실로 안내 했던 그 FD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와서는 최민혁에게 악보 3개를 건네며 말했다.
“최민혁 선수가 무대에서 부를 노래들입니다. 1라운드는 듀엣 무대고 한 시간 뒤에 예행연습이 예정 되어 있으니까 그 때까지 그 노래부터 숙지 해 주세요.”
그 말 후 FD는 휑하니 대기실을 나섰다. 최민혁은 자신에 손에 쥐어져 있는 3곡의 악보를 보고 황당하단 얼굴로 잠시 서 있었다.
원래 '가면 노래왕'에 섭외가 되면 1라운드에서 같이 부를 상대와 듀엣 곡을 정한다. 그런데 갑자기 최일환이 오늘 병원에 실려 가면서 최민혁이 대타로 오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듀엣 곡을 최민혁이 아는가 하는 점이었다.
FD는 MC윤봉규가 최민혁을 섭외할 때 듀엣 곡 얘기도 한 줄 알았다. 그래서 그냥 악보만 던져 주고 간 것이고.
그러니까 나머지 2라운드와 3라운드에 최민혁이 부를 곡들도 사실은 최민혁이 선곡한 노래들이 아니란 소리였다. 다 최일환이 고른 노래들이었다. 하지만 대타로 온, 그것도 야구 선수인 최민혁이 2라운드에 진출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면 노래왕' 관계자 중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최민혁은 1라운드에서 쥐 가면을 쓰고 등장했다가 탈락하고 그냥 집에 가면 됐다.
“아쉬움?”
듀엣 곡은 다행히 최민혁도 잘 아는 곡이었다. 예전에 좋아했기에 가사도 다 알고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2라운드와 3라운드 노래가 문제였다.
“임재호에 ‘고백’?”
임재호의 노래가 워낙 호소력이 짙고 부르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그것보다 이 노래는 여자들이 정말 듣기 싫어하는 곡이었다. 하도 남자들이 불러 대서 말이다. 그 만큼 진짜 잘 부르지 않으면 자칫 관객들의 짜증만 유발 시킬 수 있는 경연 무대에서는 사실상 금지곡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최일환이 이 노래를 2라운드에 부르려 했다?
그건 그가 1라운드에서 탈락할 거란 걸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단 소리였다.
“뭐? 손범수의 ‘늪’?”
거기다 3라운드 곡은 더 기가 막혔다. 한 때 얼굴 없는 가수로 유명했던 손범수는 MBS방송의 ‘내가 가수다’에서 완전 반전, 이제 비주얼 가수가 되었는데 그때 그는 조만우의 ‘늪’을 자기 느낌으로 다시 재해석해서 불러서 최고 인기를 끌었다.
당연히 최고의 가창력이 없으면 이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최민혁은 이 노래를 좋아했고 종종 따라 불렀었다. 물론 잘 부르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과연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