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7 재벌에이스 =========================
다른 핸드폰이었다면 박영준은 전화를 무시하거나 끊어 버리고 여자를 덮쳐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바빴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개인 핸드폰은 달랐다.
그의 개인 핸드폰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대략 100여명으로 그들은 모두 그에게도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확인하니 누나였다.
그녀와 박영준은 신년에 얼굴은 봤지만 그 뒤 여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은 없었다. 서로가 연초부터 지금까지 계속 바빴으니까.
그런 누나가 걸어 온 전화를 박영준은 어찌 안 받을 수 있으랴? 박영준은 바로 그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누나가 이상한 소릴 했다.
“최민혁?”
어디서 들어 보긴 했는데 중요한 건 그의 개인 핸드폰에 저장 된 이름 중에는 그런 이름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인생에 있어서 별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란 소리였고. 그런데 자기가 그 놈을 없애려 했다고 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순간 박영준은 오늘 오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마침 누나가 민예린을 언급했다. 최민혁이 그 민예린의 남자라고 말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아침에 홧김에 없애 버리라고 했던 그 사진 속 민예린의 남자가 최민혁이란 얘기였다.
‘그래서 뭐.....’
순간 박영준은 오기가 발동했다. 상대가 좀 유명한 야구 선수면 뭐 어떻다는 말인가? 감히 자신이 총애했던 여자와 시시덕거리고 있는데 그런 놈이 좀 유명하다고 자기가 왜 살려 준다? 박영준에게 보통 사람이나 좀 유명한 놈이나 오십 보 백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상대는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누나였다.
에둘러 말 돌리는 것 정도로 대충 넘어 갈 누나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나가 아버지를 거론하며 최민혁을 살려 주라고 협박을 해 왔다.
‘젠장.....’
안 그래도 요즘 일을 많이 맡기며 밑에 사람들을 잘 다독이란 말을 자주 하셨던 부친이셨다. 그런데 자신이 오성 라이온즈의 에이스 최민혁을 없애려 했단 말을 부친이 안다면...........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실망한 얼굴의 부친을 생각하니 차마 계속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또 일선에서 물러난 누나가 부친을 다시 만나는 것도 후계 구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구설수가 생겨 날 수도 있는 문제였고.
두루두루 골치 아픈 일들이 줄을 이을 터라 박영준은 신경질적으로 누나에게 외쳤다. 최민혁을 살려주겠다고 말이다. 그 뒤 전화를 끊은 박영준은 제일 먼저 식어 버린 자신의 아랫도리부터 확인해야 했다.
“씨발.....”
입에서 욕부터 흘러나왔다. 쭈글쭈글한 번데기를 보고 있자니 자신의 자존심 같았다. 박영준은 몸을 일으켜서 자신의 개인 핸드폰 말고 평소 갑 질할 때 쓰는 핸드폰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어딘가 전화를 걸었고 상대는 즉각 그의 전화를 받았다.
-네. 부회장님.
박영준의 수행비서 목소리가 그의 귀로 들려오자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너 일 이 따위로 밖에 못해?”
평소 그가 수행비서에게 가장 많이 말하는 질책성 표현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수행비서가 가장 많이 말하는 대답을 박영준에게 했다.
“최민혁이..... 그냥 둬.”
-네?
“그냥 두라고!”
-아, 알겠습니다.
박영준은 수행비서의 대답을 듣고 나서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때 잔뜩 겁먹은 얼굴로 침대 위에서 침대 시트로 자신의 몸을 가린 신인 여자 탤런트가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이미 시들어 버린 그의 음욕을 다시 솟구치게 만들진 못했다. 박영준은 오늘을 틀렸다 싶어서 곧장 욕실로 향했다.
--------------------------------------------------------
박영준의 수행비서로 그가 내린 지시를 중간에서 조정하는, 즉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던 이도준은 당연히 한국대 출신의 초 엘리트 사원이었다.
그는 야심이 대단해서 일부러 박영준 부회장의 비서를 자청했고 지금은 자신의 일에 만족해 하고 있었다. 그럴 것이 회사의 중요한 사안들을 박영준 부회장이 요즘 맡아서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무엇을 뜻하겠는가?
오성그룹의 권력이 후계자인 박영준 부회장에게로 쏠리기 시작했단 소리였다.
“이제 곧 내 세상이 온다.”
자신이라고 계속 박영준 부회장의 똥구멍만 닦고 있을 리 없었다. 박영준 부회장의 신임이 두터운 그가 아니던가? 곧 핵심 부서로 옮겨질 것이고 거기서도 승승장구하며 30대에 임원이 될 수도 있었다.
“나라고 제 2의 차성국이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오성 그룹의 신화로까지 불리는 차성국이었다. 지금은 아깝게 교통사고로 죽었지만 그가 살아 있었다면 올해나 내년에 오성 자동차 대표 이사가 됐을 거란 얘기가 지배적일 정도로 그는 유능한 임원이었다. 그런데 잘 진행 되고 있었던 일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가 휴게소에서 경호원 선발조가 최민혁에게 당한 것이다. 그 즉시 추격조가 최민혁을 따라 붙었고 이도준은 나국철 쪽 조폭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그 뒤로 추격조로부터 최민혁과 민예린이 포항에 들어갔단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그때 그들은 포항 남부 경찰서에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이도준은 즉시 포항 남부 경찰서에 연락을 취했다. 자신이 누군지만 밝혀도 대한민국의 공권력은 그에게 우호적이었다. 그건 포항 나부 경찰서장이라도 다르지 않았다. 포항 남부 경찰서장은 즉시 붙잡고 있던 추격조를 풀어 주었다.
그 뒤 이도준은 나국철 쪽 조폭들에게 최민혁과 민예린이 포항에 있으니 그곳을 이잡듯 뒤져서 어서 시킨 대로 남자는 처리하고 여자는 잡아서 서울로 올려 보내라고 했다.
“에이. 내가 유능하면 뭘 해? 밑에 것들이 이 모양인데.”
그 뒤 일도 손발이 맞아야 해 먹지라며 투덜거리던 이도준은 박영준을 따라 바쁜 오늘 하루 일정을 소화했다. 그러면서 최민혁과 민예린 일을 깜빡 잊고 있었다. 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저녁때가 다 되어서 박영준 부회장이 취미 생활을 즐길 때 여유가 생긴 이도준은 그제야 오전과 점심 무렵 자신이 벌여 놓은 일들이 생각났고 추격조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추격조에서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뭐야?”
이도준은 그 사실을 오성 그룹 경호팀에 알리고 이번에는 나국철 쪽 조폭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 쪽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도준은 이 일을 맡은 나국철 쪽의 책임자 표경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비서님.
표경수는 즉각 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쪽이 준 연락처의 사람과 통화가 안 돼서 말입니다.”
-그래요? 병석이가 비서님 전화를 안 받을리 없는데.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보고 연락드리죠.
그렇게 이도준이 표경수와 통화를 끝냈을 때 바로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도준은 그 전화가 추격조나 나국철 쪽 조폭들에게서 온 전화이길 바랐다. 하지만 아니었다. 경호실 전화였다.
“네.”
이도준이 전화를 받자 바로 고압적인 목소리가 그의 귀를 울렸다.
-3팀에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킨 거요?
“네?”
-그쪽 지원 나간 3팀 경호원 전부 추적이 안 된다고.
“네에?”
경호원들에게는 언제든 추적이 가능하게 조치를 취해 두었다. 이도준이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경호원의 몸속에 칩을 심어 설혹 그들이 죽더라도 그들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 추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일을 돕던 3팀 경호원 전부 추적이 되지 않는다니........
이도준이 황당해 할 때 전화 건 상대의 고압적인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경호실에서 자체 조사에 나서겠지만 그쪽도 경위서를 작성해서 경호실로 가져 와야 할 거요. 당연히 이 사실은 내일 회장님께 보고 될 것이고.
그 말 후 상대는 자기가 누군지도 밝히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뭐 그가 누군지는 이도준도 알기에 상관은 없었지만.
“씨발. 좆 됐다.”
이도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경호 3팀장이야 자기 수하들이 실종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이일이 회장님에게 보고되면 박영준 부회장이 깨질 테고 그런 자기 목도 날아갈 건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었다. 이미 일은 터졌고 수습이 어려운 상황.
“하아!”
이도준의 입에서 긴 한숨만 나왔다. 그때 그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이도준은 그게 나국철 쪽 조폭의 전화이길 바랐다. 그나마 민예린 문제라도 잘 해결 되면 박영준 부회장이 이 번 일을 좌천 정도로 끝날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쪽이 아니라 그 윗 대가리 표경수였다.
“네.”
이도준은 힘없이 그 전화를 받았다. 그랬더니 이번엔 표경수가 지랄을 떨었다.
-.......우리 애들 한데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미 이판사판인 이도준이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현장에서 뛰는 건 그쪽인데. 그렇게 걱정 되면 포항으로 조폭들을 더 보내요.”
-..............
이도준이 버럭 소리치자 표경수도 더는 지랄을 하지 못했다. 어째든 갑은 이쪽이었으니까. 대신 표경수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상했단 소리겠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이도준의 코가 석자였다. 조폭 새끼들 신경 쓸 새가 어디 있단 말인가?
--------------------------------------------------------
이도준은 모든 게 절망스러운 가운데 그래도 차분히 생각을 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그의 좌우명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말이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게 있었다.
“그래. 포항 남부 경찰서장이라고 했지?”
전화 통화를 해 보니 오성 측에 아주 우호적이었다. 그렇다면 그를 이용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았다. 지금 이도준은 끈 떨어진 연과 같았다. 그 연에 새로운 끈을 잇는다면 연은 다시 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도준은 즉시 포항 남부 경찰서장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에게 최민혁과 민예린을 찾아서 그들 신병을 확보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이 뒤에 무슨 사달을 벌어지게 만들지도 모른 채 말이다.
“일단 민예린을 확보하는 게 중요해. 남자 새끼야 뒤에 처리해도 되고.”
이때 이도준에게 믿을 건 박영준 부회장뿐이었다. 그에게 버림받지 않으려면 적어도 민예린 만큼은 자신이 확보해 놓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궁색하지만 변명이라도 늘어 놓을 수 있을 테니까.
그 뒤 이도준은 넘어가지 않는 저녁을 억지로 먹었다. 위에서 박영준은 늘씬한 미녀와 즐기다 최고급 레스토랑의 셰프들이 만든 근사한 저녁을 즐기고 있을 텐데 자신은 김밥이 다였다.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다 싶을 때 박영준 부회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도준은 바로 전화를 받았고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놀랄 만한 소릴 들었다. 민예린의 남자 최민혁을 살려 두라는.........
자존심 쎈 박영준은 밑에 사람에게 자신이 말한 걸 철회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박영준이 최민혁을 그냥 두라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때 이도준은 ‘아차’ 싶었다.
“포항 남부 경찰서장!”
이미 박영준 부회장은 전화를 끊은 터라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이도준은 서둘러 포항으로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