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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이스
최민혁과 최다혜의 부모님은 참 대단하신 거 같다. 한 마디로 제대로 자식 교육을 시키신 것이다.
최민혁도 싸가지 없긴 해도 남에게 피해가 가는 짓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 최민혁이 같은 팀 동료들에게 안 좋은 소릴 들은 건 그만의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최민혁을 탓할 게 아니라 그를 이해해 주고 배려 해 주지 않은 그 동료들에게도 문제가 있었단 소리다.
물론 팀이란 게 단체 생활이다 보니 개인적인 희생은 불가피 하다. 그러나 최민혁 같이 특이한 성향은 오히려 팀에서 챙겨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무엇보다 그는 팀을 이끌어 가는 에이스가 아니던가? 뭐 하긴 에이스니까 팀원들도 최민혁을 왕따 시켜도 그를 지금껏 어쩌진 못했을 터.
순진한 여동생을 위해서 최민혁은 그녀의 고민을 해결 해 주기로 했다.
“알았어. 내일 내가 처리 해 줄게.”
“진짜? 진짜지 오빠?”
“그래. 부모님 오시기 전에 그런 건 정리하는 게 좋겠지.”
부모님께서 여행에서 돌아오신 뒤 최민혁이 갑질을 한 걸 아시면 그다지 좋아하시진 않을 터였다. 그러니 그분들이 오시기 전에 갑질 할 건 해 치워 버리는 게 나았다.
“휴우. 이제 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오빠한테 얘기하는 건데. 그 동안 가슴 졸여 온 걸 생각하면........”
“그래서 그렇게 내가 챙겨 준 밥을 잘 먹었구나.”
“그, 그건.... 식욕은 없었는데 오빠 정성을 생각해서 억지로 먹어 준거지.”
어디 가서 입으로는 지지 않을 여동생이었다. 인천에서 막 서울로 넘어가자 여동생이 칭얼거렸다.
“오빠. 배고프다. 우리 저녁 먹고 들어가자.”
벌써 시간도 7시가 다 됐다. 언제 집에 가서 밥하고 반찬 만들고 밥을 먹을까? 그래서 최민혁도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자. 근데 뭐 먹을까?”
“으음. 곱창 어때?”
“콜(Call)!”
여동생이 곱창 하니까 마침 근처에 유명한 곱창 맛집이 있었다. 최민혁은 그쪽으로 차를 몰아갔다. 다행히 나가는 차가 있어서 그 가게 앞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들어가자.”
“여기? 으음. 맛집이네?”
가게 앞에는 맛집이랍시고 TV에 나온 장면을 캡처해서 가게 주위에 붙이고 전시해 놓았는데 그걸 보고 최다혜가 흡족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일단 맛집이라는 명성이 있으면 먹어 줄만은 하단 걸 그녀도 아는 모양이었다.
가게 안은 사람들로 북적 거렸는데 앞서 나간 사람들 때문에 자리가 하나 났고 그 곳을 최민혁과 최다혜가 차지했다.
숯불에 익은 곱창은 맛이 있었다. 다행스럽게 곱창 맛은 예전 그대로였고 최다혜도 맛있다며 양념과 소금구이를 각각 1인분 씩 더 시켜 먹었다. 그렇게 양껏 배를 채운 뒤 두 사람은 집으로 향했고 집에 도착하니 벌써 시간이 9시가 넘어 있었다.
혹시나 걱정 했는데 다행히도 집 주위에 기자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럴 것이 오늘 오후에 한류 스타의 스캔들이 터졌고 그 때문에 최민혁에 대한 관심도 확 식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서도 최민혁의 이름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둘 다 먼저 씻고 나서 최민혁은 오늘 끔찍한 경험을 한 여동생을 위해서 기꺼이 거실에서 자 주기로 했다.
“오빠가 거실에 있을 테니까 편하게 자.”
“고마워. 오빠.”
그래 놓고 방에 들어간 최다혜는 역시나 피곤했던지 바로 잠들었고 코고는 소리가 거실까지 들려왔다.
“성격 하난 진짜 좋네.”
최민혁은 그래도 약속을 했기 때문에 거실 소파에서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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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 30분쯤인가? 최민혁도 꼬박 잠이 들었었는데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최민혁은 누군지 확인만하고 모르는 번호면 그냥 끊고 계속 잘 생각이었다.
“어?”
그런데 이주나에게 걸려 온 전화였다. 최민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혹시 자는 중이었어?
“어. 뭐.”
-미안. 그런 줄 몰랐어. 그냥 계속 자. 전화 끊을 게.
“아냐. 잠 다 깼는데 뭘. 근데 무슨 일이야?”
-그, 그게 어제 일도 미안하고 해서 한 잔 하자고 전화했지.
“안 바빠?”
-얘는. 나라고 만날 바쁜가? 일 다 끝내고 지금 칵테일 바에서 한 잔 하고 있었어. 여기 올래?
평소의 최민혁이라면 그녀의 제안을 바로 거절했을 터였다. 그런데 오늘은 최민혁도 기분이 좀 그랬고 한 잔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런 생각을 읽은 세나의 목소리가 그의 머리를 울렸다.
[가서 한 잔 하세요. 마스터도 기분 전환을 할 필요는 있어요. 대신 많이 마시진 마세요.]
세나까지 가세하니 최민혁의 마음도 확 기울었다.
“어딘데?”
-진짜 오려고?
“가볍게 한 잔 하지 뭐. 보아하니 술친구가 필요해서 전화 한 거 같은데.
-..............
최민혁의 말에 이주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마 그의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여기는.........
이주나가 위치를 설명하고 주소를 불러주자 최민혁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위층으로 올라간 최민혁은 옷을 챙겨 입고 다시 내려와서는 여동생의 방을 보고 말했다.
“동생아. 약속 못 지켜 미안하다.”
하지만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여동생의 방에서 코고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드르렁! 드르렁!
그 소리를 우렁찬 소리에 내일 아침까지 여동생이 깰 일은 없을 거 같았다. 최민혁은 조용히 집을 나섰고 집밖에 주차 해 둔 자신의 차에 올랐다. 그리고 이주나가 불러 준 주소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하고 곧장 차를 출발 시켰다.
이주나가 있는 칵테일 바까지는 30분 정도 시간이 소요 되었다. 막상 가 보니 가게 전용 주차장도 비어 있었고 가게 안에도 손님은 이주나 혼자뿐이었다. 그런데 올 때 보니 주변 다른 술집들은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유독 이 칵테일 바만 한산했다. 가게 안은 어둑하니 아늑했다. 필립스탁 의자를 떠올리는 높은 원목 바 의자와 대리석 테이블에 이주나가 혼자 앉아 있었다.
“어서 와. 친구.”
최민혁은 그런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러자 그녀가 물었다.
“뭐 마실래?”
그런데 손님이 왔는데 주문 받는 사람이 없었다. 최민혁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자 이주나가 말했다.
“여긴 내 가게야.”
“뭐?”
“오롯이 날 위한 공간인 셈이지. 그러니 손님. 주문을 하세요.”
어째 여기 들어 올 때부터 뭔가 좀 이상하다 싶었다.
“아란 아마로네 캐스크로 줘.”
“몇 년 산?”
“18년산 있어?”
“당연하지.”
“그럼 그걸로 할게.”
“기다려.”
곧장 몸을 일으킨 이주나는 가게에 진열 되어 있는 술병 리스트들을 쭉 살피더니 아란 위스키를 곧 찾아냈다.
최민혁은 와인숙성으로 향이 남다른 아란을 좋아했다. 특히 아란위스키는 혼자 분위기를 낼 때 딱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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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르르!
브랜디 잔에 이주나가 아란 위스키를 따랐다. 양은 글라스의 불룩 한 부분 보다 좀 더 낮은 정도. 최민혁은 곧장 그 브랜디 잔을 챙겨들고 코로 가져갔다. 독특한 향을 먼저 음미한 최민혁은 살짝 한 모금 위스키를 마셨다. 그걸 보고 이주나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술도 다 마실 줄 알고. 그이가 알았으면.......”
이주나는 자기가 말을 해 놓고 당혹스런 얼굴 표정을 지었다.
“미, 미안. 그 사람 얘기는 가능하면 안 하려 했는데.....”
최민혁의 기억에 따르면 이주나와 조명진은 정말 열렬히 사랑했다. 최민혁도 저런 사랑이라면 해 볼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괜찮아. 억지로 잊으려고 하니까 더 기억나는 거야. 그냥 순리대로, 생각나면 그리워하고 얘기하고 추억하며 지내자 우리. 그러다보면 시간이 자연스럽게 선배를 잊게 해 줄 거야.”
최민혁은 그 말 후 브랜디 잔을 기울였다. 그걸 보고 이주나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너 되게 말 잘한다. 그래서 그런가? 오늘 따라 멋있어 보이는데?”
“그럼 나도 남잔데.”
“뭐? 호호호호. 이게 어디 누님 앞에서 남자 행세야?”
“생일 며칠 빠른 거 가지고 누님은 무슨.... 술이 더 따라 줘.”
최민혁은 빈 브랜디 잔을 이주나 앞에 내밀었다.
“벌써 다 마셨어? 얘가 진짜. 그거 독한 술이야.”
“괜찮아. 그리고 좋은 사람과 마시는 술은 취하지도 않는 법이야.”
“좋은 사람? 그거 나 두고 한 말이지? 이야. 이거 기분 좋은데. 최민혁에게 좋은 사람이란 소릴 다 듣고 말이야.”
이주나는 정말 기분이 좋은지 최민혁이 내민 브랜디 잔에 그 독한 위스키를 가득 따라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리큐어(Liqueur) 잔에 과일주를 따라서 마시며 말했다.
“술에 대해 혹시 재미있는 얘기나 에피소드 같은 거 없어?”
그 물음에 최민혁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원래 차성국은 워낙 바빠서 공연 같은 걸 보러 갈 시간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바이어를 만났는데 생각보다 빨리 계약이 성사 되면서 시간이 남았다. 원래는 바이어와 저녁도 같이 먹고 술자리도 가지려 했는데 저녁도 먹기 전에 계약이 일사천리로 이뤄져 버린 것이다.
덕분에 붕 떠버린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싶었는데 그때 그의 눈에 띤 것이 노천 카페였다. 최민혁은 거기서 저녁을 먹고 간단히 와인도 마셨다. 그런데 거기에 놀러 온 모 방송인이 그 자리에서 즉석 토크 쇼를 했고 그때 그에게서 들은 술에 대한 얘기가 이주나의 말을 듣고 나니 생각이 났던 것이다.
“있지.”
대답 후 최민혁은 한 모금 위스키를 마셨다. 독한 술은 목 넘김이 불같지만 오히려 뒤끝이 없었다. 그래서 최민혁은 술을 마셔도 위스키 같은 독한 술을 좋아했다.
“뭔데?”
그런 최민혁을 보면서 이주나도 과일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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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혁은 브랜디 잔을 살짝 기울였다 한 바퀴를 돌렸다. 그러자 진한 갈색 톤의 위스키가 찰랑거렸는데 그때 잔에서 특유의 위스키 향이 올라왔다. 그 향을 음미하며 최민혁이 입을 열었다.
“누가 그러던데 술을 세계 5대 성인의 반열에 올려야 한다더군.”
“세계 5대 성인?”
“예수, 석가, 마호메트, 공자......그리고 술!”
“술?”
“주(酒)님이잖아. 그 사람의 말에 따르면 술은 신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더군. 첫째는 어디에나 계시고, 둘째는 때를 기다리시고, 셋째는 희생적이시고, 넷째는 기적을 행하신다.”
“으음.....첫째는 알겠어. 술이야 어디에나 있으니까. 근데 둘째부터는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술은 내가 열어 주지 않으면 냉장고 안에서 절대 빛을 볼 수 없잖아.”
“아아. 맞다. 그래서 때를 기다리신다고 한 거로구나. 그럼 셋째 희생적이시다는 건?”
“그건...........”
이주나는 최민혁과 얘기를 나누는 게 정말 재미있고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박수도 치고 생글거리며 웃는 것이 말이다.
그녀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것은 그의 연인 조명진이 죽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그녀도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그녀는 최민혁에게 온통 넋이 나가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이성에게 제대로 반한 여자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