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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이스
최민혁이 어깨와 특히 팔꿈치가 좋지 않다는 건 코칭스태프들도 알고 있었던 사안인 모양이었다.
“그러게 작년에 너무 혹사 시켰습니다.”
“혹사라뇨? 자기가 던지겠다고 해서 던지게 했을 뿐입니다.”
회의장은 최민혁 문제를 놓고 갑자기 책임 공방이 벌어졌다. 그걸 류주일 감독이 단번에 일소시켰다.
“그만! 지금 누가 누굴 탓할 때가 아니잖소. 그 얘기는 그만하고 현실적인 얘기를 해 봅시다.”
“현실적이요?”
“최민혁을 어떻게 할지 말이요.”
“그야 당연히 수술 시켜야죠.”
하지만 류주일 감독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어차피 올해 최민혁은 FA요. 우리 팀에 남는다고 해도 거액을 요구할 것이고 나가도 팀 이미지에 좋지 않고. 해서 말인데.....”
잠시 뜸을 들이던 류주일 감독이 코칭스태프들을 쭈욱 훑어보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올해까지 쓰고 버립시다.”
“네?”
당연히 코칭스태프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류주일 감독의 말에 코칭스태프들의 눈빛도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최민혁이 그 새끼 싸가지 없는 거야 여기 계신 분들도 다 아실 거고. 수술이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수술하는 순간 끝입니다. 그런 퇴물을 껴안고 있는 것 보다 쓸데 더 쓰고 버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최민혁에게 주어진 선견지명의 사용 시간이 끝났다.
“하아!”
최민혁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감독도 그렇지만 마지막에 코칭스태프들도 대부분 감독의 말에 동의하는 눈빛들이었다.
“최민혁! 대체 뭘 어떻게 살아 온 거냐?”
그래도 그렇지 코칭스태프들 중 그 자리에서 그의 편을 들어 주는, 그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코치가 어떻게 한 명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최민혁이 생각해도 최민혁은 28년을 헛산 거 같았다. 야구로 성공했지만 그 성공 뒤에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게 헛산 게 아니고 뭐겠는가?
“그나저나 너무들 하는군.”
그들은 몰랐다. 최민혁의 어깨와 팔꿈치가 이제 멀쩡하단 걸. 더불어 완전 새 부품을 교체한 것처럼 싱싱하단 것도.
최민혁도 그가 속한 구단이 오성 라이온즈란 게 사실 마음이 편하진 않았었다. 오성 쪽으론 오줌도 누고 싶지 않았으니까.
“잘 됐네. 뭐.”
FA(Free agent)가 뭐겠는가? 이제 올해를 끝으로 최민혁은 다른 팀과 자유롭게 계약을 맺고 이적할 수 있었다. 아마도 올해 FA시장에서 오성 라이온즈는 제대로 된 뒤통수를 맞게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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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선견지명을 전부 쓰고 나자 시간이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선견지명에 주어진 시간은 딱 10분씩이었지만 그 사이 최민혁이 생각하고 고민한 시간이 그 배를 넘긴 것이다.
이미 씻은 터라 최민혁은 곧장 침대로 향했다. 내일 활기 찬 하루를 보내려면 숙면은 꼭 필요했다. 최민혁은 침대에 눕자마자 눈을 감았고 그대로 스르르 수면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때 아래층 최민혁의 여동생의 방은 수다 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다니까. 오빠가 야구공을 던져서 그 날치기를 잡았다지 뭐야. 뭐 하긴. 오빠가 투수니까 당연히 가능한 일인 건가?”
최다혜는 지금 그녀의 베스트 프렌드 강하나와 통화 중이었다. 강하나도 마침 찍고 있던 예능프로가 촬영 장비 이상으로 녹화가 중단 된 상태였기에 대기실에서 최다혜와 수다를 떨 수 있었다.
-우리 민혁 오빠 역시 최고야. 오늘 오후엔 다짜고짜 전화 퀴즈에서 맹활약 해 주시고.
“뭐? 다짜고짜 전화 퀴즈?”
-너 몰라? 인터넷에도 난린데?
“아 몰라. 네가 얘기 해 봐.”
-그게.............
강하나의 설명을 듣고 난 최다혜가 경악하며 말했다.
“말도 안 돼. 그 돌대가리가 그런 어려운 상식 문제를 다 맞혔다고?”
-야. 돌대가리라고 하지 마. 사실 알고 보면 오빠가 똑똑할 수도 있잖아. 네가 오빨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발끈하는 강하나 때문에 최다혜도 찔끔했다. 하지만 그녀는 최민혁의 여동생이다.
“뭐 내가 오빠를 다 아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최민혁은 그렇게 똑똑하지 않았거든.”
-그래.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자. 그보다 아까 했던 야구공으로 날치기 잡은 거 말이야.
강하나는 역시 영리했다. 최다혜의 자존심을 더 자극하지 않고 슬쩍 대화를 주제를 돌렸다.
-오빠가 그럼 용감한 시민상인가 뭔가 하는 걸 타 게 되는 거야?
“어. 외삼촌 말 대로면 관할인 성동경찰서에서 포상을 할 건 가 봐.”
-이 사실까지 알려지면 우리 오빠 연예인보다 더 유명해 지는 거 아냐?
“뭐 그럴지도. 하지만 그 사실이 알려지기나 하려나 몰라. 신문 한쪽에 조금 언급 되겠지.”
그 말에 강하나가 목소리 톤을 높였다.
-그럴 수는 없지. 오빠가 얼마나 정의로운 사람인지 사람들은 알 권리가 있다고 봐.
“뭐 그래서 어쩌려고? 어! 너 혹시?”
-맞아. 방송에서 알릴 거야. 오빠의 선행을.
“너 그러다 오빠가 싫어하면 어쩌려고?”
-오빠는 그런 일로 나를 싫어하지 않아.
강하나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다면 오늘 다짜고짜 전화 퀴즈에 응해 주지도 않았을 테니까. 강하나는 최민혁이 적어도 자신에게 마음의 문은 열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강하나씨. 10분 뒤 방송 들어갑니다.”
그때 그녀의 대기실에 FD가 들어와서 그 말만 하고 후다닥 나갔다. 강하나는 최다혜와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코디에게 화장과 옷을 점검 받고 곧장 방송 무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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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나가 늦은 밤에 출연 중인 프로그램은 일종의 토크 쇼였다. 원래 이 방송은 SQ엔터테이먼트의 A급 배우가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펑크를 내면서 강하나가 땜방 출연 중이었다. 그래선지 PD와 프로그램 사회자인 주병철이 강하나를 대하는 태도가 그다지 좋진 않았다. 하지만 방송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자 그들은 프로다운 모습을 선보였다.
“........하하하. 재미있는 얘기였습니다. 아! 강하나씨라고 했었죠?”
“네. 신인 연기자 강하납니다. 예쁘게 봐 주세요.”
“예뻐요. 예뻐. 그러니까 이제 재미있는 얘기만 해 주면 되겠네. 혹시 감동적이거나 재미 있는 사연 같은 거 있을까요?”
주병철은 어차피 편집 될 테지만 그래도 게스트라고 나온 강하나에게 한 번의 기회는 주자 싶어서 얘기를 꺼냈다. 그랬더니 강하나가 대차게 얘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제 베스트 프렌드가 유명인의 동생이거든요.”
“유명인? 그 말은 아주 유명한 분이란 얘기네요?”
“네.”
“혹시 저도 알고 있는 분일까요?”
“야구 좋아하세요?”
강하나가 되바라지게 주병철을 똑바로 직시하며 되묻자 주병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건 카메라도 짧아 내지 못할 찰나에 불과했고 이내 웃는 얼굴의 주병철이 대답했다.
“당연히 좋아하죠.”
“그럼 아시는 분이에요.”
‘이거 봐라?’
신인치고 자신 앞에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멘트를 날리는 강하나가 주병철의 관심을 끄는데 일단 성공했다.
“좋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유명인과 관계 된 사연을 말하겠단 거네요?”
“네. 맞습니다.”
“재미있겠군요. 그럼 들어 보죠.”
“제 친구에겐 착하고 든든한 오빠가 있어요. 물론 저하고도 친하고요. 그 오빠가 며칠 전에.................”
강하나가 조곤조곤 얘기를 시작하자 방송 무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강하나의 얘기에 푹 빠졌고 얘기의 하이라이트에서 사람들은 다들 감탄사를 터트렸다.
“와아아아!”
“그러니까 이게 팩트란 거죠?”
“네. 맞습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며칠 뒤 오빠가 성동경찰서에서 용감한 시민상을 받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오오! 용감한 시민상! 당연히 받아야죠. 그런데 그 오빠분 혹시 야구 선수 아닙니까?”
“네? 그, 그걸 어떻게?”
“하하하하. 아까 저보고 야구 좋아하냐고 물었잖습니까? 그리고 유명인이면 야구선수겠지요. 가만. 공을 던져서 날치기를 잡았다면 혹시 투수?”
“헉!”
깜짝 놀라는 강하나의 모습을 1번 카메라가 제대로 잡았다. 순간 PD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건 대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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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나는 주병철의 말에 넘어가지 않으려 나름 노력했다. 하지만 주병철의 유도 질문에 계속 넘어가면서 자기 입으로 말만 그 오빠가 최민혁이라고 밝히지 않았지 다들 그 용감한 시민이 오성 라이온즈의 에이스 최민혁이란 걸 알아챘다. 그러니 이 방송이 나가면 시청자들도 눈치 챌 건 뻔했다.
“오늘 최고 사연상의 주인공은.......바로......강하나!”
“와아아아!”
강하나는 뻘쭘하니 주병철이 건네는 트로피를 받았다. 그때 주병철이 웃으며 강하나에게 말했다.
“다음엔 최 선수와 같이 저희 프로에 나와 주세요.”
그 말에 강하나의 얼굴이 핼쑥해졌고 1번 카메라는 그 장면을 기다렸다는 듯 카메라에 담았다.
“아아! 어떡하지.”
막상 사고를 치고 난 강하나는 자신이 한 짓에 대해 후회가 밀려오자 차에 오르며 마구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하나야. 무슨 짓이야!”
그걸 보고 코디가 발끈했지만 그 소리도 강하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최다혜에게는 오빠의 선행을 방송에 알리겠다고 했지만 그게 지상파 인기 토크쇼는 아니었다. 아마 자신이 떠든 사연이 방송을 탄다면 최민혁은 실시간 검색어에도 이름이 오를 터였다. 그걸 과연 최민혁이 좋아할까?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강하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어려울 때 돕는 게 진짜 친구 아니겠는가? 강하나는 곧장 그녀의 베스트 프렌드 최다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너 미쳤어?
그런데 그 얘기를 듣고 최다혜가 발끈했다.
-우리 오빠도 공인이야. 그런데 그런 얘기를 오빠랑 사전에 상의도 없이 방송에서 얘기 해버리면 어떡해?
“아까 방송에 얘기할 거라고 했잖아.”
-야! 그거야 농담으로 한 소린 줄 알았지. 너 이제 어쩔 거야? 우리 오빠가 이 사실을 알면....
“그러니까 네가 날 좀 도와주라. 친구 좋다는 게 뭐니?”
-여보세요? 친구라뇨? 저 아세요?
“다혜야! 너 정말 이럴 거야?”
-누구신지 모르지만 너무 늦었군요. 날 밝으면 그때....
“알았어. 프라타 가방도 넘길게.”
-연두색?
“그건 내가......하아. 그래. 그 애 줄게.”
-그럼 저번에 주기로 한 꾸짜 손지갑하고 같이 넘겨. 단 그 두 개 다 내 손에 들어오면 그때 움직일 거야. 그러니까 빨리 넘기는 게 좋겠지?
“알았어. 내일 오전 중에 받을 수 있게 퀵으로 쏴 줄게.”
-오케이. 계약 성사!
강하나는 이미 크리스마스 때 최다혜에게 한 번 신세를 졌었다. 그때 꾸짜 손지갑을 주기로 했었는데 최다혜는 그것도 잊지 않고 있었다.
“휴우. 살았다.”
최다혜에게 넘기기로 한 연두색 프라타 가방은 그녀가 아끼는 녀석이었지만 최민혁 때문이라면 포기 할 수도 있었다. 가방이야 또 신상이 나오면 구입해도 되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최민혁은 오직 이 세상에 하나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