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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이스
크로노스보다 뒤에 나타난 타이탄스 선수들의 얼굴은 다들 밝았다. 이런 걸 두고 강자의 여유라는 것일까?
느긋이 덕 아웃의 라커룸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장비를 챙겨 들고 나온 타이탄스 선수들은 동료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몸을 풀었다.
타이탄스 윤동준 감독은 이때 선수들에게 오늘 오성 라이온즈의 에이스 최민혁이 크로노스에서 뛴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다들 놀라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최민혁이 투수가 아닌 타자로 뛴다는 말을 듣고 다들 시큰둥했다. 어제 윤동준 감독이 생각했던 대로 타자 최민혁에 대해 타이탄스 선수들은 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최민혁이 같이 뛴다는 얘기에도 타이탄스 선수들이 별 반응이 없는 걸 보고 타이탄스 감독 윤동준은 크로노스 감독을 만나서 간단히 얘기를 주고받고 덕 아웃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선공이다.”
윤동준 감독은 그 얘기만 했고 나머진 타이탄스 선수들이 알아서 움직였다. 그 중에서 오늘 선발투수인 오지석과 포수 최익수의 움직임이 제일 빨라졌다.
두 배터리는 불펜에서 연습투구를 하며 투수는 어깨를 덥혔고 포수는 공을 잡은 뒤 재빨리 송구 동작을 취해 보며 몸을 끌어 올렸다. 그때 윤동준 감독의 눈에 유명철이 보였다.
“좀 늦었습니다.”
“아니. 괜찮아. 어차피 선발로 뛸 것도 아니니. 옷 갈아입고 불펜에서 몸 풀어.”
윤동준 감독은 오늘 새로 온 완전 신입 유명철에게 타이탄스의 유니폼을 건넸다. 유명철이 그 유니폼을 챙겨들고 라커룸으로 향하는 걸 지켜보던 윤동준 감독의 시선이 상대 덕 아웃으로 향했다.
강팀을 상대하는 크로노스의 덕 아웃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다들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윤동준 감독은 저 웃음이 얼마나 갈지 기대가 됐다.
사회인 야구단의 절대 강자인 타이탄스는 시합에 임하면 자비란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래서 최소 10점 많게는 20점 이상으로 상대를 짓뭉개버렸다. 타이탄스란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내젓게 말이다.
크로노스도 다를 건 없었다. 단지 변수가 하나 있다면 최민혁인데 사실 윤동준 감독은 유명철의 말을 100% 믿고 있지 않았다.
“어쩌다 잘 맞는 날이었겠지.”
유명철을 상대로 연타석 홈런은 아마 최민혁이 인생에 몇 번 있을까 말까한 그 날이었기에 가능한 결과라 본 것이다.
야구를 하다보면 이상하게 잘 맞는 날이 있다. 바로 그런 날 연타석 홈런이나 세 타석 연속 홈런도 터졌다. 하지만 그런 날이 연이어 있었단 얘기는 윤동준 감독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최민혁은 오늘 딱 오성 라이온즈의 에이스 최민혁의 모습을 보여 줄 공산이 컸다. 물론 그가 타자로서 재능을 갖추고 있을 순 있었다. 하지만 타자란 게 재능만 가지고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순 없었다.
무엇보다 유명철은 패스트 볼을 던지는 투수고 반면 오늘 타이탄스의 선발 투수인 오지석은 기교파 투수였다.
비록 직구 구속은 유명철만 못해도 130Km/h이상의 패스트 볼에 다양한 변화구를 갖춘 그는 사회인 야구단 선수들에게는 소위 말해 먹히는 투수였다. 저 저번 경기에선 노히트노런까지 기록했었으니 말 다했다.
한 마디로 최민혁과 크로노스 타자들에게 최악의 투수를 윤동준 감독이 선발로 내정한 것이다.
윤동준 감독의 시선이 덕 아웃 안에서 크로노스 감독과 웃고 있는 최민혁에게 꽂힌 채 혼자 중얼거렸다.
“부디 천재가 맞길 바란다. 그래야 시합이 더 재미있을 질 테고 나도 대어하나 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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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진이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내자 양 팀 선수들이 덕 아웃에서 그라운드로 나섰다. 그들은 홈 플레이트 앞에 줄지어 늘어선 다음 모자를 벗어 예의를 갖췄다. 그리고 주심이 페어플레이를 해 줄 걸 당부하고 나자 그들은 서로 악수를 나눈 뒤 각자 덕 아웃으로 돌아갔다.
크로노스 선수들은 각자 자기 글러브를 챙겨들고 그라운드로 나섰다. 그 중에 최민혁도 끼어 있었다. 오늘 중견수로 선발 출장한 최민혁은 걷는 내야수들과 달리 천천히 뛰어서 센터에 자기 자리를 잡고 섰다.
오늘 크로노스의 선발은 김선학으로 130Km/h 중후반의 묵직한 패스트 볼에 슬라이더가 좋은 투수였다. 그는 크로노스의 몇 안 되는 선출 출신이었고 그의 안방마님인 이정길은 김선학과 고교 때부터 배터리를 이뤄 온 포수였다. 당연히 둘의 호흡은 찰떡궁합이었고 상대적으로 타이탄스에 비해 전력이 떨어지는 크로노스로선 이 두 콤비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팡!
마운드에서 연습 투구를 하는 김선학의 얼굴이 제법 결연했다. 그럴 것이 김선학도 야구를 계속 하고 싶었다. 사회인 야구단의 최강팀인 타이탄스를 상대로 자신이 제대로 된 선발 투수의 면모를 보인다면 독립구단이나 프로 쪽에서 그에게 관심을 보일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올해 김선학은 15경기에 선발 등판해서 10승 5패의 비교적 괜찮은 기록을 보였다. 크로노스 입장에서야 에이스인 그를 이길 수 있는 경기에 선발 출전 시켰기에 그런 성적이 나왔다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팀의 20승 중 절반을 김선학이 책임졌다는 점에서 그가 크로노스의 에이스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휴우우우!”
이때 센터에 서 있던 최민혁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의 바로 정면에 크로노스 투수가 보였다. 최민혁은 늘 자신이 섰던 그 마운드에 다른 투수가 공을 던지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펑!
제법 크게 포구 소리가 크게 일었다. 구속은 대략 130Km/h 중 후반 정도로 공 끝이 제법 예리하게 살아 있었다. 물론 자신의 공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플레이 볼!”
주심의 외침과 함께 타이탄스의 공격으로 경기가 시작 되었다.
펑!
“스트라이크!”
타이탄스 1번 타자는 초구부터 인상을 썼다. 겁도 없이 크로노스의 투수가 한 복판에 직구를 꽂아 넣은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타이탄스의 1번 타자는 2구째 바깥쪽 핀 포인트를 공략해 들어 온 김선학의 공을 때렸다.
틱!
하지만 제대로 맞추지 못한 그 공은 땅볼로 유격수 정면으로 향했고 유격수가 잡아서 재빨리 송구했다.
“아웃!”
타이탄스의 톱타자가 열심히 뛰었지만 공보다 빠르진 못했다. 간단히 자기 팀 톱타자를 땅볼로 돌려 세운 김선학을 보고 타이탄스의 윤동준 감독이 중얼거렸다.
“쉽게 공략 하긴 어렵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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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준 감독은 김선학이 나쁘지 않은 구위와 제구력으로 승부를 보는 타입의 투수임을 이미 간파했다.
딱!
“쳇!”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을 구르는 공을 2루수가 잡아 1루로 송구했다. 순식간에 아웃 카운트가 두 개로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나이스. 김선학. 이대로만 가자.”
포수 이정길이 크로노스 선수들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투수의 건재함을 알렸으니 이제 남은 건 타석에서 타자들이 점수를 내서 투수의 어깨를 가볍게 해 주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딱!
그래도 타이탄스는 타이탄스였다. 중심타선인 3번에 가자 타자가 제대로 김선학의 공을 배트로 때려 낸 것이다.
“쳇!”
맞는 순간 김선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보나마나 안타였다.
“와아아아!”
그때 크로노스 덕 아웃에서 환호성이 일었다. 덕 아웃의 모든 시선이 김선학의 뒤쪽을 향했다. 그래서 김선학도 고개가 뒤로 돌렸다. 그때 그의 눈에 2루수를 향해 공을 던지고 있는 최민혁이 보였다.
“파인 플레이! 최민혁!”
“좋았어. 최민혁!”
그리고 최민혁을 칭찬하는 수비수들의 목소리가 뒤늦게 김선학의 귀로 들려왔다.
“허어! 진짜 그 공을 잡았다고?”
분명 맞는 순간 안타인 타구였다. 타구가 빨랐고 깊었기에 수비를 깊게 서지 않았다면 말이다. 김선학이 멍 때리고 있을 때 2루수가 외쳤다.
“공 받아!”
“어!”
김선학은 2루수가 던진 공을 받았다. 좀 전 그가 던졌던 그 공이었다. 김선학이 글러브 속에 그 공을 만질 때 어느 새 그에게 다가 온 2루수가 글러브로 그의 엉덩이를 툭 치며 말했다.
“뭐해? 가자.”
“어! 그래.”
김선학은 글러브 안의 공을 마운드 위에 떨어트리곤 곧장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런 그의 눈에 그를 대신해 마운드로 향하고 있는 타이탄스의 투수가 보였다. 그런데 그 투수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김선학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오지석!”
하필 오지석이라니! 김선학도 타이탄스의 선발투수 오지석이 며칠 전 노히트노런 경기를 펼친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상대가 당시 크로노스가 10점이나 내주고 패했던 사회인 야구단이었다. 김선학은 오지석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오늘 점수 내기 쉽지 않을 거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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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학의 예상은 바로 현실이 되었다.
부웅!
크로노스의 1번 타자 배트가 힘차게 허공을 갈랐다. 한 가운데로 날아오던 공이 낙차 크게 밑으로 떨어진 것이다.
“스윙! 타자 아웃!”
주심의 선언에 크로노스 1번 타자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상대 투수의 포크볼에 맥없이 당한 것이다. 그걸 보고 곧바로 대기석의 2번 타자가 타석으로 향할 때 최민혁이 대기 타석으로 움직였다. 배트를 손에 쥐자 최민혁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그걸 느끼며 최민혁은 자신이 천생 야구 선수임을 깨달았다. 이런 야구를 안 하려 했으니 그의 몸에 신병이 내리고 몽유병까지 난리법석을 피운 것이다. 배트를 가볍게 휘두르면서 최민혁의 시선은 그라운드를 향하고 있었다. 배트를 쥐고 있자 어째 더 집중해서 경기를 살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펑!
“스트라이크!”
상대 투수의 평균 구속은 120km/h 중 후반 이었고 패스트 볼로 윽박지르고 들어 올 때는 130km/h 초반으로 빠른 공을 가진 투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변화구가 너무 좋고 볼 끝이 지저분했다. 저런 공은 때려봐야 땅볼 아니면 뜬공이었다.
앞서 1번 타자는 결정구로 포크볼을 썼다면 이번 2번 타자는 직구와 슬라이더로 요리를 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 투수를 돕기라도 하겠다는 듯 크로노스의 2번 타자가 빠지는 슬라이더에 배트를 내밀었다.
틱!
휘두르려면 앞선 1번 타자처럼 대차게 한 번 크게 휘두르기나 할 것이지 간이 작은 지 2번 타자는 힘 빠진 배트만 내밀었고 그 배트 상단에 공이 맞고 내야로 떴다.
“마이 볼!”
2루수가 골을 하고는 여유 있게 뜬공을 처리했다. 오지석은 7개의 공으로 투 아웃을 잡고 타이탄스 팀원들에게 쾌조의 출발을 알렸다.
이때 최민혁이 얼굴을 붉힌 채 덕 아웃으로 향하던 크로노스의 2번 타자를 스쳐 지나며 배터박스로 움직였다.
앞선 두 타자에 비해 체격이 월등히 좋은 최민혁의 등장에 크로노스 배터리도 살짝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중심타선 이었기에 타이탄스의 포수는 투수 오지석에게 공 하나를 빼자는 사인을 보냈다. 그러자 오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웅!
하지만 타이탄스의 배터리는 이내 생각을 바꿨다. 스크라이크 존에서도 한 참 빠지는 유인구에 저렇게 대차게 배트를 휘둘러 대는 타자는 그들에게 먹기 좋은 먹잇감에 불과 했으니 말이다.
상대 타자는 체격을 봐도 한 방 있는 타자임은 분명해 보였다. 좀 전 휘둘렀을 때 배트 스피드도 대단했고 말이다. 하지만 선구안은 빵점이었다. 그런 타자를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배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