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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이스
최민혁은 오늘 세 번 최다혜에게 전화를 했다. 그 중 그녀는 딱 한 번만 전화를 받고 나머진 생깠다. 그러던 그녀가 자정이 넘어 새해가 되고 나서 최민혁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때가 최민혁이 민예린의 집에 들렀다가 한 잔 걸치고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어. 왜?”
-아직 안 잤어?
“새해는 보고 자야지. 너는? 일몰은 봤고?”
-응. 진짜 멋졌어. 이제 일출만 보면 돼.
“식사는 했고?”
-숙소 잡고 근처 횟집에서 밥 먹었어. 지금은 숙소에서 친구들과 한잔 걸치는 중이고.
“적당히 마셔라.”
-응. 오빠도 이제 새해 봤으니 어서 자.
“내일 올 때 전화하고. 그리고 오빠가 전화하면 좀 받아.”
-알았어. 하여튼 잔소리는.
“끊는다.”
-어.
이번엔 최민혁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어제 겨우 통화가 됐을 때 최다혜는 건성으로 전화를 받고 전화도 먼저 끊었었다.
여동생과 전화 통화하는 사이 집앞에 다다랐다. 최민혁은 집으로 들어갔고 보일러가 싱싱 잘 돌아간 탓인지 집안은 훈훈했다. 최민혁든 2층으로 올라가서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웠다.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요즘 푹 잘 자니 사는 게 행복했다. 최민혁은 눈을 감았고 그대로 깊게 잠들었다.
최민혁은 7시 30분쯤에 잠에서 깼다. 대충 세수하고 1층으로 내려가서 밥을 안치고 나자 집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최민혁은 별 생각없이 전화를 받았다.
-민혁이니? 엄마다. 교통사고 났다는 얘기는 들었어. 다혜 말로는 괜찮다던데 정말 괜찮은거니?
최민혁은 전화기 너머 엄마란 말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네. 전 정말 괜찮아요. 어, 어머니.”
-으음? 어머니? 거기다 웬 존대? 너 내가 아는 귀염둥이 내 아들 맞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 최민혁은 냉철한 사업가의 보유능력인 능력빙의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최민혁에 대한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최민혁이 큰소리로 웃었다.
“푸하하하하. 엄마. 이상했어?”
-뭐니? 엄마 진짜 놀랐잖아.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어디세요?”
-이제 막 스위스로 넘어왔다. 아빠 바꿔 줄까?
전화기 너머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면 됐다고 굳이 받으실 필요 없으시단다. 최민혁도 그런 부친이 고마웠다. 아무래도 갑자기 생겨난 부모님과의 통화는 최민혁으로서도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부러웠다. 최민혁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부모님과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끼니는 어떻게 해결하고?
“집에서 잘 만들어 먹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뭐? 설마 네가 요리를 한다는 얘긴 아니겠지?
“요즘 인터넷에 레시피 잘 나오잖아요? 그대로 따라하니 의외로 먹을 만해요. 엄마도 오시면 제가 한끼 대접할 게요.”
-오오. 아들. 자신감 쩌는 데. 좋아. 기대할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들도. 딸은 자지?
“네. 아시다시피 깨워도 안 일어 날 거예요.”
-알아. 아들이 대신 엄마, 아빠가 우리 딸 사랑한다고 대신 전해 줘.
최민혁 모친과의 통화는 최민혁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 그런지 생각보다 편했다. 최민혁은 통화 중에도 계속 최민혁 부모님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기억 시켰다. 오늘 하루 능력빙의를 이대로 낭비할 순 없으니 말이다.
그 과정에서 최민혁은 최민혁의 부모님들이 그와 최다혜를 얼마나 잘 키웠는지 알 수 있었다. 두 분 모두 공부와 성공보다는 인성을 강조하셨다. 하지만 어디 자식이 부모 뜻대로 커든가? 훌륭한 부모님을 뒀지만 야구하느라 거의 집에 있지 않은 최민혁의 성격은 많이 모나 있었다. 그러니 팀 동료 중 친한 사람도 거의 없었고 워낙 융통성이 없다보니 감독과 코치들도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새해 아침에 부모님과 통화 후 최민혁은 시급하게 바꿔야 할 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꼽았다. 앞으로 최민혁의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서 그는 올해 노력 좀 해야겠다 싶었다.
“뭐 그거야 쉬우니까.”
대기업 임원이 되기까지 그가 상대해 보지 않은 종류의 사람은 없었다. 인간관계만큼은 누구보다 잘 꾸려 나갈 자신이 있는 최민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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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최민혁은 콩나물국을 끓였다. 어제 마신 술은 이미 다 해독이 된 상태라 해장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갓 지은 하얀 쌀밥에 맛김을 올려서 입에 넣고 시원한 콩나물국 한 숟가락 입에 떠 넣으니 꿀맛이었다. 그렇게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최민혁이 설거지와 뒷정리를 끝냈을 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최민혁도 아는 번호였다. 바로 어제 명함을 받았던 사회인 야구단 크로노스의 감독의 전화 번호였으니까.
“네. 여보세요.”
최민혁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최선수. 마침 전화를 받으시네요. 혹시 지금 고척돔으로 오실 수 있으십니까?
“지금이요?”
-네. 갑자기 시합이 잡혀서요. 일단 더 알아 봐야 하지만 신정이라 못 오겠다는 선수들이 좀 있네요.
“저야 괜찮습니다만 신정인데 고척돔이 개방을 하던가요?”
-하하하. 그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와 붙을 팀이 워낙 대단한 팀이라서 고척돔 관리원들을 벌써 포섭해 뒀을 겁니다.
“아아. 그렇군요. 그럼 바로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네. 오시면 그냥 구장 안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저야 덕 아웃에 있을 테니까요.
최민혁이 크로노스 감독과 통화를 끝낸 후 외쳤다.
“나이스!”
안 그래도 어제 번 포인트를 다 썼는데 그걸 만회할 기회가 이렇게 빨리 생길 줄이야. 최민혁은 어제 크로노스 감독에게 자기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네 주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세나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또 사회인 야구단에서 야구하게요? 그러기에는 마스터의 수준이 너무 향상 됐습니다만.]
세나의 말에 최민혁은 아뿔싸 싶었다. 세나가 말했었다. 투수 최민혁의 경우 그 수준이 너무 높기 때문에 KBO에서 뛰어봐야 포인트를 얼마 쌓지 못할 거라고 말이다. 그 말은 최민혁이 타자로 성장한 지금에도 해당 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최민혁은 어제 사회인 야구단 크로노스의 감독에게 연락처를 알려 주기보다는 그 보다 수준 높은 프로 2군 정도 전력을 가진 팀이나 실제 2군 팀을 알아 봤어야 했던 것이다.
이게 다 세나가 부추김에 포인트를 지르다보니 부쩍 성장해 버린 자신의 능력치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뭐 어쩔 수 없지. 간다고 해 버렸으니까.”
최민혁은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고 핸드폰과 차 키, 지갑을 챙겨서는 집을 나섰다. 그리고 집 앞에 주차해 둔 자신의 차를 몰고 고척돔으로 향했다. 고척돔의 지하 주차장은 신정 연휴답게 거의 비어 있었다. 그곳에 차를 주차 시킨 최민혁은 곧장 구장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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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 야구단 데스페라도의 투수 유명철은 크로노스와의 시합이 끝나고난 뒤에야 그에게 연타석 홈런을 날린 선수가 최민혁이란 얘기를 전해 들었다.
“에이. 장난치지 말고.”
“장난은 무슨...... 진짜에요. 진짜 최민혁!”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오성 라이온즈의 에이스 최민혁이 지금 내 공을 두 번이나 담장 밖으로 날려버렸다?”
유명철은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그를 제외한 데스페라도 선수들 모두 그게 말이 된단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진실은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말, 말도 안 돼. 그 선수가 최민혁이라니.”
유명철은 데스페라도 선수 중 한 명이 보여 준 최민혁의 얼굴 사진을 보고서야 자신을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날린 크로노스의 선수가 최민혁 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명철은 그 충격에 데스페라도 선수들과 연말 회식도 하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최민혁이 그 선수라니.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돼.”
하지만 집에 가는 중에도 유명철의 머릿속엔 최민혁에 대한 생각이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핸즈프리를 사용해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명철아. 왜?
“형! 오성 라이온즈 최민혁 잘 알지?”
-최민혁? 대한민국에서 야구를 아는 사람 중에 최민혁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근데 최민혁이 왜?
유명철이 지금 전화하는 상대는 서울을 연고지로 두고 있는 GO드래곤즈에서 주전 포수로 뛰고 있는 장영수였다. 그는 연말의 끝 31일에 유명철이 전화를 걸어오자 반가웠다. 유명철이 자주 그에게 술을 쐈기 때문에 말이다. 근데 전화를 받자 뜬금없이 최민혁 얘기를 꺼냈다.
“영수형. 내가 오늘..........................”
유명철은 오늘 시합에서 최민혁이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 장영수에게 전부 얘기했다. 그러자 장영수가 웃었다.
-푸하하하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오늘이 무슨 만우절이냐?
“진짜라니까. 내가 홈런 두 방을 맞았다고. 내가.”
버럭 소리치는 유명철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장영수도 웃음을 멈췄다.
-정말인가보네. 그런데 네 말 대로라면 최민혁이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단 얘기잖아. 안 그래?
“그렇죠. 실제로는 수비 실력도 좋고 타격적인 재능도 뛰어난데 그걸 숨겨 온 거죠.”
-왜? 왜 그랬을까?
“그, 그건......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혹시 FA?
“FA요?”
-너도 알다시피 최민혁이 지금 뛰고 있는 오성 라이온즈와 그리 사이가 좋은 건 아니잖아? 그러니 적당히 공만 던진 거지. 수비나 타격적인 재능은 숨기고 말이야. 가만! 아니다. 이건 해외 진출을 노린 거다.
“해외 진출이면.....메이저 리그?”
-그래. 자신의 수비력과 타격 실력을 왜 이제야 드러냈겠어? 이제 보여 줄 때가 됐다는 거지. 최민혁 그 자식 메이저리그 중에서도 내셔널리그에서 뛰려는 게 분명해.
메이저 리그에서 내셔널리그에서는 투수가 무조건 타석에 들어가야만 했다. 유명철이 생각해도 일견 장영수의 말이 일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니까 최민혁이 자신을 알리려고 사회인 야구단을 이용해 먹고 있단 거잖아?”
-이용? 뭐 그런 셈이네. 혹시 오늘 시합 할 때 기자들 못 봤어?
“글쎄. 기자들은 못 본 거 같은데.”
-그거야 내일 스포츠 기사보면 알겠지. 최민혁이 그런 의도로 시합에 뛰었다면 내일 기사가 뜰 테니까.
“알았어. 얘기해 줘 고마워.”
-자, 잠깐. 너 이대로 전화 끊으려는 건 아니지?
유명철은 장영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았다. 하지만 장영수와 달리 가정이 있는 유명철은 오늘 저녁 만큼은 가족과 같이 보내야 했다.
“형. 미안. 술은 내가 내년에 실컷 사 줄게.”
-야! 너 임마 이런 식으로.....
유명철은 장영수의 구시렁대는 소리를 뒤로하고 핸즈프리 기능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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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유명철은 신문이며 인터넷 기사 중 스포츠 란을 다 뒤졌다. 하지만 최민혁에 대한 기사는 하나도 없었다.
“그럼 그런 의도를 가지고 어제 시합에 나온 건 아니란 말이네.”
유명철은 오해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동시에 최민혁이 진심으로 타자에 관심이 있다면 그와 다시 한 번 마운드에서 싸워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때 생각 난 게 바로 사회인 야구단 중에서도 최강팀인 타이탄스였다. 타이탄스의 감독은 유명철도 잘 알았다.
그는 유명철의 고등학교 선배이자 전 나정 히어로즈에서 잠깐 타격코치 생활을 했던 윤동준 감독이었다. 그는 유명철을 만나면 늘 말해 왔다. 언제든 타이탄스로 오라고 말이다.
“타이탄스라.....”
유명철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갔고 어떤 결론이 내려졌는지 그가 핸드폰을 챙겨들었다. 그리고 타이탄스 감독인 윤동준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