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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이스
순두부찌개와 밥 두 공기를 뚝딱 해치운 최민혁은 설거지를 하고 뒷정리를 하고 난 뒤 부엌을 나왔다. 딱히 할 일도 없었던 터라 최민혁은 거실에 앉아서 TV를 켰다. 그러자 시끄러운 예능프로가 나왔는데 거기 게스트 중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쟤가 뜨긴 뜬 모양이네.”
당연히 예능 프로에 관심이 없었던 최민혁은 다른 채널을 돌렸다.
“어?”
그런데 그 채널에서도 그가 아는 얼굴이 또 나왔다. 이번엔 좀 조용한 프로였다. 지친 어른들의 걱정을 치유해 주기 위해 만들어 졌다는 이 프로에서 강하나는 제법 조곤조곤 말을 잘 했다. 그걸 보고 최민혁은 강하나가 타고난 연예인이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뿐 최민혁은 곧장 채널을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어렵사리 찾아 낸 경제TV를 보고 있을 때 살짝 목에 갈증이 났다.
“맥주가 한 캔 있었지.”
최민혁은 곧장 냉장고로 향했다. 그런데 냉장고에 분명 어제 밤까지 있었던 캔 맥주가 사라지고 없었다.
“최다혜!”
어젯밤에 여동생 최다혜가 홀랑 마셔 버린 모양이었다.
“쩝....”
입맛을 다시던 최민혁은 결국 위에 패딩 하나 걸치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마트 앞 횡단보도에 서 있을 때였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외제차 한 대가 최민혁이 서 있던 횡단보도 옆에 멈춰 서더니 뒷좌석의 차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피코트를 걸친 젊은 여자가 내렸다. 그런데 술에 취했는지 여자가 비틀거렸는데 외제차는 그런 그녀를 두고 그대로 휑하니 떠나버렸다. 모피 코트 녀는 그런 외제차를 째려 보며 뭐라 웅얼 거리다 이내 긴 한 숨을 내 쉬었다.
또각또각!
모피 코트 녀는 굽이 꽤 높은 뾰족 구두를 신고도 잘도 걸어서 횡단보도 앞 보도에 서 있던 최민혁 옆으로 다가 와 섰다. 그러자 술 냄새와 함께 여자의 향수 냄새가 그의 코를 찔러왔다. 그런데 그 냄새가 코에 익었다. 최민혁의 시선이 막 옆으로 돌아갔을 때 눈앞에 신호등이 바뀌었다.
모피 코트녀는 그 신호를 보고 움직였고 두어 걸음 걷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비틀 거리다 쓰러졌다.
척!
그런 그녀를 최민혁이 한 팔로 받쳐 들며 말했다.
“또 보내요.”
그의 말에 모피 코트 녀가 고개를 쳐들어 최민혁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아! 그때 그 마트남?”
“마트남?
띠리리릭! 띠리리릭!
그때 신호등에서 경고음이 나왔고 최민혁은 모피 코트녀를 부축해서 서둘러 횡단보도를 건넜다.
“고마워요.”
횡단보도를 건너고 나자 모피 코트녀가 최민혁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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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 코트 녀의 정체는 바로 민예린이었다. 그녀는 올해의 마지막 날에도 부회장 박영준에게 대차게 까였다. 그와 오늘 밤을 특별한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던 민예린과 달리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던 박영준은 그녀와 같이 밤을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근사한 곳에 그녀를 데려가서 저녁 식사를 하며 좋은 말로 민예린을 달랬는데 그것이 그녀를 더 화나게 만든 모양이었다. 식사 자리에서 와인을 두 병이나 비운 민예린이 이제 술에 취해 그에게 칭얼거리자 박영준도 더는 못 참겠는지 홧김에 그녀를 집 근처에 떨어트려 놓고 가버린 것이다. 그런데 민예린에겐 역시 남자 복이 있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며칠 전 그녀를 설레게 만들었던 그 훈남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말이다.
“최민혁 선수라고 불러야 할까요?”
최민혁은 민예린이 자신을 알자 살짝 놀란 얼굴표정을 지었다.
“절 아시는군요. 그런데 전 그쪽을 모르는데?”
최민혁은 민예린을 잘 알았다. 그 어떤 남자보다 더 자세히. 그녀의 몸 어디에 점이 있는지 까지 세세하게.
“민예...지에요.”
“민예지씨. 이름이 예쁘네요.”
민예린은 최민혁에게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그녀가 아직 자신에게 경계심을 가지고 있단 얘기였다. 하지만 최민혁은 그 딴 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녀와 엮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저 지금은 외로운 남녀끼리 만났을 뿐이었다. 그때 무슨 생각이 났는지 민예린에 최민혁을 보고 말했다.
“오늘도 배고픈 여동생을 위해 마트에 온 건가요?”
전에 민예린은 최민혁에게 차 한 잔하고 가라고 했었다. 그러자 최민혁이 여동생을 핑계를 대고 다음 기회에 마시자고 했는데 그럴 민예린이 잘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뇨. 오늘을 배고픈 여동생은 없고 혼자서 맥주나 마시려고 나왔습니다.”
“혼맥이요?”
“네.”
“그쪽 같은 킹카가요?”
“킹카는 무슨......아닙니다.”
최민혁이 수줍어하며 손사래를 치자 그 모습이 오히려 신선하게 민예린에게 보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올해의 마지막 밤인데 어떻게 혼술을 해요. 괜찮으면 저랑 같이 한 잔 해요.”
“네?”
“가요!”
민예린이 최민혁의 손을 잡고 끌었다. 물론 힘으로야 민예린이 최민혁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여자의 힘이란 게 꼭 물리적인 힘만은 아니었다.
민예린 같은 미녀가 끌면 그 어떤 남자도 딸려 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최민혁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저기......이 손 좀 놓고......하아......알았어요. 갑니다. 가는데 술은 사가야하지 않을까요?”
민예린에게 끌려가며 자포자기 한 최민혁의 물음에 그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집에 술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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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혁은 민예린에게 끌려서 마트 근처 일반 주택가의 단독 주택 위 옥탑 방에 올라갔다. 최민혁이 신기하단 듯 주위를 살피자 민예린이 말했다.
“이런 데 처음인가 봐요?”
“네. 뭐.....”
사실 처음은 아니었다. 차성국이 모친과 단 둘만 살 때 그들은 한 때 옥탑 방 생활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최민혁이 민예린의 옥탑 방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린 건 그때 추억이 생각나서였다.
“들어오세요.”
민예린은 최민혁의 자신의 보금자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여자 혼자 사는 집은 최민혁도 처음이었다. 그 얘기를 하자 민예린이 그를 보는 눈빛이 좀 달라졌다. 눈빛이 좀 더 깊어졌다고나 할까?
“한 잔 해요.”
민예린이 달랑 마른안주와 소주, 맥주를 꺼내오며 말했다. 그때 그녀 배에서 꼬르르 소리가 났다.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먹었지만 그녀는 식사는 거의 하지 않고 와인만 마셔댔다. 그러니 배가 고플 수밖에. 당연히 그 소리를 같은 방에 있는 최민혁이 듣지 않을 리 없었다.
“저녁 안하셨어요?”
“그게 먹기는 했는데..... 뭐 조금 밖에......”
민예린은 쑥스러워 하며 얼굴을 붉혔다. 하긴 관심 있는 이성이 보는 앞인데 배에서 ‘꼬르르’ 소리를 내고 있으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훈남이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냉장고 안에 뭐가 있는지 좀 봐도 될까요?”
“네?”
놀란 민예린을 보고 훈남이 싱긋 웃더니 곧장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곤 냉장고 안을 꼼꼼히 살피더니 쏘시지와 햄들을 꺼내고 묵은 김치 통도 같이 꺼냈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당혹스런 민예린이 훈남에게 묻자 훈남이 훈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부대찌개 어때요?”
훈남의 그 말을 듣고 난 민예린의 머릿속에는 의정부 부대찌개가 떠올랐다.
“꼴깍!”
민예린이 군침을 삼키는 걸 보고 최민혁은 웃으며 냉장고에서 꺼낸 것들을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그로부터 10여분 뒤에 최민혁은 라면 사리까지 들어간 제대로 된 부대찌개를 민예린 앞에 대령했다.
“우와! 맛있겠다.”
배가 고팠던 민예린은 허겁지겁 젓가락과 숟가락을 놀렸다.
“쩝쩝쩝.....후루룩.....카아! 국물 맛이 의정부 부대찌개 집과 똑같아요. 어떻게 이런 말을 집에서 낼 수 있는 거죠?”
민예린이 먹기 바쁜 와중에 최민혁에게 물었지만 최민혁은 싱긋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맛있게 부대찌개를 먹는 걸 지켜보다 맥주를 한 잔 따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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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가 송골송골 땀이 맺힌 채 민예린은 부대찌개를 맛있게 먹었다. 시원한 국물 탓에 해장이라도 된 듯 속도 편해졌고 술도 많이 깼다.
“자. 제 잔 받으세요.”
그래서 민예린은 다시 달렸다. 맥주에 소주를 섞은 소맥으로 대여섯 잔을 마시자 그녀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지, 지금 뭐하는 거예요. 빨리 마셔요. 마셔!”
반면 최민혁은 멀쩡했다. 원래 최민혁은 체질적으로 술이 쎘다. 하지만 투수로서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그는 시즌 중에는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지금은 비시즌 중이고 날이 날인만큼 최민혁도 술을 마셨는데 대작중인 상대가 취한 모습을 보이자 더 이상 마시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제 곧 12신 데 잠깐 술은 멈추고 새해를 맞읍시다.”
“새해요? 하아!”
민예린은 이대로 새해를 맞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쉰 민예린은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 사이 최민혁이 시계를 보고 카운트에 들어갔다.
“10, 9, 8..............3, 2, 1. 해피 뉴이어. 예지씨.”
“네. 그쪽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그 말 후 민예린은 활짝 웃었다. 그래도 올 해는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거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그녀가 이런 기분 좋은 느낌이 들 수 있었던 건 바로 눈앞에 훈남 때문이었다.
‘꽤 괜찮은 남자야. 저런 남자라면......’
야망이라면 그 누구 못지않은 그녀지만 그녀도 여자였다. 연말 연초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마음이 약해진 그녀는 최민혁에게 마음이 많이 기울었다.
최민혁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그가 원한다면 오늘 밤 그는 민예린을 안을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의 보유 능력인 매력 덩어리를 사용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민예린과의 악연의 고리를 최민혁에게까지 이어지게 만들 순 없지.’
그 생각과 동시에 최민혁은 몸을 일으켰다.
“술 잘 마셨습니다.”
사람은 떠날 때를 잘 알아야 했다. 최민혁은 지금이 떠날 때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민예린의 매력에 넘어 갈지 몰랐다. 그 만큼 민예린은 아름다웠고 여자로써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매력을 최민혁은 누구보자 잘 알기에 그녀에게 빠지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 선 것이다.
“가, 가시려고요?”
민예린은 많이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잘 있던 최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집에 가겠다고 하니 말이다.
“그럼 가야죠. 여자 혼자 있는 집인데 제가 계속 있을 순 없죠. 그럼 전 이만....”
“저기.....”
민예린은 어떡하든 최민혁을 잡으려 했지만 최민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옥탑 방을 나갔다. 그렇게 잠시 뒤 옥상에서 민예린이 이태원 고급 주택가로 올라가는 최민혁을 넋놓고 지켜보다 말했다.
“차성국 이후에 처음이야. 나에게 먹을 걸 만들어 준 남자는........ 그리고....... 민예린! 정신 차려! 저 사람은 차성국이 아니라 최민혁이라고.”
민예린의 눈에 계속해서 최민혁에게서 차성국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보였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그 때문에 더욱 죽은 차성국이 그리워지는 민예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