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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이스
퍽!
최민혁이 던진 공은 체인지업이었다. 공은 제대로 제구가 되어 이번에도 조재익의 미트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평소에 보여 주었던 최민혁의 체인지업보다 어째 좀 밋밋했다. 그걸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린 한상현 코치가 외쳤다.
“내가 얘기했지. 공에 무브먼트 주는 방법은 간단하다고. 변화구의 경우는 회전을 더 먹이면 되고 패스트볼의 경우 공을 끝까지 잘 채고 있다고 확신이 들면 커터나 싱커처럼 회전축을 조금 틀어주면 된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난 최민혁은 다시 와인드업을 했고 공을 던졌다.
퍽!
그러자 제대로 제구 된 공이 볼 끝까지 살아서 조재익의 미트에 꽂혔다. 앞서 밋밋한 구위를 바로 회복한 수준 높은 체인지업이었다. 저 정도 체인지업은 국내 톱타자도 치기 어려웠다.
“나이스!”
공을 받은 조재익도 만족스러운지 호응을 하며 미트에서 공을 빼내 최민혁에게 던졌다. 한상현 코치의 굳은 얼굴도 그제야 펴졌다.
“마지막으로 슬라이더 한 번 보자.”
한상현 코치의 말에 최민혁은 곧장 자세를 가다듬었다. 지금의 최민혁도 야구 구종 중 슬라이더는 들어 봤다. 직구와 커브의 중간으로 직구처럼 빠르게 날아오다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급격히 방향을 트는 슬라이더는 현대 야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변화구였다. 또 한국 투수들이 가장 많이 사용했고 말이다.
당연히 지금의 최민혁은 슬라이더 쥐는 법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손은 공이 엄지손가락과 검지의 틈새로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공을 반만 쥐었다. 그리고 가운뎃손가락을 실밥과 나란히 잡고 검지를 옆에 붙이고 손을 채줄 때는 아래쪽으로 잡고 검지 옆에 붙이며 아래쪽으로 완전히 채서 공이 검지 위쪽을 타고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게 했다.
투구 동작은 앞선 직구와 똑같았다. 하지만 공은 좌측 아래로 꺾였다. 조재익은 미트를 움직여 그 공을 잡았다.
퍽!
“좋고!”
조재익의 입에서 또 다시 기분 좋은 추임새가 흘러나왔고 그걸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한상현 코치의 고개가 빠르게 위 아래로 움직였다.
변화구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타자의 타이밍을 흐트러뜨리는 것 인데 좀 전 최민혁이 던진 슬라이더는 홈 플레이트에서 60㎝ 전방까지는 직구와 똑같이 들어오다 전방 60㎝에서부터 타자의 바깥 아래쪽으로 꺾였다. 슬라이더의 꺾이는 정도는 커브볼만큼 크지 않지만 완만한 곡선을 그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꺾임이 예리할수록 더 좋은 슬라이더라 할 수 있는데 최민혁의 슬라이더가 바로 그랬다.
저 정도면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투수의 슬라이더와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었다.
“으윽!”
그때였다. 갑자기 최민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팔꿈치를 접었다 폈다 했다. 그걸 보고 한상현 코치가 곧장 최민혁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냐?”
한상현 코치의 물음에 최민혁이 바로 대답했다.
“별 거 아닙니다. 팔꿈치가 좀 찌릿해서.....”
슬라이더는 배우기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부상 위험도 컸다. 특히 팔꿈치에 무리가 갔다.
“어디 보자.”
한상현 코치가 최민혁의 왼팔을 살폈다. 한상현 코치는 꼼꼼하게 최민혁의 어깨와 팔꿈치, 그리고 손목과 손가락까지 점검했다. 마치 최민혁의 팔이 기계 팔이고 자신은 정비사인 마냥.
하지만 외견 상 최민혁의 팔에 문제는 없어보였다. 단지 어깨가 뭉쳐 있었고 팔꿈치를 눌렀을 때 일그러지는 최민혁을 보고 한상현 코치가 물었다.
“너 올해 몇 이닝 던졌어?”
“...........”
당연히 지금의 최민혁이 그걸 알 리 없었다.
“211이닝 던졌지예.”
근데 다행히 그 대답을 조재익이 대신해 주었다.
“뭐? 210이닝이 넘었다고?”
한상현 코치가 발끈했다. 그런 그를 보고 조재익이 웃으며 말했다.
“코치님. 민혁이 키울 생각만 말고 녀석에게 관심도 좀 가져 주으쇼. 어째 같은 팀 투수코치가 팀 에이스 한 해 이닝 수도 모릅니꺼.”
“나 2군 투수코치야. 2군 얘들 챙기기도 바쁜데 1군 에이스에게 관심을 왜 가져. 근데 류 감독도 너무 하네. 어떻게 팀 에이스를 200이닝 넘게 던지게 만들어.”
시즌 동안 보통 선발 투수가 30경기 6이닝을 던진다고 봤을 때 중간에 거르는 일이 없다면 190이닝 정도를 던진다고 보면 됐다. 그런데 올해 최민혁은 211이닝이나 던졌다니 이건 문제가 있었다.
투수의 어깨는 소모품과 같아서 쓰면 쓸수록 닳았다. 그걸 잘 아는 한상현 코치는 오성 라이온즈의 최고 에이스에 대한 류 감독의 관리에 의문이 들었다.
“내년에 FA다 이건가?”
오성 라이온즈 입장에서 매년 20승 이상을 챙겨 주는 국보급 에이스 최민혁을 어떡하든 잡을 테지만 사람일이란 게 또 모르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년에 딴 팀으로 훌쩍 가버릴 수 있는 최민혁을 류 감독이 모른 척 혹사 시켰을 가능성이 컸다.
“너 여기 퇴원하면 어깨하고 팔꿈치 정밀 검사 받아 봐.”
“네.”
“이왕 이렇게 된 거 푹 쉬고. 휴식도 훈련이다. 전지훈련에서 몸 잘 만들어서 와.”
그 말 후 한상현 코치는 최민혁이 끼고 있던 글러브와 공을 빼앗듯 챙겨들고는 담벼락에 기대 있는 큰 배낭 쪽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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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현 코치는 이곳에 올 때 이미 이번 비시즌 훈련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아무리 독해도 교통사고 난 최민혁에게 지옥 훈련을 시킬 순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최민혁의 몸 상태도 확인 하고 또 압박을 해 줄 필요가 있었다. 이번엔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지옥 훈련이 끝난 게 아니란 걸 녀석도 알게 해야 했다.
다행히 최민혁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선 당장 녀석을 데려가서 커브와 커터를 가르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어깨와 팔꿈치 상태를 보고 바로 그 생각을 접었다.
최민혁은 기계가 아니었다. 올해 무리한 만큼 지금 그에게는 훈련보다 휴식이 더 필요했다.
담벼락으로 간 한상현 코치가 배낭에 글러브와 공을 넣으려 할 때였다.
“제가 할게 예.”
언제 달려 왔는지 조재익이 한상현 코치의 손에 들려 있던 글러브와 공을 받아서 배낭에 욱여넣었다. 그 사이 뭔가 생각이 난 듯 한상현 코치가 멍하니 서 있는 최민혁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이번에 너한테 커브와 커터를 알려 줄 생각이었는데 그게 어렵게 됐네. 그래도 내년엔 그 중 하나는 꼭 네 걸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메이저 리그에서.........”
한상현 코치는 내년 최민혁의 FA때 그가 메이저 리그에 진출할 거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반신반의 중이었다. 메이저 리그 무대에 서고 싶기도 했고 또 그냥 국내에서 계속 뛰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최민혁은 아예 야구를 할 생각이 없었다.
‘메이저 리그는 무슨......’
버진아일랜드의 돈만 챙기면 그 돈으로 사업을 시작해서 재벌 되기도 바빴다. 최민혁이 괌에 갈 때는 전지훈련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야구를 때려 치기 위해서 일 터였다. 한상현 코치는 나름 잔소리를 늘어놨지만 최민혁은 그 얘기를 한 귀로 들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니 전지훈련 끝나고 페넌트 레이스 시작 전 시범 경기 할 때 2군으로 와라. 그때 커브와 커터 중 하나를 전수해 줄 테니까. 아무리 류 감독이라도 개막전에 선발로 나서야 할 널 시범 경기에 뛰게 하진 않을 테지. 그때.................”
한상현 코치가 자신에게 커브와 커터를 전수 해 줄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그 전에 그가 먼저 은퇴를 해 버릴 테니 말이다.
“살펴 가십시오. 잘 가라.”
얼마 후 최민혁은 병동 입구 앞에서 두 불청객들을 배웅했다.
“2군에서 보자.”
조재익은 최민혁이 전지훈련을 다녀오면 2군에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2군은커녕 앞으로 조재익을 만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웃으며 손은 흔들어 주었다.
‘잘 가. 그리고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그렇게 두 불청객들이 자신의 눈에서 사라지자 최민혁은 병실로 돌아갔다.
뿅! 뾰뿅! 뿅뿅뿅뿅!
그리고 병상에서 신나게 게임을 즐겼다. 한상현 코치의 말처럼 휴식도 훈련이라고 지금 최민혁에게는 놀면서 시간 때우는 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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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혜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자신이 변호사 사무실을 찾을 일이 생길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어제 그녀가 스타엔테이먼트와 한 연예인 전속 계약은 한 마디로 노예계약이었다. 변호사 얘기로는 소속사와 잘 얘기해서 가능한 빨리 계약을 해지 하는 게 최선이라고 했다.
“하아!”
변호사 사무실을 나온 최다혜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그녀는 1월 5일에 스타엔터테이먼트를 찾아 가서 배도철에게 애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애원이 먹혀 들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지만.
배도철이 힘들게 잡은 물고기를 그냥 풀어 줄 리 있겠는가?
“아빠에게 얘기해야 하나?”
아마 이 사실을 최다혜의 부친인 최한성이 안다면 꾸지람으로 끝나진 않을 터였다. 아마 반년? 아니 일 년은 외출 금지가 확실했다.
급 우울해진 최다혜의 눈에 하얀 눈가루가 흩날렸다. 이런 일 만 없었어도 올해는 근사한 화이트크리스마스가 됐을 텐데.
부모님은 해외여행 중이시고 오빠가 있다지만 그녀에게 신경 끊은 지 오래였다. 때문에 환상적인, 아니 광란의 크리스마스 밤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녀가 잘못 서명한 종이 쪼가리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완전 잡쳐버렸다. 가볍게 날리던 눈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굵어졌다. 그리고 차들이 도로 위를 춤추고 거북이 운행을 시작했다.
결론은 지금 서울에 있는 그녀가 강원도 춘천으로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최다혜는 오빠의 병실로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나 지금 서울인데 여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현 사정을 열심히 전화상으로 설명하자 오빠인 최민혁이 의외로 쿨하게 말했다.
-알았어. 그럼 여기 오지 말고 집으로 가.
“응. 그럼 내일 퇴원하기 전에 병원으로 갈게.”
-뭐 하러 그래. 내가 짐 챙겨서 알아서 퇴원 할 테니까 넌 그냥 집에 있어.
“그, 그래도 돼?”
-지금까지 간병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게 생각 해. 집에 가면 오빠가 맛있는 거 사 줄게.
갑자기 오빠에게서 다정한 말을 들어선지 최다혜의 두 눈에 빙그르 눈물이 어렸다.
“어. 기대할게.”
-집 문단속 잘하고. 내일 보자.
“어. 오빠.”
막 통화를 끝낸 최다혜의 핸드폰 위로 그녀의 눈물이 떨어졌다. 최다혜는 재빨리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확실히 머리가 이상해졌어. 제 정신이 아니야.”
하지만 예전에 남이나 마찬가지였던 오빠가 100배는 더 다정다감해진 게 최다혜로서도 그리 싫지는 않았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무심히 핸드폰을 살피던 최다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또 뭔 소리를 하려고......”
찌푸린 그녀의 얼굴과는 달리 그녀의 핸드폰 액정에는 'Best Friend' 란 글씨와 함께 하트가 양쪽에 착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