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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이스
비록 10분에 불과했지만 최민혁은 한상현, 조재익과 얽힌 악연의 고리를 전부 다 기억해 냈다. 사실을 알고 나니 그건 악연이라고 치부하기 좀 그랬다. 이전 최민혁에게 그들은 악연일지 몰라도 제 3자의 눈에서 본 지금의 최민혁에게 그들은 진정한 스승이고 친구였다.
그러니까 사연은 바야흐로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 동산고 1학년이면서 야구부 주전 에이스였던 최민혁을 끔찍이 하기는 감독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상수였다. 그리고 최민혁과 배터리를 이뤘던 주전 포수가 같은 학년의 조재익이었고.
한상수는 최민혁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그가 국보급 투수로 성장할 걸 확신했다.
“너는 무조건 메이저리그 가야 한다. 알겠지?”
“하모요. 민혁이는 메이저리거가 되야지예.”
한상수와 조재익은 똘똘 뭉쳐서 최민혁을 도왔다. 그 중 조재익은 태어나서 중학교까지 부산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전근 오면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중학교에서 야구를 했던 그는 근처 야구부가 있는 동산고에 진학하면서 최민혁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조재익은 당시 145-150Km/h대의 패스트 볼을 던지는 최민혁의 공을 정확히 포구해 냈다. 게다가 거포형의 타자이기도 했던 그는 동산고 타점의 절반 이상을 책임졌다.
그렇게 둘의 활약으로 다음 해 동산고는 청룡기 4위, 봉황대기 준우승의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대붕기에서 마침내 최민혁이 결승전 완봉승을 거두고 조재익이 홈런을 치면서 우승기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대붕기 우승 다음 날 동산고 감독 한상수가 교통사고로 덜컥 죽고 말았다.
그 뒤 새로운 감독이 부임했지만 동산고는 전년도에 훨씬 못 미치는 기록을 달성했다. 때문에 동산고 3학년 중에 프로에 지명을 받은 건 최민혁과 조재익 둘 뿐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최민혁은 1라운드 지명을 받았지만 조재익은 5라운드에서 겨우 지명을 받았다. 다행히 둘 다 같은 오성 라이온즈에서 뛰게 되었지만 프로 입단 후 둘의 위치가 극명히 갈렸다. 최민혁은 곧장 1군 무대에 선 반면 조재익은 2군에서 뛰게 된 것이다.
오성 라이온즈는 범우주적 포수 강국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박경안, 정상오, 이재운. 조인수등 거포 포수들이 즐비한 곳이다 보니 조재익이 2군에서 4년을 보냈지만 한 번도 1군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그에 비해 고졸 신인으로 시작해서 최민혁은 4년 동안 매해 10승 이상의 승수를 쌓으면서 오성 라이온즈의 에이스로 거듭나고 있었다.
바로 그 해에 미국에서 코치 연수를 마치고 한상현이 귀국했다. 그는 오라는 구단은 마다하고 오성 라이온즈의 2군 투수코치 자리를 맡았다. 그리고 그 해부터 최민혁의 악몽이 시작 되었다.
한상현 코치는 바로 죽은 동산고 감독 한상수의 친형이었다. 원래 한상수의 계획은 최민혁이 고교를 졸업하면 형이 있는 미국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당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코치 연수 중이었던 한상현은 파이어리츠 구단에 최민혁의 영입을 타진 중이었다. 하지만 동생이 덜컥 죽고 최민혁이 국내 프로리그에서 뛰겠다고 오성 라이온즈의 드래프트 신청을 받아드리면서 모든 게 뒤죽박죽되고 말았다.
그 뒤 미국에서 코치 연수를 끝낸 한상현이 돌아왔고 그는 동생의 꿈인 최민혁이 메이저 무대에 서는 걸 이루기 위해서 매년 리그가 끝나면 최민혁을 불러내서 해외 전지훈련을 떠나기 전까지 지옥 훈련을 시켰다.
최민혁으로서는 그의 은사 한상수 감독을 생각해서 한상현의 훈련을 거절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올해로 4년 째였다. 그리고 올해도 예외는 없이 한상현이 찾아왔다. 최민혁을 지옥으로 안내하기 위해서 말이다.
최민혁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 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이곳에 왔을 텐데 어째 병문안을 온 거 같지가 않았다.
“배낭 여기 내려 놔.”
한상현 코치의 말에 조재익이 지고 있던 큼직한 배낭을 그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한상현 코치가 그 배낭을 열었고 그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걸 보고 최민혁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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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에서 한상현 코치가 꺼낸 건 포수 글러브였다. 그 글러브를 한상현 코치가 조재익에게 휙 던졌다. 그러자 그걸 잡은 조재익이 알아서 뒤로 물러났다. 그는 홈 플레이와 투수판의 거리인 18.44m를 어림해서 잡고는 그곳에 쪼그리고 앉으며 주먹을 미트 속에 박아 넣었다.
그때 한상현 코치가 뒤로 글러브를 던졌다. 그 글러브는 정확히 최민혁에게로 날아왔고 최민혁은 얼떨결에 그 글러브를 잡았다. 그런 최민혁을 돌아보며 한상현 코치가 말했다.
“여기 와서 서라. 그리고 던져 봐.”
그 말 후 한상현 코치는 묵직한 배낭을 들고 옆 담벼락으로 물러났다. 최민혁은 어쩔 수 없이 한상현 코치가 서 있던 곳에 가서 섰다. 그리곤 생각했다.
과연 한상수 감독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과연 최민혁은 메이저 리그로 갔을까?
최민혁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최민혁의 성격상 그는 도전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다. 간이 작고 편협한 그는 뱀대가리가 될 지언즉 용꼬리가 되는 건 원치 않을 녀석이었다.
지금의 최민혁의 예상대로라면 한상수 감독이 살아 있었어도 최민혁은 국내 드래프트를 받아드렸을 터였다.
그게 이상하게 꼬이고 엇갈리면서 한상현 코치가 매년 연말에 최민혁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고 그 덕에 최민혁은 패스트 볼 뿐 아니라 브레이킹 볼도 수준급으로 던질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그 최고 수혜자는 최민혁 자신이었다. 한상현 코치로부터 훈련을 받은 뒤 최민혁은 매년 20승 이상의 승수를 거두며 명실 공히 오성 라이온즈의 에이스, 아니 대한민국 프로야구의 에이스가 될 수 있었으니까.
척!
최민혁은 비록 마운드는 아니지만 신발로 바닥을 쓸었다. 지금의 최민혁은 야구를 잘 모른다. 하지만 최민혁의 몸이 글러브를 끼고 마운드에 서자 알아서 에이스의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휙! 처억!
담벼락에 서 있던 한상현 코치가 최민혁에게 공을 던졌고 그걸 최민혁이 글러브로 잡았다.
슥!
최민혁이 습관적으로 글러브 안으로 손을 넣고 그 속에 공을 잡았다. 순간 최민혁은 가슴이 급격히 뛰는 걸 느꼈다.
‘이런 걸 두고 몸이 알아서 반응한다는 건가?’
최민혁은 이미 보유능력인 능력빙의를 사용해 버렸다. 때문에 지금 최민혁은 이전 최민혁의 기억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민혁은 왠지 공을 잘 던질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길. 나도 모르겠다.’
공을 못 던질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못 던져도 사고를 핑계 대면 될 일이었다. 그 사이 최민혁은 글러브 안의 공을 손에 쥐었다. 실밥의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면서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팍팍!
그때 최민혁의 전면에 쪼그리고 앉아서 죄 없는 글러브를 쥐어박으며 조재익이 외쳤다.
“시원하게 꽂아 봐라 마.”
그 말 후 최민혁을 향해 조재익이 포수 글러브를 내밀었는데 그걸 보는 순간 최민혁은 온몸에 짜릿한 쾌감이 흐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무슨 최면에 걸린 양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스륵!
부드럽게 오른 다리가 올라가고..... 회전하는 허리와 비틀리는 상체......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재익이 내민 글러브를 쳐다보며 오를 발을 내뻗었다.
척!
강하게 지지하는 오른발로 중심이 자연스럽게 이동하며 왼발로 땅바닥을 강하게 찼다. 몸이 기울어지고 상체가 풀리면서 왼팔이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가 순식간에 지면으로 하강했다.
쐐애애액!
퍽!
최민혁이 던진 공이 정확히 조재익이 내밀고 있던 포수 글러브에 틀어 박혀 있었다. 순간 찌릿하니 흥분이 일어 최민혁의 온몸을 강하게 휘감았다.
오성 자동차 전무 이사였던 그는 접대를 핑계로 많은 술집 여자를 안아보았다. 사실 어느 정도 높은 지위에 있는 남자라면 대한민국의 미녀들 중 절반 이상이 술집에서 일하고 있단 걸 알 것이다.
그런 미녀들 중에서도 최상위의 여자들만 안아 온 최민혁이었다. 당연히 그녀들과 즐기는 게 좋았고 그 때문인지 결혼도 미뤄 온 그였다.
그런 그가 단언컨대 조금 전 공을 던졌을 때 느꼈던 쾌감은 그 어떤 미녀와 즐겼을 때의 그 쾌락과도 비견 될 만 했다.
“좋군. 좋아.”
그때 담벼락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한상현 코치의 목소리가 최민혁의 귀에 계속 이어서 들려왔다.
“하나 더. 이번엔 투심 말고 포심으로.”
앞서 최민혁이 던진 직구가 투심인 모양이었다.
슥!
한상현 코치의 말을 듣고 난 최민혁은 조재익으로부터 건네받은 공이 들어 있는 글러브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앞서 공을 잡은 것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공을 쥐었다. 그리고 공을 던진다는 생각이 들자 흥분감이 몰려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오른 다리가 올라가고 공을 포심 그립으로 쥔 왼손이 글러브에서 빠져 나왔다. 왼쪽 어깨가 열리고, 뻗어 나간 오른쪽 다리가 축이 되어 몸을 지탱하고. 힘차게 최민혁의 팔이 흩뿌려졌다.
쐐애애액!
퍼억!
앞서와 거의 똑같은 속도로 빠르게 공이 조재익이 내밀고 있던 미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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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현 코치는 96마일은 족히 넘어 보이는 묵직한 최민혁의 직구에 흡족하니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당연히 그 웃음은 빠르게 사라졌기에 최민혁이나 조재익이 볼 일은 없었다.
96마일이면 155Km/h의 빠른 공이다. 물론 메이저리그에서 이 정도 속도는 마이너리그 마운드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문제는 소위 말하는 구위, 무브먼트, 볼 끝이라고도 부르는 공의 변화 정도다. 같은 직구라도 볼 끝이 살아 있는 공과 아닌 공의 차이는 크다. 그리고 그 차이가 바로 메이저리그 선발투수와 그 밑 투수의 차이라고 봐도 좋았다.
한상현 코치가 판단키로 최민혁의 직구는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었다. 문제는 변화구였다.
메이저리그에서 제대로 된 변화구를 갖추지 못한다면 타자들의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때문에 한상현 코치는 3년간 최민혁에서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전수했다. 그리고 시간 날 때마다 최민혁을 찾아가서 그걸 점검했고 최민혁은 두 구종 모두 수준급에 올랐다.
그 결과 최민혁은 매 시즌 어렵지 않게 20승 고지를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두 구종만으로 살짝 아쉬웠던 한상현은 이번 비시즌 중에 커브나 커터를 최민혁에게 전수 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래도 이번에 커브와 커트 전수는 어려울 거 같단 생각을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조재익에게는 훈련 준비를 해 오라고 해서 같이 만나서 강원대학병원에 왔는데 교통사고 환자치고 최민혁은 팔팔했다. 직구 두 구종의 구위가 확실히 살아 있는 걸 확인한 한상현 코치가 최민혁에게 외쳤다.
“직구 말고 변화구도 던져 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와인드 업 한 최민혁이 유연하게 공을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