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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이스
병원 생활이란 게 아프지만 않으면 괜찮은 거 같았다. 가만있으면 알아서 식사도 갖다 주고 말이다. 최민혁은 오전부터 노트북을 끼고 살았다. 그러다 점심을 먹고 계속 노트북에 그가 직접 기록한 일기를 읽어 나갔다.
여동생 최다혜는 최민혁이 집에 오면 일기를 썼다고 했는데 일기는 최민혁이 고2때부터 시작 되었다. 노트북이 최신 버전인 걸로 봐서 최민혁은 그 전부터 컴퓨터로 자신의 일기를 써온 모양이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최민혁의 성향과 차성국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편협하고 조급하며 자존심이 센 거 이외에도 녀석은 섬세한 면이 있었다.
십자수 놓기를 좋아하고 또 혼자 책 읽는 걸 즐겼다. 물론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녀석이 한 노력은 투수놀음 못지않았다.
“그럴 시간 있으면 공부를 하든지 아니면 훈련을 더 할 것이지.”
최민혁이 자신의 쓰잘데기 없는 취미 생활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을 때 병실 문이 갑자기 확 열렸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최다혜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왔어?”
“...............”
최민혁이 일부러 아는 척까지 해 주었는데 최다혜는 그의 말을 생깠다. 그런 그녀를 보고 최민혁이 황당한 얼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최다혜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오빠. 하나 진짜 만날 줄 거야?”
“뭐?”
뜬금없는 최다혜의 말에 최민혁은 아무래도 계속 노트북을 보고 있기 틀렸다 싶어서 노트북 덮개를 덮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평소의 싸가지 없는 최민혁이라면 이런 식으로 말했을 리 없었다. 최다혜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냥 같이 사는 핏줄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그의 부모님이 어릴 때 어떻게 최민혁을 키웠는지 모르지만 최민혁이 보건대 자신은 개차반이었다.
“하나 그게 날 놀리잖아. 대책 없이 멍청하다고.”
“그래? 말이 심했네. 근데 그 얘가 왜 너에게 그런 소릴 했대?”
“응? 그, 그건.....”
최다혜는 꽤나 놀란 얼굴로 최민혁과 눈빛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렇단 건 그녀가 꼭 숨겨야 할 일이 있단 거였다.
숱한 비즈니스 자리에서 많은 사람을 접해 본 차성국의 노련한 눈매가 순진한 최다혜를 파악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강하나다!”
최다혜가 놀라 소리쳤고 그 소리는 충분히 병실 밖에도 들릴 만큼 컸다. 그래서 병실 밖에서 강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야. 미안. 내가 말실수를 한 거 같은데 네가 이해 해 줘. 넌 내 베스트 프렌드잖아.”
“흥!”
강하나가 용서를 빌었지만 최다혜는 코웃음만 날렸다. 그때 그런 최다혜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최민혁이 외쳤다.
“들어 와.”
그 말에 최다혜가 발끈했다.
“오빠!”
하지만 병실의 주인인 최민혁의 허락이 떨어지자 강하나는 바로 병실 문을 열었다. 그리곤 한 손으로 귀엣머리를 쓸면서 조신하니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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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나는 병실 밖에서는 베스트 프렌드 운운했지만 병실 안에 들어서자 친구인 최다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롯이 병상에 누워 있는 최민혁에게 눈빛을 집중시키며 그녀가 말했다.
“오빠. 괜찮으세요?”
그러면서 손에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는 보지도 않고 그녀 옆의 최다혜에게 내밀었다. 최다혜는 그런 강하나를 쏘아봤지만 강하나가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자 짜증난 얼굴로 그녀가 내민 과일바구니를 낚아챘다.
강하나는 그러던 말든 상관없다는 듯 과일 바구니를 최다혜에게 넘기고 최민혁의 침상으로 바짝 다가갔다.
“보기엔 멀쩡.....아니 괜찮아 보이시네요. 호호호호.”
강하나의 눈이 그 새 최민혁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를 자세히 살핀 모양이었다. 최민혁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데 그 흔한 붕대하나 몸에 감겨 있지 않았다.
“어. 난 괜찮아.”
최민혁은 강하나가 최다혜의 고교 동창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동생 대하듯 편하게 말을 놓았다. 그러자 강하나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럴 것이 지금껏 최민혁이 이렇게 살갑게 그녀를 대해 준 건 좀체 드문 일이었으니 말이다.
‘오, 오빠가 드디어 내게 마음의 문을 열기로 한 건가?’
그러면서 그녀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향했다. 그러자 팔짱을 낀 체 아니꼬운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최다혜가 보였다.
뭣 때문에 저런지 모르지만 그래도 최다혜가 자신을 좋게 말해 준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 항상 자신을 찬 밥 취급하던 최민혁이 이렇게 다정하게 그녀를 대할 리 없었으니까.
‘고맙다. 친구야.’
강하나는 속으로 최다혜에게 고마워하면서 웃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봐 주고 있는 최민혁의 얼굴을 황홀한 시선으로 반쯤 넋 놓고 쳐다보았다.
이때 최민혁은 입가에 침이 맺힌 채 넋 나간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강하나를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 애가 확실히 날 좋아하긴 한가 보네. 아주 넋이 나갔군. 나갔어.’
최민혁도 남자였다. 강하나처럼 예쁘장한 여자가 자신을 좋아해 주니 기분이 나쁠 리 없었다. 물론 이전의 최민혁이라면 지금 강하나를 보고 화를 내며 당장 병실 밖으로 내쫓았을 테지만.
“바쁠 텐데 이렇게 문병 와 줘 고마워.”
최민혁은 문병 와 준 강하나에게 아무 사심 없이 형식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강하나는 달랐다.
“지, 지금 고, 고맙다고 하셨죠?”
“응?”
“오, 오빠!”
강하나는 곧 울 거 같은 얼굴로 최민혁의 병상에 바짝 다가와선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최민혁이 투수라서가 아니라 그의 손은 컸다. 그에 비해 강하나의 손은 섬섬옥수란 말이 어울리게 예뻤다. 그런 예쁜 강하나의 두손이 투박한 최민혁의 큰 손을 잡자 최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야!”
그때 병실이 떠나갈 듯 최다혜가 소리치며 병상으로 뛰어와서는 최민혁의 손을 잡고 있던 강하나의 두 손을 뿌리쳤다.
“다, 다혜야.”
그런 최다혜의 반응에 최다혜가 깜짝 놀라 할 때 최다혜가 씩씩거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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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나야 배우고 유명해 지는 단계에 있으니 당연히 예뻤다. 하지만 최다혜 역시 어디 내놔도 외모로 꿀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최다혜의 입에서 쌍스런 소리가 튀어 나오자 최민혁은 놀라 두 눈이 동그래졌다.
반면 그런 최다혜가 낯설지 않은 친구 강하나의 눈빛이 번뜩였다. 하지만 힐끗 최민혁의 눈치를 본 후 강하나의 눈빛은 누그러지고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다혜야. 그래도 내가 너의 베스트 프렌든데 개수작이란 말은 좀.....”
“베스트 프렌드니까 이정도로 끝낸 거야. 우리 오빠가 좀 아프다고 그걸 노리고 슬쩍 오빠한테 스킨십을 하다니. 너 진짜 양심도 없구나.”
“양심도 없다니? 너 진짜 말 다했어?”
참는데도 한계가 있는지 강하나의 언성이 높고 날카로워지는 걸 감지한 최민혁이 곧장 중재에 나섰다. 어제 최다혜와 걸레 한가연의 싸움은 그냥 관전만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괜히 친구끼리 싸우다 우애에 금이라도 가면 그 원인 제공자인 자신도 찜찜할 터였다.
“잠깐만! 너희들 병실에서 진짜 싸우려고?”
최민혁의 말에 최다혜와 강하나가 동시에 움찔했다.
“싸, 싸우긴 누가 싸운다고 그래?”
“오빠. 아니에요. 싸우다뇨. 제가 다혜랑 얼마나 친한데요.”
둘은 최민혁을 향해 억지로 웃어 보였지만 둘이 눈빛이 마주치자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그 둘이 다시 싸우는 일이 없게 최민혁이 아예 먼저 선을 그었다.
“하나는 오늘 와 줘서 고마운데. 너 바쁜 거 나도 다 알거든. 그러니 이만 돌아가.”
“네? 하지만.....”
그녀가 여기 오기까지 스케줄을 조정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최민혁은 모를 터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섭섭함을 단번에 날려 버릴 말이 최민혁의 입에서 나왔다.
“나 모레 퇴원하거든. 대신 그날 밤에 우리 집으로 놀러 와. 그때 같이 놀도록 하자.”
“모, 모레요?”
“왜? 바쁘면 안 와도.....”
“아뇨. 꼭 갈게요.”
강하나는 이게 꿈인지 생신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자기 손으로 뺨을 꼬집어보고선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꾸벅 최민혁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빠. 그럼 저 이만 갈게요. 다혜야. 안녕!”
강하나는 친구인 다혜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휑하니 뒤돌아서 병실을 빠져 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나자 최다혜가 황당한 얼굴로 최민혁을 보고 물었다.
“오빠. 미쳤어?”
“뭘?”
“진짜 강하나를 모레 집에 초대한다고?”
“뭐 어때?
“그날이 무슨 날인지 몰라?”
“크리스마스지.”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날 밤에 오빠가 집에서 강하나를 불러서 같이 놀겠다고? 레알 진심이야?”
“뭐 딱히 할 일도 없잖아.”
“허얼!”
그 말에 최다혜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더니 몸을 돌려서 병실을 나서려 했다. 그런 그녀에게 최민혁이 말했다.
“어디가?”
“정신과 의사 데리러.”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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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나의 매니저는 운전석을 뒤로 넘기고 최대한 편한 자세로 생각을 했다. 앞으로 강하나를 어떻게 최민혁이란 놈에게서 떼어 놓을지 말이다. 오늘은 꼭 자신의 직속상관인 이 팀장에게 이 일을 보고 하기로 작정 했지만 그래도 강하나의 매니저는 자신이 아니던가? 나름 좋은 대책이라도 떠오른다면 자신의 선에서 해결하는 게 최선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막힌 대책이 며칠 쉬지도 못하고 바쁘게 스케줄을 소화하기 있는 그의 피곤한 머리에서 떠오를 리 없었다.
스르르!
강하나의 매니저는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몇 차례 껌뻑거리다가 더는 밀려오는 수마를 참지 못하고 눈을 감으려 했다.
“으으?”
그때 그의 눈에 노랑나비 한 마리가 폴짝거리며 날아왔다. 그런데 어째 그 나비가 강하나 같았다. 강하나는 오늘 누구에게 잘 보이겠다며 노랑 원피스를 입었다. 최민혁이 노랑색을 그렇게 좋아한다나 뭐래나.
‘에이. 설마....’
강하나가 최민혁을 보러 간지 이제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벌써 돌아올 리 없었다. 하지만 그 나비가 점점 더 그의 시야에 가까워져 오자 강하나의 매니저는 몸을 일으키며 동시에 운전석도 위로 끌어 올려 자세를 고쳐 잡고 앉았다. 그러자 그의 눈에 선명하게 그 나비가 보였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폴짝폴짝 뛰면서 이쪽으로 오고 있는 나비의 정체는 바로 강하나였다. 그런 그녀를 보고 강하나의 매니저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드디어 미쳤구나.”
잠시 뒤 카니발 차의 뒷문을 열고 차 안에 올라 탄 강하나가 외쳤다.
“크리스마스!”
“뭐?”
운전석의 매니저가 그녀를 돌아봤지만 강하나는 굳어 있는 매니저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말했다.
“오빠. 크리스마스 밤에 스케줄 무조건 다 비워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