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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이스-3화 (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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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이스

삐- 삐- 삐- 삐

규칙적인 신호음이 그의 귀를 거슬렸다.

‘여긴...... 내가 살아 있는 건가?’

병원 베드에 누워 있는 젊은 남자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의식이 깨었기에 눈을 떠 보려고 했지만 누가 눈꺼풀을 꿰매기라도 한 듯 눈은 떠지지 않았다. 귓가로 이명이 윙윙 울리는 가운데 그의 코로 소독 냄새와 함께 특이한 약 냄새가 났다.

‘병원인가?’

심전도계에서 나는 삐삐 거리는 소리가 남자에게 확신을 주었다. 여기가 병원이란 걸 말이다.

그는 새벽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병원.

적어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안도케 만들었다. 그 때문일까?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지만 그의 뇌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했다. 아마 교통사고 후유증 탓이리라. 그의 의식이 이내 흐릿해지며 이내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 가운데 그의 의식이 다시 깨었다.

“으으음......”

헬스장에서 두 시간은 쉬지 않고 운동을 한 듯 그의 몸은 노곤하니 축 처져 있었다. 꽤 오래 잔 듯 눈이 잘 떠지지 않는 가운데 그는 억지로 눈을 떴다. 순간 환한 빛 때문에 재빨리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오, 오빠. 정신이 들어? 말 좀 해 봐.”

그런 그의 어깨를 누가 잡고 흔들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머리가 깨질 거 같이 아파 온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만 좀 흔들어라.”

“어? 어. 그래.”

그 사이 흐릿했던 그의 시선이 점점 초점이 잡히면서 그의 눈앞에 예쁘장한 얼굴의 젊은 여자가 보였다.

“누.....구......?”

남자는 당혹스러웠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그를 오빠라고 부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를 보고 여자는 오히려 피식 웃었다.

“오호라!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상황이네. 왜?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렸다고 하려고?”

기억상실은 무슨...... 남자의 기억은 명확했다. 단지 눈앞의 여자가 전혀 모르는 여자일 뿐.

“뭐, 뭐야? 오빠. 장난하지 마.”

여자는 아무래도 남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불안한 얼굴표정을 지었다.

“오빠라니? 누가 당신의 오빠란 건가?”

남자의 나이는 올해 33살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여자는 많이 봐도 20대 초중반. 그래서 남자는 말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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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혜는 오빠인 최민혁이 깨어났을 때 두 손 모아 신께 기도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깨어난 최민혁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하필 이럴 때......”

최다혜는 서울의 모 여대에 다니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뭐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 탓인지 미모가 출중한 덕에 그 여대 여신으로 불리며 매일 같이 그녀 집 주위로 파리들을 들끓게 만들고 있었지만 그녀는 털털한 성격에 친구와 술을 좋아하는 보통 여대상의 삶을 살아왔다.

그런 그녀에게 사흘 전 생각지도 않았던 사건이 벌어졌다.

그날 그녀는 완전 흥분 상태였다. 그럴 것이 그날 저녁 부모님이 보름간 유럽 여행을 떠나셨기에 그녀는 그렇게 기대하고 고대하던 홍대 클럽에서 밤새 놀 수 있게 된 것이다.

폐쇄적인 성향의 부모님 탓에 최다혜는 밤 10시까지 꼭 집에 들어가야 했다. 어쩌다 친구 핑계를 대도 12시가 한계였다. 12시가 넘어가면 난리가 났다. 부모님이 그녀를 직접 찾아 나섰던 것이다.

참고로 최다혜의 아빠는 서울서부지검의 차장검사셨고 엄마는 강동 경찰서장이셨다. 그 두 분이 설치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런 부모님이 결혼 25주년을 맞아서 해외여행을 가시면서 고삐가 완전 풀려버린 최다혜는 새벽까지 신나게 친구들과 놀고 근처 24시 해장국 집에서 콩나물 해장국을 맛있게 먹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신나고 즐거웠다. 그런데 033으로 시작하는 전화가 갑자기 그녀에게 걸려왔다. 그냥 안 받으려다 느낌이 쎄해서 받았더니 대구에 있어야 할 오빠가 강원도 한 국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게 아닌가?

최다혜는 처음엔 이게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다. 하지만 오빠가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얘기가 나오고 보호자가 필요하니 빨리 강원대학병원으로 와 달란 말에 최다혜는 곧장 해장국집을 뛰쳐나와야 했다. 그렇게 길가에서 택시를 잡아탄 최다혜는 강원대학병원으로 향했고 거기서 응급실 병상에 누워 있는 오빠 최민혁을 발견했다.

그때 최민혁은 의식이 없었고 이틀 뒤에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문제는 깨어난 그가 최다혜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단 점이었다.

“진, 진짜 기억 안 나? 나 오빠의 하나 뿐인 동생 최다혜라고.”

“..................”

최민혁은 멀뚱히 그녀만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최민혁의 반응이 장난이 아님을 직감한 최다혜는 의사를 부르러 병실을 나섰다. 그녀가 잠깐 병실을 비운 사이였다. 늘씬한 8등신 미녀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민혁씨! 많이 다쳤어요?”

미녀는 곧장 병상의 최민혁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짙은 화장에 익숙한 향수 냄새에 최민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파요? 어떡해.”

미녀는 최민혁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이 자신 때문인 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그럴 것이 최민혁은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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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의 이름은 한가연.

대한민국의 대구광역시를 연고지로 하는 KBO 소속 프로야구 팀 오성 라이온즈의 치어리더였다. 대구의 여신으로 불리는 그녀는 치어리더 외에도 가수와 연기 등 다방면에 걸쳐서 활약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바쁜 와중에 강원도 춘천에 위치한 강원대학병원을 찾은 건 그녀의 애인으로 알려진 오성 라이온즈 소속 투수 최민혁이 교통사고로 이곳에 입원을 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멀쩡해 보이기만 하네 뭐.’

한가연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최민혁을 보고 있었지만 실상 생각은 달랐다.

‘피곤해 죽겠구먼. 사고는 괜히 당해서 사람 귀찮게 하네. 암튼 마음에 안 들어.’

최민혁은 몰라도 한가연은 딱히 최민혁을 좋아하지 않았다. 두 달 전쯤 그녀가 최민혁과 열애설이 났을 당시 그걸 인정하고 그와 사귀기로 했다고 대중 앞에 공식적으로 발표 했을 때는 다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당시 그녀는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을 타진 중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다른 배우들에 비해 인지도나 이슈가 약했던 그녀는 섭외에서 배제 당할 공산이 컸었다.

치어리더가 왜 여기 왔느냐? 연기는 개나 소나 하는 줄 아나? 야구 여신이 여긴 왜 와? 야구장이나 가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들었으니까.

바로 그때 한국시리즈가 시작 되었고 당시 첫 경기와 마지막 경기에 선발 등판해서 각기 완봉과 완투승을 거둬서 시리즈 MVP를 차지 한 게 최민혁이었다.

그런 핫한 최민혁이 이상형으로 자신을 꼽자 한가연은 그걸 이용하기로 하고 최민혁에게 접근해서는 그와 진지하게 사귀기로 했다고 세상에 공표했다. 그 결과 덩달아 유명해진 한가연은 드라마와 영화에 모두 캐스팅 되었고 요즘은 지상파는 물론 공중파의 연애 오락 프로그램에도 자주 그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로서는 여기 올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교통사고로 다쳐 병원에 누워 있는데 그녀가 여기 오지 않았단 사실이 밝혀져 봐라. 언론이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결별 설은 기본에, 그녀가 인기 때문에 최민혁을 이용했다며 한 바탕 난리가 날 게 뻔했다.

‘내년 봄이 오기 전에 정리 해야지. 그때까진 별 수 없어. 연인 척 할 수밖에.’

최민혁은 곧 전지훈련을 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활발히 연예계 활동을 이어 갈 것이고 그럼 둘 사이는 소원해 질 터. 그럼 그때 자연스럽게 이별을 하면 됐다. 그 전에 최민혁에게 그녀가 먼저 결별을 통보해야 할 테지만.

그동안 여러 남자를 만나온 한가연에게 최민혁 같은 애송이쯤 떼어 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이왕 왔으니 최민혁에게 살갑게 굴다 갈 생각이었던 한가연이었지만 훼방꾼이 나타나면서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언니가 어쩐 일이에요?”

바로 최민혁의 여동생 최다혜가 병실에 들어 온 것이다.

“그야 애인이 다쳤다니 당연히 와봐야 하는 거 아니겠어?”

“애인? 누가 누구 애인이란 거예욧!”

한가연이 최민혁을 이용하기 위해 사귀자고 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당사자인 최민혁 뿐이었다. 당연히 그 가족들은 불여우 같은 한가연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동생인 최다혜는 병적으로 한가연을 싫어했다. 그녀와 말하는 건 물론 한 공간에 있는 것 자체도 싫었던 최다혜의 입에서 한가연을 보고 좋을 말이 나올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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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연도 말싸움하면 누구에게 뒤지지 않지만 최다혜 앞에선 제대로 기도 펴지 못했다. 결국 얼굴이 시뻘게진 한가연은 씩씩거리며 병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아. 내 살다 살다 저런 여어언........”

한가연의 입에서 욕설이 막 튀어 나오려 할 때 마침 의사와 간호사가 그녀 쪽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그래서 잽싸게 입을 다문 한가연은 그들을 피해서 반대로 병실 복도를 따라 걸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움직였다. 그 사이 그 의사와 간호사는 최민혁이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으음......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단기적인 기억상실이 올 수는 있습니다.”

“그럼 뇌에 이상은 없단 말인가요?”

“네. MRI상 뇌에 어떤 이상도 발견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정신과전문의를 콜 할 까요?”

의사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최다혜가 최민혁을 쳐다보았는데 그때 최민혁이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기억이 나기 시작했거든요.”

“그러세요? 잘 됐습니다. 며칠 푹 쉬시면 원상태로 회복 되실 겁니다. 그러면 저기.....”

의사가 힐끗 자기 뒤쪽의 간호사를 쳐다보며 손짓을 하자 간호사가 차트와 펜을 의사에게 건넸다. 그걸 받아 든 의사가 조심스럽게 최민혁에게 그걸 내밀며 말했다.

“사인 좀 부탁드립니다.”

사인이란 말에 최민혁은 잠시 멍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그때 최다혜가 나섰다.

“오빠가 아직 정신이 좀 없어서. 사인은 제가 받아서 이따가 전해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을 나가고 최다혜가 홱 최민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 기억이 나?”

“어. 뭐 조금.....”

“그럼 다행이고. 나 집에 좀 다녀올게. 갈아입을 옷도 좀 가져 와야겠고. 오빠도 퇴원 하려면 옷도 필요하고.”

“퇴원?”

“응. 의사가 괜찮다고 사흘 뒤에 퇴원하라네. 뭐 몸은 멀쩡하잖아? 왜 어디 아픈데 있어?”

“아, 아니.”

최다혜의 말처럼 최민혁의 몸은 두 차가 정면 추돌한 사고 피해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멀쩡했다. 최다혜는 곧장 입원실 사물함 속에서 하이힐과 핸드백을 꺼냈다. 그리곤 신고 있던 삼선 슬리퍼를 벗고 하이힐을 신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큰 키의 그녀가 더 커보였다. 최민혁의 눈에는 좀 전 그를 찾아 왔던 그 화려한 8등신 미녀보다 최다혜가 백배는 더 예뻐 보였다.

“저녁은 돼야 올 거야. 식사 나오면 잘 챙겨 먹고.”

“어. 그래. 가 봐.”

최다혜는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막 병실을 나서려다 뭔가 생각이 난 듯 병상 옆 관물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위에 의사가 두고 간 차트와 펜을 챙겼다. 그녀는 선 체 펜으로 슥슥 차트에 사인을 하며 말했다.

“내가 오빠 사인을 똑같이 따라 할 줄 아는 걸 다행으로 알아. 참. 좀 이따 구단 관계자들이 올 거야.”

“구단 관계자들?”

“응. 원래는 어제 왔었는데 오빠가 의식이 깨지 않아서 다들 돌아갔거든. 오늘 또 올 거라고 했으니까 오긴 오겠지 뭐.”

최다혜는 그 말 후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곤 자신이 사인한 차트를 들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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