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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이스
박규철 회장은 대화 중 밑에 사람이 뜸 들이는 걸 아주 싫어했다. 그걸 아는 윤재욱은 바로 입을 열었다.
“그분이 관리하던 비자금은...... 아직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윤재욱의 대답에 박규철 회장이 끼고 있던 팔짱을 풀더니 고개를 그에게로 돌렸다.
“대충 그 돈이 얼마나 될 거 같은가?”
이 물음 역시 윤재욱이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그래서 바로 대답을 했다.
“대략 500억에서 많게는 3,000억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후훗! 녀석. 제법이야. 많이도 해 처먹었어.”
박규철 회장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이내 표정을 굳힌 그가 윤재욱에게 말했다.
“찾을 수 있으면 찾아 내.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묻어. 아무도 알 수 없게. 무슨 말인지 알지?”
“네. 회장님.”
차성국의 일로 오성그룹에 조금도 누가 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단 말이었다. 그걸 모를 윤재욱이 아니었다.
“나가 봐.”
박규철 회장의 축객령에 윤재욱은 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서재를 빠져 나왔다.
탁!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닫고 난 뒤 윤재욱은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휴우우!”
그리고 힐끗 뒤돌아서 서재 문을 쳐다보다 이내 앞으로 시선을 두고 정면의 계단 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윤재욱이 막 1층 거실에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윤 팀장님!”
나긋나긋한 여자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아는 윤재욱은 뒤늦게 움찔했다.
“하아!”
한숨과 함께 그의 시선이 목소리가 울린 쪽으로 돌아가니 미녀 탤런트 뺨 때리게 예쁜 정장 차림의 여자와 바로 눈빛이 마주쳤다.
“민 실장님!”
윤재욱이 그녀를 호칭하며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와 마주 선 정장 차림의 미녀도 같이 고개를 숙여 예를 차렸다. 그리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좀 보죠.”
그 말 후 횅하니 돌아선 그녀는 곧게 허리를 펴고 앞으로 걸었다. 그런 그녀 뒤를 윤재욱이 말없이 뒤따랐다. 그때 윤재욱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태에 꽂혔다.
‘민예린!’
바로 오성그룹의 안주인인 최선화의 개인 비서였다. 국내 최고 명문 여대 비서과를 졸업하고 최선화를 모시기 시작한 민예린은 벌써 10년째 최선화를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 전 최선화의 비서 수명은 길어야 2년이었다. 그 만큼 까탈스러운 최선화 였는데 민예린에 대한 그녀의 신임은 각별했다. 이는 곧 민예린을 얕봤다간 큰 코 다친단 소리이기도 했다.
‘진짜 죽이네.’
민예린은 출중한 미모의 여인이었다. 비록 3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특히 몸매는 예술이었다. C컵은 넘어 보이는 가슴에 잘록한 개미허리, 그 아래 둥근 골반의 만들어 내는 곡선은 완벽한 S라인을 자랑했다.
실룩거리는 민예린의 탱실한 엉덩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윤재욱이 바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자마자 바로 반응한 것이다.
달칵!
어느 새 저택의 방 앞에 도착한 민예린이 살짝 노크 후 바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윤재욱이 살고 있는 강남의 40평형 아파트 보다 넓은 방이 보였고 윤재욱은 민예린과 같이 그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방의 아방가르드 한 소파에 앉아 있는 중년의 여인이 윤재욱의 눈에 보였다. 그런데 그녀는 돋보기안경을 끼고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윤재욱의 허리가 직각으로 굽혀졌다.
“사모님!”
“식사는 했나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중년의 여인이 윤재욱에게 물었다.
“네. 먹었습니다.”
하지만 중년 여인은 그 말을 무시하고 비서인 민예린에게 말했다.
“윤 팀장. 식사시켜서 보내.”
“네. 사모님.”
그 뒤 한 동안 말없이 신문을 보던 중년 여인이 불쑥 윤재욱에게 물었다.
“그 놈이 죽었다죠?”
중년 여인이 말한 그 놈이 누군지 바로 간파한 윤재욱이 즉각 대답했다.
“네. 시신을 제가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으음. 수고 했네.”
윤재욱은 중년 여인의 입가에 슬쩍 맺힌 웃음을 보았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금세 사라졌고 중년 여인은 궁금한 걸 계속 윤재욱에게 물었다.
“회장님이 뭐라 시던가요?”
“그, 그건......”
아무리 눈앞의 중년 부인이 박규철 회장의 부인인 최선화라도 회장과 나눈 대화 내용을 그녀에게 밝힐 순 없었다. 그랬다간 그의 목이 날아가는 건 불 보듯 뻔하니 말이다. 곤욕스런 얼굴의 윤재욱을 보고 민예린이 말했다.
“사모님께선 죽은 차성국씨에게 회장님이 뭔가 해주란 게 있는지 묻고 계신 거예요.”
민예린의 말에 윤재욱이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거 없습니다. 뒤처리를 확실히 하란 말씀은 있으셨습니다.”
윤재욱의 대답에 여전히 신문을 보고 있던 최선화가 듣고 싶은 말을 들은 듯 이제 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 민예린이 윤재욱에게 말했다.
“그만 나가시죠.”
윤재욱은 들어올 때처럼 조용히 최선화의 방을 나섰다. 민예린은 그런 윤재욱을 데리고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엔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고급 음식들이 식탁 위에 한 상 잘 차려져 있었다.
“식사하시고 가세요.”
민예린은 윤재욱에게 그 말을 남기고 휑하니 사라졌다. 윤재욱은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식탁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꾸역꾸역 차려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사모인 최선화가 하사한 식사를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기에 윤재욱은 남김없이 밥과 국을 비워야 했다.
그렇게 더부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윤재욱은 오성그룹 회장의 대저택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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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인 민예린 돌아오자 최선화는 들고 있던 신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그 위에 끼고 있던 돋보기를 올렸다. 이어 등을 푹신한 소파에 기대고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평소 골치 아픈 일이 생길 때 최선화가 주로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 상태에서 최선화의 입이 열렸다.
“천한 피가 어디 가겠어? 안 그래?”
“네. 사모님.”
“그놈 때문에 우리 영준이 한데 불똥 튀는 건 아니겠지?”
“현재로썬 자동차 차 전무 이사님과 본사 부회장님 사이에 문제 될 소지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 음흉한 놈이 영준이에게 무슨 오물을 끼얹었는지 알게 뭐야. 민 비서가 좀 알아 봐. 그리고 도울 일이 있으면 알아서 영준이 서포트 해 주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근데 식사는?”
“됐어. 그 놈 생각하니 입맛이 싹 달아났어.”
“식사를 거르시는 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타락죽이라도 드시죠?”
“타락죽? 으음. 좋아. 조금만 가져 와 봐.”
민예린은 바로 머리를 숙인 뒤 조용히 방을 나섰다. 문 닫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최선화는 미간 사이에서 손을 떼어내며 고개를 들고 상체를 곧게 폈다. 그리곤 표독스런 눈으로 민예린이 나간 문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더러운 년. 그놈하고 붙어먹어 놓고 뻔뻔하긴. 하여튼 천한 것들은 어쩔 수가 없다니까. 그나저나 어디서 저런 년을 또 구한다? 일하나는 확실한데.........”
최선화가 민예린을 자르고 새로운 비서를 구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걸 모르는 민예린은 뭔가 쫓기듯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그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리다니......”
복잡한 얼굴의 민예린은 잠시 선 체 생각을 하다 이내 발걸음을 식당 쪽으로 옮겼다. 그녀가 식당에 나타나자 오늘 아침 주방 담당 셰프가 알아서 그녀 앞으로 나섰다.
“사모님 드실 타락죽 준비해 줘요.”
“네. 실장님.”
민예린은 셰프에게 오더를 내린 뒤 타락죽이 준비 될 때까지 기다리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당장 이렇다 할 묘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 새벽에 갑자기 죽어 버림으로서 잘나가던 그녀는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잠시 후 민예린은 최선화에게 타락죽을 갖다 준 뒤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이렇게 된 이상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최대한 발악이라도 해야 했다.
외출 준비를 끝낸 민예린이 대저택을 나서자 입구 앞에 그녀를 태워 갈 차가 대기 중이었다.
최선화의 비서인 민예린은 여느 대기업 이사 대우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에겐 전용 차량과 기사가 기본적으로 딸려 있었다.
그녀는 기사가 열어 주는 차에 오르면서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그런데 전화 건 대상이 누군지 꽤 오랫동안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예린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으으으... 누구야?
그 결과 상대가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자다 일어난 듯 잠긴 목소리의 성별은 누가 들어도 남자였다.
“부회장님. 저 민 비서에요.”
-민 비서?
잠시 전화 받은 상대에게서 침묵이 흘렀다. 민예린은 그 사이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핸드폰을 더 바짝 귀에 갖다 붙였다.
-민예린?
다행히 상대는 그녀를 알아봐 주었다.
“네. 부회장님. 저 예린이에요.”
민예린이 콧소리가 살짝 섞인 애교스런 목소리를 냈다. 그 때문일까? 운전석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힐끗 민예린을 쳐다보았다.
-네가 이 시간에 웬일로..... 어머니께 뭔 일 생겼어?
“아뇨. 그게 아니라 부회장님이 보고 싶어서 전화 드렸죠.”
-뭐? 네가 날?
“호호호호. 저 부회장님 좋아하는 거 아시면서.”
민예린은 살기 위해서 새로운 동아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동아줄로 선택한 게 바로 오성그룹 차기 회장이 유력한 부회장 박영준이었다. 박영준이라면 그녀에게 있어 가장 튼튼한 동아줄이 되어 줄 터였다.
박영준은 10년 전부터 민예린을 노렸다. 하지만 당시에도 유부남이었던 박영준에게 그녀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 상황이 다르다.
“네. 네. 그레이스 호텔요? 네. 그럼 거기서 뵐 게요.”
웃는 얼굴로 박영준과 끝낸 민예린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미친..... 벌건 대낮에 호텔 방에서 보자니......”
박영준의 여성 편력은 그 아비인 박규철 회장과 더불어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둘 다 그룹 차원에서 원체 잘 차단하고 있어서 그렇지 지금도 수시로 즐기는 여자를 갈아 치웠다. 하지만 민예린은 박영준에게 그런 하룻밤 가지고 노는 여자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성향 자체가 암사마귀에 가까웠다. 교미 후 수컷을 잡아먹는 암사마귀 말이다. 박영준도 그녀에게 다를 게 없었다.
“차성국!”
그녀 입에서 이미 죽은 자의 이름이 거론 되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하아. 아까워라.”
아마도 죽은 차성국과 그녀 사이에 무슨 암묵적 거래라도 있은 모양이었다. 그때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운전기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실장님. 어디로 모실까요?”
그 물음에 민예린이 편하게 가죽 시트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그레이스 호텔로 가주세요.”
그 말 후 민예린은 생각할 게 많은 지 두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