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0화 육경음의 변화
보라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은 걸음을 멈추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도우들, 나는 선령족의 오 장로인 옥묘도인(玉渺道人)이다. 선령족의 족장을 대표하여 도우들을 환영한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도우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긴 말은 하지 않겠다. 남편을 뽑기 위한 무예 겨루기는 두 개의 관문이 있고 남녀노소 모두 참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혼전이다. 마지막에 남은 백 명이 다음 관문에 들어갈 수 있다."
말을 마친 옥묘도인은 양손으로 결인을 만들었다.
오색찬란한 빛이 사방에서 날아와 그의 손바닥에 모이더니 동그란 구슬 모양을 이루었다.
옥묘도인이 손을 앞으로 내밀자 구슬 모양의 빛은 허공으로 날아가 커지기 시작했다.
빛은 비스듬하게 서 있는 큰 나무로 변하더니 뿌리를 박고 가지를 늘어뜨렸다.
마지막에 빛은 나무 문으로 변했다.
문 안쪽은 독립적인 작은 공간이었고 새하얀 구름이 하늘에 떠다녔다.
육소명은 앞으로 나서더니 기세를 전부 드러냈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무인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내가 한마디 하겠소. 첫째, 경지가 주경 아래인 무인들은 알아서 물러나시오. 둘째, 도려가 있는 무인들은 참가하지 마시오."
그의 말에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육소명과 마찬가지로 주경정상인 중년 사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육소명, 그게 무슨 뜻이요? 선령족이 정한 규칙에는 그런 조항이 없었소! 자네 선령족의 규칙을 어길 작정이요? 아니면 자네가 족장이라고 생각해서 규칙을 마음대로 바꾸려는 거요?"
중년 사내를 바라보는 육소명의 두 눈에서 신광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육소명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모함은 아무런 의미가 없소. 선령족의 규칙에는 그런 조항이 없지만 이건 내 규칙이요. 도려가 있는데도 시합에 참여한다면 반드시 목을 칠 것이요."
중년 사내는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의 두 눈에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무인들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커다란 도장에 육소명의 말을 반대한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육소명은 예전과 달라졌고 앞날이 창창했으며 천존으로 진급한 아버지까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위엄이 넘치는구나……."
진남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는 세 명의 도려가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진남의 도려는 네 명이었다.
한 명은 먼 곳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뿐이었다.
"도우들, 이제 시작하거라."
옥묘도인은 말했다.
스물한 명이나 되는 주재 강자들이 순식간에 기세를 드러내고 앞장서서 작은 공간으로 날아갔다.
그 뒤로 주경 강자들도 몸을 날려 공간으로 들어섰다.
진남은 경지를 주재초급으로 낮추고 사람들을 따라 공간으로 갔다.
진남은 미리 대동천결을 사용하여 기운과 외모를 감쪽같이 바꾸었다.
천존 경지가 되어야 진남의 진면모를 볼 수 있었다.
조도에 들어섰을 때 진남은 선령족의 천존이 이곳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죽여라!"
공간에 많은 무인들이 밀려들었다.
누구의 외침인지 알 수 없지만 무인들은 신통법을 사용했고 현장은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진남은 살기들을 피해서 날아다니며 가끔 손을 써 주경 강자 한둘을 공격했다.
스물한 명의 주재 강자들 중 셋은 무표정으로 지켜만 볼 뿐 손을 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머지 열여덟 명은 목표도 없이 아무렇게나 공격을 했다.
주경 무인들은 주재 강자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일부 주경 무인들은 연합을 했다.
주재 강자들이 아무렇게나 휘두른 공격도 위력이 엄청나서 그들은 함께 저항해야 했다.
시간은 흘러가고 공간에 남은 무인들도 점점 적어졌다.
"응?"
진남은 갑옷을 입은 늠름한 자태의 청년을 발견했다.
주경대성 경지인 청년은 싸움을 피하지 않고 마구 돌진했다.
청년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두 주재정상들이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한 주재정상은 가끔 청년의 위기를 해결해주기도 했다.
"그런 거군……."
진남은 흥미를 잃었다.
두 주재정상의 도움을 받는 청년은 어느 천존의 자식이 분명했다.
두 시진이 지나고 공간에는 백 명의 무인들이 남았다.
팽팽하던 분위기도 한결 누그러졌다.
"도우들,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을 축하한다."
옥묘도인은 말했다.
"도우들, 공간에서 나오너라. 나를 따라 성주부에 들어가 하룻밤 휴식을 취하자. 내일 오 시가 되면 육 공주가 직접 오찬을 준비해서 도우들을 대접할 거다. 그리고 두 번째 관문의 자세한 사항들도 말해줄 거다."
진남 등은 공간에서 나와 성주부로 향했다.
성주부 대문 앞에서 갑옷을 입은 청년이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은 전부 그를 바라보았다.
"깜빡 잊었구나. 나는 이미 도려가 세 명이나 있었어."
청년은 웃음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육소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공주에게 푹 빠졌다. 소명, 나를 괴롭히지 않을 거지?"
자리를 채 뜨지 못한 무인들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청력이 좋은 진남은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청년이 묘문 문주인 무상천존(無常天尊)의 아들 염무쌍(閻無雙)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한 번 뱉은 말은 지킨다."
육소명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믿지 못하겠으면 한번 시도해보거라. 다른 사람이야 네 신분 때문에 두려워할 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염무쌍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처남이 성깔이 있구나. 매형은 네가 너무 무섭다. 네가 어떤 수단이 있는지 한번 보자꾸나."
옥묘도인은 상황 파악을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는 손짓을 했다.
염무쌍은 거들먹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진남은 성주부 안으로 들어서자 신념을 전부 드러냈다.
성주부는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 느껴졌다.
성주부의 곳곳에 강한 진법을 배치했고 수많은 신물들을 사용했기에 성주부는 평범하지 않았다.
성주부의 깊은 곳에는 엄청 강한 금제가 있었는데 육방천존이 직접 배치한 것 같았다.
진남은 깊게 알아보고 싶지 않았기에 신념을 거두고 성주부 제자의 안내에 따라 한 정원에 도착했다.
방금 신념으로 둘러보면서 진남은 육경음이 있는 곳을 발견했다.
마침 그가 머무는 정원에서 멀지 않았다.
진남은 그녀와 안부를 전할 사이가 아니었기에 굳이 찾아가지 않았다.
"내일 오 시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 여러 거점들을 돌아보자."
결정을 내린 진남은 정원에 분신을 남겨두고 몰래 성주부를 떠났다.
능황천존 등은 청궁의 하현경천 중간에 아홉 개의 거점을 만들었고 깊숙한 곳에 세 개의 거점을 만들어 도합 열두 개의 거점이 있었다.
"거점들은 이미 발각됐을 수도 있다. 줄곧 손을 쓰지 않은 것은 우리를 일망타진하기 위해서일 거다……"
진남은 한 거점에 도착하여 자세히 살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진남은 능황천존 등에게 신념을 전하고 깊은 곳으로 갔다.
열두 개의 거점들은 반드시 다 없애야 했다.
하나도 쓸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새로운 거점을 개척해야 했다.
"응?"
진남은 마음속에서 희미한 설렘을 느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자세히 느껴보던 진남은 깜짝 놀랐다.
"드러내거라!"
진남은 외쳤다.
흐릿하고 커다란 형상이 그의 등 뒤에 떠 올라 엄청난 전의를 뿜었다.
방금 느낀 설렘은 전신의 혼이 그에게 전한 것이었다.
진남은 주경 경지로 진급한 후로 전신의 혼을 거의 사용한 적이 없었다.
전신의 혼의 힘이 이제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진남은 강해졌다.
때문에, 전신의 혼을 드러내도 의미가 없었다.
'전신의 혼이 왜 갑자기 이상 행동을 한 거지?'
"기억났어. 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계근자와 함께 청궁에 왔을 때였어……."
진남의 두 눈에 빛이 스쳤다.
드디어 생각이 났다.
상고시대에서 전신 항존은 주선제오인이었고 주경 일인자였다.
전신은 다른 주선과 마찬가지로 주선의 비밀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주선들과 달리 가장 특별한 주선이었다.
전신의 혼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인 것은 '특별함'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 천존으로 진급을 하면 주선신비에 다녀올 수 있겠구나."
진남은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진남은 금동소녀 맹리아의 이상한 죽음에 좌현노인이 크게 관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남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깊은 곳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날이 밝을 때쯤 진남은 두 개의 은밀한 곳을 찾아 여러 개의 강한 대진을 배치했다.
중현경천으로 통하는 길까지 만들고서야 진남은 다시 성주부로 돌아왔다.
* * *
오 시가 되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진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주부 제자들의 안내를 받아 진남 등 무인들은 한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 가운데에는 향로를 놓았는데 진귀한 향료가 타고 있었다.
향로에서 풍기는 향을 맡으니 몸이 가벼워지고 정신이 맑아졌다.'
대전에는 신목으로 만든 탁자들이 있었다.
탁자에는 다섯 명이 앉을 수 있게 만들었는데 붐비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탁자 옆에는 아름다운 여 제자들이 다반(茶盤)을 들고 있었다.
다반 위에는 붉은색 비단이 깔려 있고 고급 선옥을 조각해 만든 금테를 두른 찻주전자와 찻잔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이 모습은 무겁고 대범한 분위기에 찬란한 빛이 되어 그리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전의 앞쪽 상석에 세 사람이 앉아있었다.
왼쪽에는 옥묘도인이 앉고 오른쪽에는 육소명이 앉았으며 가운데 자리에는 육경음이 앉았다.
진남은 육경음을 만난 지 고작 이 년이 좀 더 지났지만 꽤나 오랫동안 못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남은 육경음에게 엄청난 변화가 생긴 것을 발견했다.
육경음은 몸에 딱 붙는 흰색 긴 치마를 입어 몸매를 부각시켰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얹고 귀밑머리 몇 가닥을 남겼다.
가슴에 단 금색 불상은 그녀의 새하얀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
그녀는 전보다 더 아름다워졌고 차갑지 않았으며 단아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도우들,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와줘서 고마워요."
육경음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청아했고 부드러웠다.
"도우들, 우선 자리에 앉으세요. 선령족에서 새로 만든 운죽선차(雲竹仙茶)를 준비했는데 한번 드셔 보세요."
묘문 문주의 아들 염무쌍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역시 경음이가 나를 잘 아는구나. 내가 진작부터 운죽선차를 마시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있었구나."
그는 가장 앞에 있는 탁자로 가서 자리를 잡고 거리낌 없이 육경음의 몸을 훑어보았다.
다른 주재 강자들은 염무쌍의 행동에 불쾌함을 느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육경음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탁자 옆에 각자 자리를 잡았다.
탁자들에는 이름이 적혀있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주재들이 앞자리에 앉고 그다음에 주경정상, 주경대성 순으로 자리를 잡았다.
진남은 일부러 세 번째 줄에 있는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대기하고 있던 여제자들이 다구를 내려놓고 차를 내렸다.
대전 안은 향이 더 짙어졌다.
운죽선차는 아주 신비했다.
차를 내릴 때 생긴 뜨거운 김이 흩어지지 않고 대전에서 흘러 다녀 사람들은 구름 위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