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죄송하지만, 싫습니다
대전 중앙에 왕좌가 있었다.
왕좌에는 중년 사내가 앉아있었다. 사내는 눈매가 예리하고 몸이 허약하고 흰색을 띠고 있었다. 안개처럼 위에 떠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수많은 강자들은 거의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이, 이건 선제잖아?'
'설마 선제의 영혼인가?'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선제의 영혼이 아직도 세상에 존재하다니?'
소일백호와 적풍운은 모든 의문이 사라지고 큰 감동이 밀려왔다.
'진짜구나. 진짜 그렇구나!'
"내가 분천고국을 세웠다!"
선제의 영혼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우레처럼 사방에 울려 퍼졌다.
"나는 육신을 한데 뭉쳐 조각상을 만들어 나라의 운명을 눌렀다. 위급한 순간에 내가 세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선제의 영혼이 직접 말하니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도인을 청해 운명을 알아본 적 있다. 우리나라는 천 년 후에는 인재가 없을 거라고 했다."
선제 영혼의 얼굴에 간절함이 드러났다.
"그 말에 나는 무상의 비법으로 나의 영혼을 주인 없는 무혼으로 승화시켰다. 만약 인재가 무혼을 버리고 나를 흡수하면 그는 지급 십품 무혼의 존재가 된다."
그 말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리친 것 같았다.
사람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드러났다.
'이것이 바로 지보구나!'
'선제는 비법을 써 자신의 영혼을 주인 없는 무혼으로 만들었구나!'
'흡수하면 지급 십품이 될 수 있다니!'
'지급 십품 무혼은 얼마나 대단할까?'
'상역 동주 전체에서도 아마 손으로 셀 수 있을 것이다.'
'창람혼한에 따르면 지급 팔품 무혼은 기껏해야 반보 무조밖에 될 수 없다. 지급 구품 무혼이라야 무조에 오를 희망이 있다. 만약 지급 십품 무혼이라면 중도에 죽지 않고 또 살해되지 않는 한 이번 생에 틀림없이 무조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사대 세력 중 한 명이라도 무조를 이루면 평형이 깨질 것이다. 무조에 오르면 동주 목 부와 같은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벽화와 임풍소는 소일백호와 적풍운이 왜 이런 계획을 세운 건지 이해가 되었다.
선제의 혼을 얻으면 나중에 무조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선제의 영혼이다……."
소일백호의 가늘게 뜬 눈에 사나운 빛이 반짝거렸다.
단청의 무혼이 강해질 줄 예상치 못했지만 모든 건 이미 준비를 마쳤다.
"너희 둘은 모두 지급 팔품 무혼을 갖고 있구나."
선제의 영혼은 눈을 내리뜨고 진남과 적풍운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나는 첫 번째 관문에서 인연을 본다고 했다. 능력을 모두 드러내거라."
그의 말에 모든 강자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의 눈길이 적풍운과 진남에게 쏠렸다.
'누구든지 선제의 영혼을 얻으면 그 사람의 미래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주벽화, 임풍소, 왕노, 삼황자, 제 일 제후 그리고 봉황영과 현무영과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긴장되었다.
그들은 단청에게밖에 기대할 수 없었다.
만약 단청이 선제의 혼을 얻는다면 그들은 미래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었다. 만약 적풍운이 선제의 혼을 얻으면 의심할 바 없이 봉황영과 현무영은 폐허가 될 것이었다.
하늘 위의 혈익봉황과 진국현무도 선제가 몇천 년 전에 육신을 조각으로 만들고, 영혼을 무혼으로 만들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진남의 눈에 짙은 실망감이 드러난 걸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기껏 애를 썼는데…… 지보가 무혼이라고?'
진남은 무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전신의 혼이 있기에 미래는 가늠할 수 없었다. 선제의 혼이 지급 십품이라 한들 전신의 혼과 비교가 될 수 없었다.
"선제! 적풍운입니다!"
이때 적풍운이 성큼 나서며 뜨거운 눈길로 말했다.
"지금 고국이 쇠퇴하였습니다. 저는 중임을 떠메고 분천고국을 더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선제와 인연이 있었습니다. 지금 보여드리겠습니다."
휙!
적풍운이 손을 휘젓자 법왕 열쇠가 떠올랐다.
선제의 영혼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법왕 열쇠는 그의 유물이었다.
"이건 선제께서 보셨던 상소문입니다. 저는 밤낮으로 보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적풍운은 저장 주머니에서 태고의 상소문을 꺼냈다. 상소문은 모두 잘 보관되어 있었다. 오래되었지만 겉면은 새것 같고 티끌 하나 묻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적풍운이 상소문까지 찾았을 줄 생각지 못했다.
그들은 적풍운이 진짜 상소문을 공부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적풍운이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했다.
'선제의 혼의 비밀을 알고 있었나?'
주벽화 등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불안했다.
"저는 공법도 수련했습니다."
적풍운은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그의 몸에서 기운이 솟아오르더니 등 뒤에서 세 개의 달이 떠올라 끝없는 빛을 뿜었다.
'삼월고술(三月古術)! 예전 선제의 공법이다!'
주벽화 등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선제의 공법은 오래전에 유실되었다. 적풍운은 엄청 애를 써 찾았을 것이다. 저들은 진작에 선제의 혼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이 모든 건 미리 준비된 것이구나.'
"또한, 저는 우연한 기회에 예전에 선제께서 남기신 정혈을 연화했습니다."
적풍운이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그의 몸이 빠르게 부풀어 오르더니, 한 장 정도 커지고 멈췄다. 모공에서 기운이 뿜어 나왔다.
그에게서 뿜어 나온 기운은 선제의 기운과 똑같았다.
"이건……."
강자들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선제의 피! 적풍운이 선제의 피를 삼키고 선제와 똑같은 기운을 풍기다니!'
'선제는 세상을 뜬 지 천 년이나 되었다. 그의 정혈을 얻는다는 건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적풍운과 소일백호가 선제의 영혼을 얻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른 것인가.'
주벽화와 임풍소 등도 숨이 막혔다.
분천황제도 주먹을 꽉 쥐었다.
"좋다, 좋아, 아주 좋다."
선제의 영혼은 연속 세 번이나 좋다고 칭찬했다.
"네가 적풍운이냐? 상소문을 읽고, 법왕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며, 삼 개월 동안 고술을 연습하고 나의 정혈을 한 방울 연화했구나! 네 인생은 대부분이 나와 연관 있다. 인연이란 참 신기하구나!"
적풍운은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선제의 말은 뜻이 분명했다.
결국 선제 무혼은 적풍운을 선택할 것이다.
백옥의자에 앉은 소일백호도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상소문, 고술, 열쇠, 정혈은 모두 소일백호의 손을 거친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고 많은 대가를 치렀으며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이번 일이 성사되고 안 되고는 오늘에 달렸다. 적풍운은 선제 무혼을 얻으면 지급 십품 무혼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그럼 나도…….'
소일백호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저도 몰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선제의 영혼이 말투를 바꾸었다.
"너희 둘은 무예를 겨뤄야 한다. 모든 것을 다 펼쳐 보이거라. 보고나서 결정하겠다."
선제의 말이 끝나자 적풍운은 진남을 바라보았다.
"단청, 네가 팔급 무혼을 가진들 무슨 소용 있느냐? 오늘의 승자는 나다! 내가 선제 무혼을 받으면 너를 어떻게 괴롭힐지 두고 봐라."
적풍운은 두 눈에 경멸과 살기를 드러냈다.
성진각에서 당한 굴욕을 그는 평생 잊을 수 없었다.
진남은 적풍운의 시선을 느끼자 어이가 없었다. 그는 선제 무혼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때, 마신포가 휘날리더니 울음소리를 냈다. 무언가 부르는 것 같았다.
"마신포?"
선제는 살짝 놀랐다.
"네가 마신포를 얻었구나. 훌륭하다. 지급 팔품 무혼에 이 정도 무예 재능이 있다니 참 훌륭하구나!"
적풍운은 어안이 벙벙했다.
다른 강자들도 어안이 벙벙했다.
'마신포가 뭐지?'
"예전에 나는 마신포를 황금 방의 일곱 번째 층에 두었다. 지급 무혼 구품 이상은 되는 천재라야 마신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구나! 분천고국에 너 같은 천재가 나타나다니."
선제는 흐뭇한 표정으로 감탄했다.
'황금 방 일곱 번째 층?'
'마신포?'
강자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 뭔가 생각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청이 황금 방 일곱 번째 층에 갔다는 말인가? 농담이지?'
특히 소일백호와 적풍운은 충격을 받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단청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게다가 선제의 태도도 이상해.'
주벽화와 임풍소를 비롯한 봉황영과 현무영 강자들은 심신에 충격을 받았지만, 곧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허공에 있던 혈익봉황과 진국현무는 그 모습에 비법을 움직여 선제 영혼에게 신념을 전했다.
선제 영혼은 표정이 달라졌다.
'앞에 있는 청년이 혈익봉황과 진국현무를 부활시켰다고?'
"대단하다. 훌륭한 실력이구나! 분천고국에 너 같은 인재가 나타나다니!"
선제의 영혼은 기쁜 표정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일백호와 적풍운은 얼떨떨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황금 방 일곱 번째 층에 들어갔다고 해도 선제의 영혼이 저런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잖아?'
주벽화 일행은 그 광경을 보자 얼굴이 활짝 피었다. 선제의 영혼이 기뻐할수록 단청이 반전을 일으킬 희망이 더 컸다.
"선제……."
적풍운은 놀라서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선제는 진남을 바라보며 눈에 정광이 반짝이며 외쳤다.
"단청이라고 했지? 짐은 선제의 이름으로 이 영혼을 너에게 전수하고 네 무혼이 되겠다. 너는 강해진 후 분천고국을 수호해야 한다. 이를 어길 시 내 무혼은 스스로 소멸될 것이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받아들일 수 있느냐?'란 말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았다.
강자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다.
특히 소일백호와 적풍운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가 이렇게 많은 준비를 했는데 선제의 영혼이 단청을 선택하다니? 설마 고작 황금 방 때문이야?'
둘은 진국현무와 혈익봉황을 부활시킨 근원의 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선제는 그 의미를 잘 알았다.
게다가 단청의 무혼이 지급 십품이 되고 근원의 힘까지 합쳐지면 분천고국은 얼마나 강해질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제의 영혼은 단청을 선택했다.
주벽화 일행은 선제의 말을 듣자 기쁨이 마음속에서 솟아올랐다.
'단청! 단청을 선택했어!'
그들은 이런 상황에 단청이 상황을 역전시킬 줄 몰랐다.
허공 속에서 혈익봉황과 진국현무가 서로 마주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소일백호가 수작을 부려도 이번 싸움은 그들이 이길 게 분명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이상함을 감지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 진남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강자들은 당황했다.
'이렇게 좋은 기우를 눈앞에 두고 왜 아무 반응이 없는 거지? 설마 겁먹었나?'
선제의 영혼조차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왜? 분천고국을 수호할 수 없느냐?"
"아닙니다."
진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싫다는 거냐?"
선제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진남은 미안한 표정으로 주벽화 일행을 바라보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싫습니다."
짧은 한마디는 마치 하늘에서 천둥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