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평생 후회하게 될 테니
연못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연못은 온통 얼음 수정으로 뒤덮여 눈부신 빛을 뿜었다.
얼음 수정 위에 분홍색의 꽃이 자라고 있었는데 투명하고 거대한 영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진남이 정신을 가다듬고 살펴보니 묘묘 공주의 말처럼 마침 여든 그루의 천정화였다. 더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어디서 얻어온 지도길래 이리도 정확한지."
진남이 혼잣말을 했다. 그는 천정화를 뜯으려고 했다.
그때 석굴 밖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진남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필 이때 사람이 올 줄은 몰랐다. 그는 얼른 천정화를 전부 뜯고 석굴 밖으로 향했다.
* * *
같은 시각, 석굴 밖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있었다.
다섯 여인은 모두 청색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인은 등에 고검을 메고 있었는데 미색이 다른 네 명보다 더 훌륭했다. 그녀의 얼굴은 오만했는데 고귀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진남이 석굴 문 앞에 도착하자 다섯 여인 중 우두머리가 입을 열었다.
"귀하는 어느 종문 소속인가요?"
진남은 그녀를 훑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때, 기쁜 목소리가 울렸다.
"오라버니, 당신이었군요! 이렇게 빨리 또 만났네요!"
진남은 청색 긴 치마를 입은 소녀를 보았다. 그는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청색 긴 치마를 입은 소녀는 놀라고 기뻐서 얼굴에 홍조를 띠며 말했다.
"오라버니, 이름이 뭐예요? 저는 진설아(陳雪兒)예요. 설아라고 부르면 돼요. 오라버니에게 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는걸요."
진설아는 종종걸음으로 진남에게 다가갔다.
다섯 여인들 중 우두머리인 여인의 안색이 변하더니 진설아를 막으며 꾸짖었다.
"설아, 가면 안 된다!"
진설아는 멈칫하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왕 사저, 왜요? 제가 방금 말했잖아요. 이 오라버니는 저를 구해줬다고요. 이분이 없었더라면 저는 이미 시체가 되었을 거예요."
왕 사저라 불린 여인은 진설아를 노려보더니 차가운 시선으로 진남에게 물었다.
"설아에게 접근한 목적이 뭐냐?"
진남은 어이없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진설아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왕 사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진설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왕씨 성을 가진 거만한 여인은 여전히 냉담한 시선으로 진남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설아를 속일 수 있지만 나는 속이지 못한다. 방금 그 요수는 네가 쫓아낸 거냐? 그 요수는 선천 경지 삼 단계의 실력이더군. 너는 반보 선천 경지에 보아하니 태고 무수를 수련한 것 같구나. 그렇다고 한들 나, 왕약림(王若琳)은 네가 두렵지 않다. 그러니 솔직하게 말하거라."
진남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전신의 눈을 굴려 왕약림을 살폈다.
'황급 구품의 무혼, 반보 선천 경지, 인기합일 원만 경지 이런 실력이면 초월급 천재겠군. 다른 삼대 종문에서 왔을 테지. 이런 실력이니 오만하지.'
진남은 속으로 중얼거리더니 표정이 냉담해졌다.
'하지만 그 정도로 감히 나를 만만하게 보고 모함을 하다니?'
진남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말했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 경지로 설아에게 의도가 있어서 접근했다는 생각은 안 할 거요. 게다가 내가 설아를 구해줬는데 사저라는 사람이 감사하기는커녕 모함을 하다니, 대체 무슨 의도요?"
진남은 일부러 마지막 말에 억양을 높여서 호되게 왕약림을 질타했다.
그 말에 다른 세 명의 청여종 제자들의 고운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겁을 상실했구나, 감히 왕 사저를 욕하다니!"
"살기 싫은 모양이구나. 이분께서는 청여종의 왕약림 사저이시다."
"흥, 이상한 마음을 품은 게 분명해!"
"......"
세 여인뿐만 아니라 왕약림도 화가 났다.
청여종에서 그녀는 외문 제일 천재였다. 게다가 내문 대장로의 제자이자 앞날이 창창한 그녀라서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다.
진남은 세 여인의 화를 내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담담한 시선으로 화가 난 왕약림을 쳐다보며 또 말했다.
"당신은 내게 있는 천정화를 가지고 싶은 거 아니오? 있지도 않은 죄명까지 씌울 필요 있소?"
여인들은 놀랐다.
그녀들이 여기로 온 목적은 천정화였다. 그런데 진남을 만나서 그 일을 까맣게 잊은 것이었다.
진설아는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녀도 다소 화가 난 듯 말했다.
"오라버니, 함부로 말하면 안 돼요! 사저도 제가 걱정되어서……"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왕약림은 진남을 향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똑똑한 사람인 것 같구나. 맞아. 내 목적은 천정화다. 내가 왜 온 지 알았으면 눈치껏 천정화를 전부 내놓거라. 아니면 평생 후회하게 될 테니."
진설아는 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왕약림이 자신의 안전을 생각해서 진남을 의심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설아는 왕약림이 천정화를 위해서 그렇게 행동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저, 어떻게……"
진설아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휘청거렸다.
조금 전까지 화를 내던 청여종의 세 여인도 할 말을 잃었다.
그녀들은 왕약림의 이런 행동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약림의 재능, 배경 때문에 세 여인 모두 침묵했다. 그리고 얌전히 왕약림의 뒤에 서 있었다.
무도의 세계는 잔인했다. 실력이 모두인 세계였다.
"하하하!"
진남이 크게 웃었다. 그는 조롱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평생 후회하게 될 거라고?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한번 봅시다."
말을 마친 진남의 표정이 갑자기 차가워지고 두 눈이 날카로워졌다.
진남은 성큼 한 걸음 내딛더니 선천 경지 일 단계의 기세를 펼쳐 왕약림을 눌렀다.
왕약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반보 선천 경지였다. 선천 경지 일 단계의 기세에 눌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선천 경지 일 단계냐? 나는 청여종 외문 제일 제자다. 사부는 청여종 내문 대장로다. 오늘 만약 내 심기를 건드린다면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없을 거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면 얼른 천정화를 내놓거라. 그럼 나도 더 이상 따지지 않으마."
왕약림의 굳은 얼굴에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더욱 거만하게 말하며 진남을 압박했다.
진남은 살짝 놀랐다. 그는 왕약림이 이 상황에서도 자신을 위협할 줄 몰랐다.
"따지지 않겠다니? 어떤 결과를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지 오늘 확인하고 싶은데……?"
진남은 무표정으로 또 한 걸음 내디뎠다. 방대한 힘이 날카로운 도의와 함께 그의 몸에서 소용돌이쳤다.
숲 전체의 온도가 낮아지고 추워졌다.
다섯 여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왕약림의 두 눈에 경악한 기색이 가득해서 저도 몰래 내뱉었다.
"소성 입미지경? 네가 소성 입미지경을 장악했다고?"
다른 여인들의 눈에도 경악한 기색이 떠올랐다.
무도의 세계에서 한 개 단계를 승급한다는 것은 힘이 천지개벽할 만한 변화가 생겼다는 소리였다.
왕약림은 황급 구품의 천재이지만 그녀도 인기 합일 원만 경지일 뿐이었다. 소성 입미지경을 돌파하려면 적어도 한 해가 걸렸다.
'눈앞에 있는 자가 소성 입미지경을 돌파했다니? 초월급 천재인 건가?'
왕약림의 두 눈에 당황한 기색이 드러났다.
도의의 위압을 받은 그녀는 온몸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얼음에 봉인을 당한 것처럼 움직일 수도 없었다.
"다시 묻겠소, 어떻게 평생 후회하게 만들 거요?"
진남은 시선에 살기가 가득했다. 그의 등 뒤에 있는 일곱 개의 고도가 동시에 웅웅 진동하면서 도의를 부단히 방출했다.
끊임없는 살기가 숲에 가득 차서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진남은 살신이라도 된 것 같았다.
왕약림은 안색이 변하더니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그녀는 살기를 느끼고 죽음의 기운을 느꼈다. 그 기운에 그녀는 두려움에 떨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다음 순간에 진남이 자신을 죽일 것 같았다.
"나, 나는……"
왕약림은 작은 입을 달싹거렸다. 좀 전의 오만한 기세는 사라지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진남은 그녀의 모습에 차갑게 웃으며 기세를 거둬들였다.
"고작 당신 따위가 나에게 평생 후회하게 될 거라는 말을 할 자격은 없소."
말을 마친 진남은 성큼성큼 숲속으로 사라졌다.
다섯 여인은 멀어져 가는 진남의 뒷모습을 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사저……"
진설아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왕약림을 바라보았다.
왕약림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름다운 두 눈에 강렬한 원망을 풍기며 날카롭게 고함을 질렀다.
"진설아, 저 자식이 누구야? 나를 상대하려고 네가 찾아온 사람이지? 천한 것, 마음이 악독하구나. 이 사저가 오늘 단단히 혼내줄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왕약림은 진설아의 뺨을 때렸다.
진남에게 받은 치욕을 전부 진설아에게 화풀이했다.
진설아는 멍해졌다. 그녀는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저가 나를 때렸어? 내가 잘 아는 왕 사저 맞아?'
이때, 슉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고목 나뭇가지가 허공을 가로질러 바닥에 꽂혔다. 나뭇가지 속에서 놀라운 도의가 순식간에 폭발했다.
"이건……!"
왕약림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높이 치켜든 손을 내릴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진남은 왕약림 같은 여인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청여종 제자가 아니었다면 진남은 망설이지 않고 죽였을 것이다.
* * *
진남이 현령종의 휴식처에 돌아왔을 때 묘묘 공주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황용 등 네 사람은 폐관수련 중이었다.
"무연각이 열리려면 아직 사흘이 남았어. 사흘 동안 나도 경지를 공고히 해야겠어."
진남은 방 안에 들어가서 가부좌를 틀고 수련할 준비를 했다.
그때 쿵 하는 큰 울림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이건……"
진남의 안색이 변하더니 벌떡 일어나서 방에서 나갔다.
밖에는 장태억과 황용 등 사람들도 소리를 듣고 나와 있었는데 다들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쿵! 쿵! 쿵!
묵직한 폭발음이 계속 울렸다. 마치 창공에서 태고의 뇌정이 폭발하며 추산을 뒤덮은 것 같았다.
추산의 산봉우리에서 두 갈래의 방대한 힘이 서로 부딪히며 오색찬란한 빛을 튕겼다. 수많은 뇌운들이 움직이고 태고 요수들의 울부짖음도 들리는 것 같았다.
이상한 현상들이 속출하고 하늘 땅이 울렸다.
진남은 그 모습에 놀랐다. 대체 어떤 힘이 이렇게 엄청난 충격을 일으키는 걸까?
진남뿐만 아니라 추산의 수많은 무인들도 깜짝 놀랐다.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고개를 들고 추산의 봉우리 정상에서 두 갈래의 강대한 힘이 부딪히는 걸 지켜봤다.
장태억은 한참을 쳐다보다가 정신이 들었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종 경지의 강자 두 명이 추산 산봉우리 정상에서 싸우는 모양이다."
황용 등 네 사람은 그 말에 놀라서 동시에 진남을 쳐다보았다.
모두들 알고 있었다. 진남의 곁에 여자애가 있는데 그 아이가 무종 경지의 강자였다.
"산봉우리에 있는 두 무종 경지 강자 중 한 명은 묘묘 공주겠구나. 내가 알고 있는 그녀라면 아마 추산의 어떤 보물을 빼앗으려고 무종 경지의 강자와 싸우는 걸 거야."
진남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더 생각하지 않고 다시 들어가서 폐관 수련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