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반드시 은혜를 갚을게요
"진남, 내가 널 구해줬는데 절반을 달라고? 흥, 그때 내가 나서서 구하지 않았다면 너는 당장에 그…, 누구더라……? 아무튼 그놈에게 맞아 병신이 되었을 거다. 난 네가 의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넌 결국……"
"그만, 그만, 알았어."
진남은 할 말을 잃었다.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서 표정이 우울했다.
묘묘 공주가 그를 구해줄 때 무척 감동했다. 하지만 이제와서 목숨을 구한 걸 가지고 트집을 잡을 줄은 몰랐다.
"좋아. 갈게."
진남은 이를 악물고 지도를 받았다.
묘묘 공주가 그를 구해준 건 사실이었고 빚을 진 거나 다름없었다. 진남은 우울했다. 하지만 그는 은혜와 원한이 분명한 사람이기에 갈 수밖에 없었다.
"맞다, 혈계 때문에 서로 백 리 이상 떨어지면 안 되잖아. 내가 천정화를 가지러 갈 때 너는 뭐해? 그리고 왜 네가 직접 안 가?"
진남은 갑자기 의문이 떠올라 물었다.
묘묘 공주는 구름까지 높게 솟은 추산을 바라보았다.
"다 계획이 있다."
진남은 묘묘 공주의 행적을 계속 캐묻기 귀찮았다. 묘묘 공주는 비밀이 가득해서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혈계 제한에 대해서는 그녀가 무슨 수를 찾아놨을 것이었다.
진남은 지도를 들고 혼자 산봉우리를 떠나 추산에 들어갔다.
* * *
추산에는 무척 크게 자라는 나무가 있는데 잎이 무성해서 몸을 숨기기 적합했다.
진남은 기운을 숨기고 백현팔보를 사용해 지도에 표시된 곳으로 전진했다.
"지도대로라면 천정화는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대략 이십 리만 더 가면……"
진남이 혼잣말을 하더니 주변을 살피며 소리를 죽였다.
가는 길에 진남은 세 무리의 무인들을 만났다. 이 무인들은 서로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추산에서 요수들을 죽이기도 하고 무언가를 찾기도 했다.
무인들은 대게 경지가 쉬체 경지 십 단계였다.
"이제 오 리 남았어."
진남은 멈춰 서서 지도를 펼쳤다. 그의 눈에 흥분한 기색이 스쳤다.
진남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지만 무왕단 팔만 알이라는 숫자에 침착할 수 없었다.
이때, 앞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들어보니 수사들끼리 서로 싸우는 것 같았다.
추산에는 무인들이 많아서 영약, 보물 등을 놓고 서로 싸우고 다투는 일이 흔했다.
"가보자."
진남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청색의 긴 치마를 입은 소녀가 있었는데 차림새가 남루해서 흰 피부가 밖에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녀 앞에는 세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있었다. 세 사내는 살기등등했는데 모두 선천 경지 일 단계는 넘었다.
"구해달라고? 이 추산에서 누가 너를 구하러 올까."
세 사내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했다.
"꼬마 아가씨, 네가 비록 청여종(青女宗)의 사람이긴 하지만 오늘 추산 삼살(三煞)을 만났으니 재수가 없다고 생각해라. 고분고분하게 영약을 내놓고 우리 셋을 잘 모신다면 목숨은 살려주마."
청색 긴 치마를 입은 소녀는 눈에 분노가 가득 차서 외쳤다.
"너희들은 염치없는 게 짐승보다 못하구나! 좋은 마음에 도와줬더니 오히려 나를 해하려고 하다니! 자살하는 한이 있어도 너희들에게 더럽혀지지 않을 거야!"
"흐흐, 추산에 오른 무인들 중 좋은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으냐? 탓하려면 너무 순진한 네 탓이다. 그리고 네가 자살하게 그냥 둘 것 같으냐? "
세 사내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기세를 폭발시켜 세 마리의 흉악한 호랑이처럼 소녀를 덮쳤다.
청색 긴 치마를 입은 소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녀는 청여종의 제자이긴 했지만 반보 선천 경지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의 무혼 등급이 강대하기는 했지만 선천 경지 일 단계의 사내 셋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소녀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내 무덤인가?'
숨어서 상황을 살피던 진남은 주저 없이 크게 한 걸음 디디며 나섰다.
낙하왕국에는 청여종, 현령종, 난염문(亂焰門), 비검문(飛劍門), 이렇게 사대 종문이 있었다. 그 중 현령종과 비검문은 사이가 나빴다. 난염문과는 보통의 사이였다. 유독 청여종과 왕래가 많고 사이도 좋았다.
소문에 의하면 현령종의 종주와 청여종의 종주가 청매죽마(青梅竹馬, 남녀 소꿉친구,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사랑을 키우는 사이)이고 인연이 어긋나지만 않았더라면 부부가 됐을 거라고 했다.
게다가 진남은 세 사내가 한 여인을 괴롭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나서서 도와주려고 했다.
진남이 숲에서 나오더니 싸늘하게 호통쳤다.
"그만 멈추거라!"
갑자기 나타난 진남에 세 사내와 청색 긴 치마를 입은 여인 모두 깜짝 놀랐다.
청색 긴 치마를 입은 여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나타난 진남을 한번 쳐다보더니 기쁜 기색이 사라지고 다시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 사내도 진남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진남의 경지를 느끼고 실소했다.
'고작 반보 선천 경지의 수행이구나!'
청색 긴 치마를 입은 소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방금 생겨난 희망이 모두 사라지고 두 눈은 생기를 잃었다.
"호의는 고마워요. 하지만 당신은 이들 세 사람의 상대가 못 되니 얼른 가세요. 여기를 떠나면 제 소식을 청여종에 알리고 사저에게 제 복수를 꼭 해달라고 전해줘요."
그녀의 말에 세 사내의 표정이 변했다.
오늘 일이 밖에 전해지면 청여종은 그들에게 반드시 복수할 것이었다.
세 사내의 살기가 진남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독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천당 같은 길을 두고 하필 지옥문에 스스로 발을 들였구나. 죽으러 온 거 같으니 네 소원을 이뤄주……"
그 사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줄기 칼 빛이 스쳐 지났다.
사람들이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다만 문득 나타난 칼 빛이 이상하리만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정신을 차려보니 방금 말을 하던 사내가 칼을 맞고 죽어 있었다.
청색 긴 치마의 소녀는 깜짝 놀랐다. 다른 두 사내도 놀랐다.
'반보 선천 경지가 단칼에 선천 경지 일 단계를 죽이다니!'
"너……"
다른 두 사내가 동시에 머리를 들고 진남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놀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꺼져!"
진남은 두 사람을 쳐다보며 호통쳤다.
두 사내는 호통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미친 듯이 도망을 쳤다.
그들은 진남에게서 죽음의 기운을 느끼고 덜컥 겁이 났다. 계속 머무른다면 죽을 게 분명했다.
청색 긴 치마의 여인은 돌아가는 상황을 그저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그 강대하던 추산 삼살이 짧은 시간에 죽고 흩어지자 놀라서 말이 안 나왔다.
"저……"
청색 긴 치마를 입은 소녀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오늘 오라버니가 없었더라면, 저는 아마……"
진남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숲속으로 사라졌다.
청색 긴 치마를 입은 소녀는 당황했다. 그녀는 진남이 이렇게 빨리 사라질 줄 몰랐다.
"오라버니!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이 은혜를 갚을게요!"
* * *
반 주 향의 시간이 지난 후 진남은 드디어 지도에 표시된 곳에 도착했다.
작은 산봉우리에 석굴이 있었는데 석굴은 높이 이십 척에 넓이 십삼 척 좌우였다. 석굴은 마치 통풍구가 있는지 바람이 돌 틈을 지날 때마다 웅웅 소리가 났다.
"음? 이 석굴에 요수가 있구나. 기세가 선천 경지 삼 단계네? 초급 요수들 중에선 최고라 할 수 있겠어"
진남은 눈빛을 반짝거리더니 고민하지 않고 석굴로 들어갔다.
진남은 태고 무수이고 반보 선천 경지였지만 체내의 진기 농도는 선천 지경 일 단계였다. 초급 요수를 만나도 싸워볼 만했다.
때문에 진남은 석굴에 있는 요수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진남이 석굴을 삼십 척 정도 들어가자 요수가 울부짖는 소리가 맹렬하게 울려 퍼졌다.
석굴에서 깨어난 거대한 몸집이 시뻘겋고 커다란 두 눈으로 진남을 죽어라 노려봤다. 벌렁거리는 콧구멍에서는 두 갈래 열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진남의 머리를 헝클었다.
석굴에서 들리던 바람 소리는 요수가 숨 쉬는 소리였다.
진남의 시선이 날카로워지더니 망설임 없이 등 뒤에 있던 오만 고도를 꺼내 베었다.
소성 입미지경이 폭발하니 도의가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거수는 눈앞의 작디작은 인간이 공격을 날리자 더없이 화가 났다. 거수는 손바닥을 들더니 진남을 그대로 내리쳤다.
쾅쾅쾅!
무수한 폭발음이 석굴에서 울려 퍼졌다.
진남은 오만 고도를 들고 백현팔보를 디디며 도의를 폭발시켰다. 거수와 끊임없이 엉키고 폭발음이 연속 들렸다.
싸움이 계속되자 진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거대한 요수는 체형만 방대할 뿐만 아니라 선천 경지 삼 단계였다. 온몸에는 두꺼운 인갑(鱗甲)으로 덮여 있었는데 소성 입미지경의 도의라도 쉽게 베어낼 수가 없었다.
오만 고도와 소성 입미지경에만 의지한다면 진남은 요수의 상대가 아니었다.
"안돼, 이렇게 싸우다가는 언제 죽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해."
진남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취천일격을 사용한다면 요수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취천일격을 사용하면 자신도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진남은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취천일격을 펼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 참, 전신의 눈은 천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지. 그걸 이용해서 저놈의 약점을 알아내야겠어."
진남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 전신의 눈을 움직여 거수를 살폈다.
그의 추측대로 전신의 눈이 거수의 약점을 전부 드러냈다.
요수의 약점은 목덜미에 있는 비늘이었다.
그 비늘은 다른 비늘과 달리 약간 넓었는데 그 위에는 현묘한 무늬가 가득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었다.
"전신의 혼, 나와라! 경천일도, 경천일격!"
진남이 고함을 질렀다.
그의 등 뒤에서 열 갈래의 노란 빛이 번쩍이더니 전신의 혼이 우뚝 솟아 무한한 위압을 방출했다.
소성 입지지경이 운행하자 도의가 날름거렸다.
진남의 체내 진기가 끊임없이 용솟음쳐 오만 고도에 스며들었다.
진남은 전력으로 일격을 가했다.
쿵쿵!
커다란 천둥소리가 들리고 칼 빛이 쏟아져 어두컴컴하던 석굴을 새하얗게 비췄다.
어둠 속에 있던 거수는 빛을 받아 본 모습을 드러냈다. 시뻘건 두 눈이 순간 당황했다.
거수가 발악하더니 무서운 속도로 석굴 벽에 부딪혔다. 석굴이 흔들리면서 수많은 돌멩이가 떨어졌다.
진남은 방대한 거수가 갑자기 저렇게 빠른 속도를 낼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진남의 전력을 담은 일격이 거수의 인갑에 부딪혔다.
쿵!
거수는 칼을 맞고 그대로 뻗었다. 두껍고 무거운 인갑이 부서지면서 살과 피가 뒤엉켰다.
어흥!
거수는 고통스럽게 울부짖더니 다시 무서운 속도로 석굴 벽에 부딪히며 비틀비틀 도망갔다.
진남은 도망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쫓아가지 않고 석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진남이 석굴의 끝에 다다르자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