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무혼의 각성
창람대륙(蒼嵐大陸).
이 거대한 대륙에서 진정한 무인이 되려면 자신의 몸에 있는 무혼을 각성시키는 방법밖에 없었다. 무인은 무혼을 통해 천지와 소통하고 영기를 흡수하며 수행을 했다.
무혼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 형형색색이어서 일일이 다 셀 수가 없었다.
무혼의 등급은 천(天), 지(地), 현(玄), 마지막으로는 황(黃), 이렇게 네 가지로 분류된다. 그리고 한 등급을 다시 십 품으로 나누었다.
무혼의 등급이 높을수록 수련하는 속도와 능력 그리고 잠재력이 더 강했다. 그만큼 미래 강자가 될 가능성도 높은 것이다.
낙하왕국(洛河王國) 임수성(臨水城) 진씨 가문(秦家).
무혼 각성 의식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시커먼 제단 위에는 잘생긴 얼굴에 오만한 표정을 지은 한 제자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 제단의 아래에는 진씨 가문의 제자들과 장로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제단 위에 앉아 있는 제자는 바로 진씨 가문 대장로의 아들인 진장공(秦長空)이었다. 그는 진씨 가문 소주 진남(秦南) 바로 아래 서열의 제자였다.
주변을 둘러싼 제자들 그리고 장로들은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의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시커먼 제단이 움직이더니 여러 가닥의 흰빛들이 뿜어져 나왔다. 여러 가닥의 빛들은 뱀처럼 꿈틀대며 진장공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체내에서 순환하는 빛들의 모습은 외부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어흥!
순간 위풍당당한 맹수의 울음소리가 진장공의 체내에서 울려 퍼졌다.
진장공의 등 뒤로 여러 갈래의 노란빛이 나타났다. 노란빛은 금세 다섯 갈래가 되더니 순간 흉악하고 거대한 백호의 허영으로 변해 하늘로 솟아올랐다. 백수의 왕이 강림한 것처럼 맹렬하고 흉악한 기운이었다.
장로와 제자들은 그 순간 모두 한 줄기 강력한 압박감을 느꼈다.
"이건……!"
의식을 주지하던 장로도 놀라서 쳐다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흥분해서 외쳤다.
"다섯 갈래 노란빛! 다섯 갈래 노란빛이라니! 이건 황급 오품의 무혼이다. 황급 오품의 수(獸) 무혼이다!"
그의 말은 고요한 물에 돌을 던진 것 같았다. 모든 제자와 장로들이 표정이 다채롭게 변해서 웅성거렸다.
"뭐? 황급 오품의 무혼이라고?"
"세상에, 우리 진씨 가문에서 드디어 최고의 천재가 나타났구나!"
"......"
모든 사람이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아무도 이런 결과를 생각하지 못했다.
황급 오품의 무혼은 임수성에서 최고의 천재들에게서만 나타났다. 흔히 보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진장공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사람들은 진장공이 기껏해야 황급 사품 정도의 무혼을 각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진장공도 무척 기쁜 기색이었다. 그도 자신이 황급 오품의 무혼을 각성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자리에 있는 제자들과 장로들이 경악해 하는 시선을 보자 진장공은 저도 몰래 어깨가 으쓱했다. 그는 그들을 훑어보다가 평범하게 생긴 한 제자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은 무척이나 도발적이었다.
그 제자는 진씨 가문의 소주이자 진씨 가문 최고의 천재로 여겨지는 진남이었다.
"됐다. 다음은 진남이 나오거라."
의식을 주지하던 장로가 얼른 알아차리고 외쳤다. 그의 시선은 기대에 가득 찼다.
진장공은 황급 오품의 무혼을 끌어냈다.
그러니 천부적 자질을 가진 진남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져갔다.
두 명의 최고 천재가 있는 진씨 가문의 미래는 무서울 것이 없을 것이다.
주지가 진남의 이름을 부르자 제자와 장로들의 시선이 동시에 평범하게 생긴 청년에게 향했다. 그 시선들 속에 담긴 기대감은 심지어 진장공 때보다 훨씬 강렬했다.
진남은 진씨 가문뿐만 아니라 임수성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진남은 진씨 가문의 가주 아들이었다. 여섯 살에 글을 읽히고, 여덟 살에 글로 임수성에서 유명세를 떨쳤다. 아홉 살에 글을 놓고 무예를 시작했는데, 열 살에 권법을 배우고 열한 살에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았다.
열두 살에는 검술을 연마했고, 열세 살이 되던 해에는 열 가지 무예(武藝)를 익혔다. 열네 살에 벼락을 맞았었는데 어느 한 곳 상한 데가 없었다. 열여섯에는 스스로 검법을 창조했는데 중품의 무예로 인정되어 임수성을 놀라게 했다.
'무왕' 급까지 수련한 강자가 진남에 대해 듣더니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아이가 가진 천부는 일반적이지 않다. 각성한 무혼은 반드시 황급 오품 이상일 것이고 미래의 성과도 절대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무왕의 말이 큰 작용을 발휘하여 무혼을 각성하지도 않은 진남은 이미 임수성의 제일 천재로 봉해졌다.
진남은 검은색의 장포를 입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얬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교만하지도 조급해하지도 않고 제단으로 걸어갔다.
"후, 드디어 오늘이구나……."
진남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심호흡을 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가부좌를 하고 두 눈을 감았다.
제단의 아래에서 이내 가닥가닥 흰빛이 나와 진남의 체내에 스며들었다.
"내 직감인데, 진남 소주가 각성한 무혼은 반드시 평범하지 않을 거야!"
"그래, 진장공 공자도 황급 오품 무혼을 각성했는데 진남 소주의 천부가 그보다 훨씬 높으니 각성한 무혼도 더 높을 거야!"
"흠, 황급 오품보다 높은 무혼은 진씨 가문에서 여태껏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어."
"다들 닥치거라. 진남 소주를 방해하지 말아라. 만약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너희들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
"......"
분위기는 더없이 뜨거웠다. 청년 제자들은 물론 장로들도 입이 마르게 진남을 칭찬하면서 그 결과에 대해서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방금 황급 오품 무혼을 각성해 기뻐하던 진장공은 그 모습들을 바라보니 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흥, 무혼은 하늘이 정해주는 거라고!"
진장공이 차갑게 말했다.
"너희들은 황급 오품 무혼이 다른 것들처럼 각성하고 싶다고 각성하는 줄 알아? 진남 소주가 각성한 무혼이 황급 이품이 될 수도 있어."
그의 말에 주변의 제자들과 장로들은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진장공은 황급 오품의 천재이기 때문이었다.
진장공은 사람들의 경멸스러운 시선을 받자 기분이 상했지만, 마음속은 냉정해졌다. 진남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남달라서 무왕도 감탄했다. 그러니 각성한 무혼이 대단할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까지 생각한 진장공은 제단을 죽어라 노려봤다.
'진남, 반드시 황급 오품보다 낮은 무혼을 각성해야 해. 적어도 황급 오품보다 높은 무혼을 각성해서는 안 돼.'
진장공은 저도 몰래 속으로 저주했다.
이때 제단 위에서 감도는 흰빛이 점점 많아졌다.
제단에 가부좌하고 있던 진남은 흰빛의 세례를 받자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약간 마른 그의 체내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쟁쟁하게 울렸다.
사람들은 일순간 호흡을 멈추었다.
챙!
소리가 진남의 체내에서 울리더니 한 줄기 노란빛이 솟아올랐다. 사람들의 긴장된 시선 속에서 그 노란빛은 솟아오르다가 멈추었다. 이내 온통 불에 휩싸인 큰 칼이 그 노란빛 속에서 서서히 나타났다.
그 순간 모든 제자 그리고 장로들은 경악했다.
‘한 줄기 노란빛이라고? 황급 일품의 무혼은 가장 낮은 무혼이잖아? 이럴 수가?’
좀 전까지 저주를 퍼붓던 진장공도 경악하고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그도 임수성 제일 천재가 황급 일품의 무혼을 각성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은 속된 말로 쓰레기 무혼이었다.
진남은 제단에 앉아 서서히 눈을 떴다. 넋이 나간 사람들의 표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적염도(赤焰刀), 황급 일품 무혼이라……"
진남은 속으로 웅얼거렸다. 그리고 심신을 살짝 움직여 등 뒤의 적염도를 체내로 거뒀다. 그는 폐급 무혼을 각성했다고 슬프거나 절망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눈가에 기쁨이 살짝 스쳤다. 하지만 그 기쁨은 다른 사람이 알아채기도 전에 이내 감춰졌다.
몇 번의 호흡이 오가는 동안 모두 침묵했다.
진장공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더니 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진남아! 생각 밖이구나! 네가 황급 일품의 무혼을 각성하다니! 네가 무슨 개똥 같은 천재냐, 너는 영락없는 폐물이다! 나야말로 진씨 가문의 제일 천재이고, 임수성의 제일 천재다!"
황급 일품의 무혼은 무혼 중 가장 급이 낮은 존재라서 폐무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진씨 가문 사람 중 황급 일품 무혼을 각성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황급 이품 이상의 무혼을 각성했다.
진장공의 경박하고 듣기 싫은 웃음소리에 넋이 나가 있던 사람들이 모두 정신이 들었다.
제자와 장로들이 진남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달라졌다. 예전의 존경하고 기대하던 시선이 실망과 경멸로 바뀌었다.
"황급 일품의 무혼이라니."
"제일 천재는 개뿔. 황급 일품의 무혼을 가진 폐물이잖아!"
"진장공 형님이야말로 제일 천재야. 진남 이놈은 진씨 가문의 제일 폐물이다!"
"......"
무도의 세계는 강자의 위주로 돌아간다.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사람들은 그동안 진남을 그토록 우러러봤지만, 이번 무혼 각성으로 그를 쓰레기 취급하기 시작했다.
진남이 어려서부터 재능이 워낙 뛰어났다. 그래서 그들은 진남에게 막대한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있을 줄이야.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으니 제자들과 장로들이 어찌 진남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장공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는 득의양양해서 진남을 내려다보며 크게 웃었다.
"봤어? 내가 예전에도 말했잖아. 사람의 무혼은 하늘에서 정해 준 거라고. 네가 스스로 무예를 개발하면 뭐 해, 그래 봤자 지금은 폐물이잖아!"
진남은 진장공을 담담하게 쳐다보더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예전 같았으면 진씨 가문의 제자와 장로들이 진남을 따라갔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그 뒷모습이 무척이나 씁쓸해 보였다.
진남이 떠나자 주위에 있던 제자와 장로들은 순식간에 진장공의 주변에 몰려들어 아부했다.
"아이고, 진장공 형님, 저를 모른척한 게 며칠입니까?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장공 공자, 진씨 가문의 소주는 공자가 하는 게 맞겠소. 저 폐물이 무슨 자격으로 소주를 한단 말이오."
"장공 공자, 이제부터 저는 공자의 동생이나 다름없습니다. 말씀만 해주세요. 저는 공자님만 따르겠습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무혼 각성 의식에서 발생한 일들이 진씨 가문과 임수성에 쫙 퍼졌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임수성 사람 모두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제 모든 관심은 진장공에게 쏠렸다.
필경 황급 오품의 무혼은 임수성에서도 최고의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