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36.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2)
“선생님, 감사합니다!”
안마실과 안마과 의사, 간호사를 위해 먹을거리를 잔뜩 사온 노형진이 즐거운 간식 타임이 끝나자 일어나 진짜 마지막 감사 인사를 했다.
오늘로 그의 치료는 종료였다.
“또 소파에 누워서 비비적거리고 싶으면 들러요. 이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아프게 해줄 테니까.”
“에이~ 벼룩도 낯짝이 있죠. 무료로 이만큼 신세졌으면 됐지 어떻게 그래요. 다음엔 정식으로 치료받으러 오겠습니다. 그럴 일이 있을까 싶지만요.”
“당연히 돈 받아야죠. 고통을 돈을 주고 사고 싶지 않으면 현재처럼 사는 거, 알죠?”
“그래야죠. 참! 오늘 방송은 보실 거죠?”
“글쎄요. 아마 못 볼 것 같아요.”
할 일이 있는데 끝마치고 집에 가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꼭 보세요. 제가 선생님을 위해 한 말이 있거든요.”
“하하! 그럴게요. 들어가요.”
“그럼 가볼게요, 선생님.”
노형진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후 떠났다.
두삼은 바로 안마실로 향했다. 오늘 퇴원하는 이가 한 명 더 있었다.
안마실도 간식을 다 먹었는지 정리를 하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준호에게 다가갔다.
이준호의 눈에 있는 노폐물은 다 제거했다. 이제 남은 건 지켜보는 것뿐. 더 이상 병원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오늘 퇴원이죠?”
“아! 선생님, 오셨어요. 안 그래도 선생님께 내려가려던 길이었어요.”
“병원 짐은 어떻게 했어요? 정리 안 됐으면 도와줄까 해서 왔어요.”
“오전에 부모님이 오셔서 가지고 가셨어요.”
“그랬군요. 약 함부로 먹지 말고 꼭 저랑 상담해요.”
“끝까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끝난 건 아니잖아요. 안마실에 올라올 때 잠깐씩 봐줄게요. 버스 기다릴 텐데 이만 가세요. 전 또 일해야 해서. 퇴원 축하해요.”
고개를 숙이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인 후에 돌아섰다.
“후우~ 끝나고 나니 바로 새로운 일이네. 그래도 밥은 먹어야겠지. 이것도 일이니까.”
다양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는 것은 즐거움과 동시에 뇌전증에 효과가 있는 물질을 찾는 일이었다.
물론 가끔 일을 하는데 난입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달그락! 하는 소리와 함께 식판이 놓이고 임동환이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평소 지나가도 말도 안 하는 인간이 왜?
“TV 방송이 오늘이냐?”
“네. 근데 선배는 퇴근 안 했어요?”
“누구완 달리 당직을 하거든.”
“딱히 일도 없는데 과장님들까지 당직 세우긴 좀 그렇죠.”
“…….”
“왜 그렇게 보세요? 저요? 에이~ 저 당직까지 시키면 병원이 양심이 없는 거죠. 특실 담당하고 있어서 제 시간에 퇴근한 적이 없는데요. 근데 그 얘기하려는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에요?”
“너무 들뜨지 말라고.”
“네?”
“방송 출연 한다고 당장 스타 의사가 될 거라는 생각, 대부분 하지 않나? 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거든. 혹시나 그럴까 봐 방송 선배로서 충고해 주는 거야.”
진짜 충고를 하기 위해 하는 말 같진 않고, 배가 아픈 건가? 아님 잘못되라고 기도라도 하는 건가?
별로 상대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라 문득 장난기가 들었다.
“방송 선배? 에에~ 선배 방송 출연 했었어요?”
“…많이 했었다. 인기 프로그램도 있었고.”
“근데 왜 전 한 번도 못 봤을까요?”
“…….”
임동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재미없다. 놀리는 것도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해야 재미있나 보다.
싫지도 좋지도 않은 사람인데 장난이 아닌 놀림감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얼른 말을 덧붙였다.
“하긴 생각해 보니 제가 한동안 TV를 안 봤네요. 선배가 하려는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TV 출연 했다고 우쭐대지 말라는 거죠? 걱정 말아요. 계속 출연하라는 것도 거절했을 만큼 관심이 없으니까요.”
하란이 있는 곳까지 가보려고 한 일이었다. 한데 옆에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이미 함께하고 있는데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알면 됐다. 나 먼저 일어날게.”
그는 용건이 끝나자마자 일어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물었다.
“혹시 흉부외과 민 선생이랑 사귀는 건 아니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이야 없죠. 근데 현재 형이랑 사귀고 있는 해인이가 과 동기잖아요.”
“…그게 아니라 전 남친으로서 묻는 것 같은데?”
“제가 그리 질척거리는 스타일은 아닌데. 그런데 선배 입에서 전 남친이라는 말이 나오니 좀 그러네요. 남친일 때도 신경 쓰지 않았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저기서 헛소문들이 돌아서요.”
“헛소문이야. 그리고 내 일엔 신경 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후 임동환은 가버렸다.
“쳇! 오늘 저녁 식사는 망쳤네.”
3분의 1쯤 남은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식사 후 찾은 곳은 이상윤의 병실이었는데 병실엔 그 말고 나이 든 노부부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상윤 선생 할아버지, 할머니 되시나 보군요.”
“허허허. 그렇습니다. 일이 이제 끝나서 잠깐 들렀어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손자는 안하무인인데 그 조부는 무척이나 선비였다. 게다가 말투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그렇습니다. 어르신.”
“한데 한 선생은 퇴근 시간 아닙니까?”
“그게… 이상윤 선생 치료를 할까 해서요.”
“이 시간에 말입니까?”
“입원하고 이틀간 부족한 기운을 약간이나마 채웠습니다. 다 채울 때까지 기다리면 마비가 더 굳어질 게 빤하니 부족하더라도 지금 시행해야 합니다.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아니에요. 우리에게 설명할 필요 없어요. 한 선생이 하고픈 대로 하세요. 현성병원에서 수술 후 이 녀석이 어떤 진단을 받았는지 알고 있어요. 지켜보자는 거였지요. 말이 지켜보자는 거지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임을 우리 부부도, 이 녀석 부모도 다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한의학 쪽은 설명을 해줘도 잘 모르겠고요. 허허허.”
조부모도, 부모도 의사인 모양이다.
어설프게 아느니 확실히 아는 편이 좋긴 하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네요.”
“왜 녀석이 이쪽으로 오자고 했는지 한 선생을 보니 알 것 같군요. 우린 손주 얼굴 봤으니 이만 가볼게요. 부디 잘 부탁드리리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부모는 이상윤에게 인사를 한 후 바로 떠났고 두삼은 이상윤을 보며 중얼거렸다.
“두 분은 참 좋으신데…….”
“…무스 으도로 하는 마리에요?”
“나랑 비슷해서 하는 말일 뿐이네요. 나도 할아버지 속 많이 썩혔거든요. 그리고 성질 좀 죽이세요, 이 선생님. 화는 몸에 좋지 않아요.”
“…다신이 뭐져 글 거자나.”
“아! 내가 먼저 긁었나? 사과할게요. 자! 몸의 기운부터 살펴봅시다. 시키는 대로 먹었다면 오늘 할 수 있을 것이고 안 먹었다면 내일로 미룰 거예요. 그럼 누구 손해다?”
“…야, 양이 너무 마나써!”
“병원에서 할 일도 없잖아요. 먹어요. 이 선생님이 성관계에 쏟은 열정과 시간만큼. 아님 낫는다고 해도 얼굴이든, 팔이든, 다리든 한곳은 못 움직일 수 있어요. 어서 팔 줘요.”
이상윤은 두삼이 먹으라고 보낸 음식을 다 먹지 않았다. 항상 체크하는데 왜 모를까.
불과 며칠 전까지 멀쩡한 몸이었는데 숟가락 들기도 힘들고 입에 넣기도 힘들고 씹기도 힘들다는 건 안다.
자신이라도 분명 숟가락을 던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치료를 위해선 먹어야 했다. 그래서 협박 비슷하게 말하는 것이다. 물론 쇼는 조금 더 해야 했다. 앞으로 편하려면 말이다.
두삼은 그의 팔을 놓으며 긴 한숨을 뱉었다.
“후우~ 말도 지지리도 안 듣네.”
“…이이~ …너, 너…”
“뭐? 반말했다고? 너도 은근슬쩍 하잖아. 그리고 지금은 의사와 환자가 아닌 인간과 인간으로 말하고 있는 중이야. 마침 동갑이니 잘됐네. 한 가지만 더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너 낫기 싫으냐?”
“…….”
“무언은 긍정이라고 치고. 근데 무슨 배짱으로 내 말을 안 듣는 거냐? 혹시 나한테 치료받는 게 불편해서 그러냐? 아! 할아버님 말씀대로라면 네가 나한테 치료받겠다고 말한 것이니 그건 아니겠고.”
“아, 아니거드!”
“발끈하는 거 보니 맞네. 아무튼 그럼 왜 말을 안 듣는 건데? 혹시 자존심 때문인가?”
또 말이 없다.
자존심 때문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건가? 지 발로 걸어 들어와서 뻗대는 건 무슨 생각인지.
아무리 막나가기로 했다지만 여기까지다. 그냥 내보낼 것이 아니라면 이젠 당근을 줄 차례다.
‘어떤 당근을 줘야 만족할까? 자존심 때문이라면 자존심을 세울 기회를 주는 게 맞겠지?’
생각을 정리한 두삼이 말을 이었다.
“지금 환자와 의사 관계에서 서로 자존심 싸움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 이렇게 하자고. 네가 내 말을 잘 들으면 네가 널 최선을 다해 낫게 해줄게. 그리고 네가 다 낫게 되면 그때 진짜 대결을 해보자.”
“…어떠게?”
“한의사와 양의사의 대결이니 수술로는 안 될 테고. 음… 일단 너도 나도 천천히 생각해 보자. 오케이?”
끄덕끄덕!
“그러려면 약속을 해야 해. 넌 나에게 협조를 하고 난 널 낫게 해주고. 만일 협조를 안 하면 네가 지는 거고. 내가 못 고치면 내가 지는 거야. 오케이?”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바보가 확실했다. 무조건 협조해야 하는 상황이다. 안 하면 자기만 손해다.
물론 내색하지 않았다.
“좋아! 대결을 하려면 빨리, 완벽하게 널 낫게 해야 하니 특별히 오늘은 내 기운을 왕창 소모해서 널 치료해 줄게. 단! 오늘 만이야. 기운 없을 땐 해주고 싶어도 못 해준다. 하루가 늦어지면 완벽한 치료 확률이 뚝뚝 떨어진다는 걸 기억해. 왼쪽으로 누워.”
치료 방법을 숨겨놓길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마비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하게 적어 놨다.
특별한 건 아니다. ‘아프도록 주물러라’ 이게 다였다. 처음 악양에서 봤을 땐 뭔가 했었는데 지금은 알 것 같다.
비틀어진 경락을 기를 머금은 손으로 주물러서 바로잡으라는 뜻이리라.
두삼은 준비해 온 마우스피스를 그에게 건넸다.
“많이 아플 거야. 착용해.”
“…차믈수 이써.”
“그건 의사인 내가 판단해. 방금 전에 한 약속 잊지 않았겠지?”
“…….”
이상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마우스피스를 입안에 넣고 물었다.
“시작한다.”
하얗게 빛나는 손으로 두삼은 그의 목과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 * *
노형진이 말쑥한 모습으로 무대 뒤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끝난 ‘뉴라이프’ 첫 회 방송은 7퍼센트의 아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한데 화제성은 시청률과 달랐다. 실시간 검색어에 한강대학병원과 노형진, 한두삼, 한방 다이어트 등이 순위를 채웠고 특히 예고편에 몇 초간 보인 노형진의 벗은 영상은 폭발적이었다.
그런 화제성은 곧장 비만클리닉 손님으로 이어졌는데 조짐은 센터 문이 열리고 접수처에서부터 시작됐다.
센터 문이 열리자마자 중량감 있는 이들 몇 명이 재빨리 번호표를 뽑았다.
직원이 상냥히 물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여기 의사 중에 한두삼 씨라고 있죠? 그분에게 비만클리닉을 받고 싶어서요.”
“선생님 지정은 접수 후 안마과 접수대에서 문의하시면 됩니다. 신분증을 보여주시겠어요?”
사내는 신분증을 건넸고 처리는 금방 됐다.
“들어가셔서 첫 번째 오른쪽 복도로 들어가면 안마과입니다. 그곳에서 이 카드를 접수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카드를 받자마자 남자는 안마과로 빠르게 걸었다. 그리고 접수대가 보이자마자 카드를 내밀었다.
“헉헉! 한두삼 씨에게 진료 받으러 왔습니다!”
아침 업무를 시작하면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던 도 간호사는 가픈 숨을 몰아쉬며 카드를 내미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금세 손님임을 알고 카드를 리더기에 꽂으며 말했다.
“한두삼 선생님의 경우 보통 오전 10시 30분부터 진료를 시작합니다. 저희 비만클리닉의 경우 세 분의 선생님이 계신데 모두 동일한 시술을 하고 있으니 시간이 없으시다면…….”
“아뇨. 한 선생님을 기다리겠습니다. 근데 순서가 바뀌거나 하진 않죠?”
“물론이죠. 손님께서 첫 번째입니다. 그럼 자리에 앉아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남자가 비켜서고 나자 이번엔 통통한 여자가 카드를 내밀었다.
“한 선생님께 진료 받으러 왔습니다.”
“…아, 네…….”
도 간호사는 당황했다. 진료 카드를 내민 여자 때문이 아닌 그녀 뒤로 늘어선 줄 때문이었다.
업무를 처리하면서 막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천 간호사에게 손짓했다.
“한 선생님께 전화해서 가급적 빨리 오라고 말씀드려.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방송 효과가 큰 모양이야.”
“알았어요, 언니!”
두삼이 천 간호사의 연락을 받은 건 뇌전증 환자를 보고 있을 때였다.
기껏 아침 시간대로 당겼는데 혹시 방송을 보고 비만클리닉 환자들이 늘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전에 일부 치료하고 저녁에 일부 치료하기로 했다.
-선생님 빨리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예약 환자분들이 벌써 오전 예약은 꽉 찼어요. 오후에도 금방 찰 것 같아요.
예상보다 손님이 많은가 보다.
남은 환자는 저녁에 하기로 하고 바로 안마과로 달려갔다. 한데 들어서자마자 ‘헉!’하고 숨을 토할 만큼 이미 대기 의자가 가득 차 있었다.
“한두삼이다.”
“TV로 볼 때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데 진짜 실력자 맞긴 한 건가?”
두삼을 본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두삼은 바로 접수대 뒤로 가서 도 간호사에게 물었다.
“얼마나 온 거예요?”
“이미 오후 예약 시간까지 꽉 찼어요. 그런데도 계속 밀려드나 봐요.”
“헐! 그럼 이제부터 접수 받지 말아요.”
“이미 접수처에도 연락을 해서 예약으로 돌리라고 해뒀어요.”
“다른 선생님들도 똑같은 진료를 한다고 말했어요?”
“당연하죠. 한데 TV를 보고 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선생님에게만 진료를 받겠다고.”
“하아~ 미치겠네. 방송 시청률이 그럭저럭해서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데 이방익이 커피를 든 채 느긋하게 다가와 말했다.
“난 어제 방송 보고 이럴 줄 알았는데?”
“아! 오셨어요. 한데 예상하셨다고요?”
“당연하지. 먹는 거 먹으면서 하는 다이어트야. 게다가 살 처짐도 거의 없지. 나라도 다이어트한다면 한 선생을 찾을 거야.”
“무슨 말씀인지 이해는 됩니다만 어째 선생님은 여유로우시네요.”
“하하! 내 일이 아니잖아. 시간이 조금 지난다면 모를까 한동안 사람들이 한 선생만 찾을걸. 걱정 말게. 나도 겪어봐서 아는데 한동안 계속 늘다가 기다림에 지쳐 떨어지기 시작하면 차츰 한가해질 걸세.”
“…위로치곤 꽤 무섭네요. 제가 선생님이 더 실력이 좋다고 다 보내도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을까요?”
“권해보게. 그렇게 되나. 하하! 고생해.”
이방익은 얄미운 소리만 하고 그의 진료실로 들어가 버렸다.
“하아~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네. 천 간호사, 진료실로 들어가서 준비할 테니까 5분 뒤부터 순서대로 들여보내주세요.”
고민한다고 대기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들이 사라지진 않을 터, 결국 진료를 빨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아침부터 시작해 점심은 간단히 때우고 업무 종료 시간까지 한시도 쉬지 못하고 뱅뱅이 돌길 사흘.
환자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담당 환자가 늘어날수록 체질에 맞게 식단을 짜는 따위의 진료 외적인 일이 늘면서 환자를 보는 시간이 줄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언제나 그렇듯이 막상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다가도 포기하는 사람들 덕분에 잠깐 숨 쉴 틈이 생겼다.
“나 15분만 휴게실 가서 음료수 한 잔 먹고 올게요.”
천 간호사에게 말한 후 서둘러 휴게실로 뛰어갔다. 왔다갔다 4분. 11분이라도 여유를 찾고 싶었다.
처음 보는 인턴들이 인사를 했지만 잠깐 손을 흔들어주곤 음료수를 뽑았다.
치익!
탄산이 터져 나오는 소리가 오늘 따라 시원함을 주는 느낌이다.
벌컥벌컥! 캬아~
절반을 단숨에 마시고 나니 조금 기운이 살아났다. 한데 10분의 여유를 방해하는 이가 있었다.
“한 선생, 오랜만이야! 흐흐흐!”
한때 자신의 정신이 망가질 때까지 무던히도 괴롭혔던 목소리를 어떻게 잊을까.
돌아봤다.
흰머리가 섞여 있는 덥수룩한 머리, 며칠간 수염을 깍지 않아 지저분하게 난 수염, 기분 나쁜 미소와 웃을 때 나타나는 누런 이.
섬에서 죽은 할머니의 아들, 조해수였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