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125화 (120/122)

# 125

36.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다다닥!

누군가가 급하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 후 문이 벌컥 열렸다.

잔뜩 흥분한 모습의 이준호였는데 안경을 벗고 있었다. 안경에 대해 말하려는데 그가 먼저 외쳤다.

“한 선생님! 보, 보여요. 예전보다 더 명확하게 사물이 보인다고요! 세수를 하기 위해 안경을 벗었는데 글쎄 많이 좋아진 거 아니겠어요. 하하하… 하하하!”

씻은 후 닦지도 않고 단숨에 진료실로 달려온 이준호는 금세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잠깐 얼떨떨해하던 두삼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흥분하지 말고 이리와 앉아봐요. 그렇게 급하게 오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요?”

“…아! 제가 너무 흥분을 했네요. 죄송합니다.”

“마음껏 흥분하고 기뻐해도 돼요. 대신 울진 말아요. 우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거든요.”

“아! 그,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는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안마실에선 자제하고요. 잠깐 살펴볼게요.”

안마실에서 일하는 안마사들이 속이 좁아 그의 눈이 나아지고 있다는 걸 시기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해 줄 것이다.

다만 그들의 마음속 묵은 상처를 헤집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았다.

의자를 보고 자리에 앉은 이준호의 눈 부위를 살폈다. 말랑말랑했던 노폐물들은 흐물흐물해졌고 눌려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시신경들이 어느새 새로이 살아나고 있었다.

언제 봐도 인간의 몸의 신비하다. 망가지는 것도 금방이지만 살아나는 것도 한 순간이다.

‘그나저나 노폐물을 한꺼번에 날려 버릴 수 있을까.’

굵직한 혈도는 어느 정도 뚫었다. 문제는 세맥들. 일일이 뚫기에는 너무 오래 걸릴 게 빤하다.

걸크러시 하라의 몸속 마약 성분을 날려 버렸듯이 뜨거운 기운으로 한꺼번에 날려 버리는 게 나을지 아님 좀 더 기다릴지 고민했다.

‘시도를 해보자!’

왠지 느낌이 좋았다. 결심을 마치고 말했다.

“오늘 밤 남아 있는 노폐물들을 제거해 보죠.”

“드디어…….”

“섣부른 희망은 금물이에요. 무척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모를 일이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제대로 알아듣는 게 맞을까? 잔뜩 들뜬 표정으로 진료실을 떠나는 이준호.

노형진에 이어 마지막 남은 이준호마저 끝을 향해 가고 있으니 약간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에 두삼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어 서운한 느낌을 털어버리고 자책했다.

‘헐! 미쳤군, 미쳤어. 한가하면 좋은 거지. 일중독자가 꿈이냐!’

특별히 신경 써야 할 환자가 아니더라도 할 일은 많았다. 거기에 모레 방송이 나가고 나면 얼마만큼의 손님이 밀려올지는 미지수였다.

천 간호사의 말에 상념에서 깼다.

“선생님, 예약 손님이 안 오셨는데 선생님을 기다리는 분 들여보낼까요?”

“그러세요.”

80? 85㎏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가 살짝 주춤거리며 들어왔다.

“앉으세요, 오미나 씨. 음, 비만클리닉으로 신청을 하셨네요?”

모니터에 띄워진 정보를 보고 말했다.

“…네. 제가 방송국 편집실에서 일하거든요. 선생님 영상을 편집하다가… 오게 되었어요.”

“잘 오셨어요. 음, 일단 진맥 좀 해볼까요?”

간단히 진맥을 해보니 내장지방과 근육량이 너무 적었다. 겉으로 보는 것보다 더 심한 비만이었다.

“거의 안 움직이시는군요?”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서요. 일이 끝나면 바로 잠들기 일쑤고요.”

“살을 빼는 건 노형진 씨에 비해 훨씬 쉽습니다. 한데 오미나 씨의 경우 근육량이 너무 적어 지방을 빼고 근육을 키우지 않으면 요요가 올 가능성이 높고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운동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얘기네요?”

“네. 그렇지 않으면 피부 처짐 역시 어쩔 수 없게 되고요.”

“노형진 씨처럼 뛰기를 해야 하나요?”

“아뇨. 근육 운동이요. 일주일에 적어도 사흘, 하루 두 시간씩은 해야 돼요. 그게 불가능하면 다이어트보다 식이요법으로 조금씩 살을 빼는 게 나아요.”

“해볼게요.”

“하셔야 합니다. 운동을 멈추는 순간, 치료도 멈춘다는 걸 있지 마세요. 먹는 건 어때요?”

“편집하면서 배고프면 먹어요. 특히 잘 부탁한다고 이것저것 갖다주는 게 많아서, 제가 편집은 제법 잘하거든요.”

“일 잘해준 대가가 살로 가면 곤란하죠. 오늘 이후론 먹는 것 기록해 주세요. 체크해서 다음엔 식단도 정해 드릴게요. 오늘은 신진대사를 빠르게 하는 것만 하기로 하죠. 겉옷만 벗고 침대에 누우세요.”

TV 출연 이후에 찾아올 비만클리닉 손님들을 어떻게 할지는 이미 정해뒀다. 노형진 때완 달리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차근차근 진행할 생각이었다.

오미나의 진료가 끝나자마자 이어지는 환자들.

정신없이 일하는데 천 간호사가 전화기를 내밀었다.

“원장님 전화예요. 선생님 전화가 끊겨 있다고.”

“아! 충전을 해둔다는 게 잊고 있었네요. 여보세요?”

-한 선생, 환자 한 명 맡아줘야겠네.

“아! 역시…….”

-뭐가 역시란 말인가?

“하하. 아닙니다. 바로 그리로 가겠습니다.”

-아니, 이쪽으로 올 필요 없네. 10분 후쯤 구급차가 한방센터 앞으로 갈 테니 병실로 안내하고 자네가 맡으면 된다네.

“듣던 중 반가운 얘기네요.”

VIP실을 왔다 갔다 하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친한 친구의 부탁이야. 현성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자네에게 치료를 받겠다고 해서 보내는 거니 잘 부탁함세.

또 현성인가? 이상윤이 알게 되면 또 자존심이 상해서 펄쩍 뛸지도 모르겠다.

만날 일 없으니 상관없는 일이긴 했다.

“알겠습니다. 한데 병명이?”

-허혈성 뇌졸중이네.

허혈성 뇌졸중은 뇌혈관이 막혀서 발생하는 뇌경색으로 한의학에서는 중풍 증상과 유사했다.

-뇌수술은 제대로 한 모양인데……. 아무튼 자네가 잘 살펴보게. 참! 뇌수술과 관련된 조치는 신경외과에서 서포트를 해줄 걸세.

환자에 대해 더 물어보려다가 10분 후, 아니, 이젠 8분 후면 의료 기록을 들고 올 테니 직접 확인하는 것이 빠를 것 같았다.

“양 선생, 뇌졸중 환자 이송해 온단다. 나가자.”

“네? 한방센터로 환자가 이송돼 온다고요?”

“환자가 온다는데 어쩌겠어. 수술 후 후유증이 낫지 않았나 보지.”

뇌졸중 후유증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마비로 물리치료 말고는 특별한 방법이 없었다.

“완연한 봄이네요. 가운을 벗었는데도 춥기보단 포근합니다.”

한방센터 앞마당에 핀 개나리를 보고 양태일이 중얼거렸다. 이제 제법 친해졌다고 가끔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왔다.

류현수처럼 달라붙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는 녀석이다.

두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그렇다는 건 슬슬 인턴 순환할 때가 됐다는 말이네. 이번엔 좀 똑똑한 녀석이 왔으면 좋겠다.”

“…제가 똑똑하지 못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그걸 이제야 알았냐? 기도 믿지 않으면서 한의사가 된 녀석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이젠 믿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아직도 안 믿었으면 이미 쫓아냈을 거다.”

“서운합니다. 전 안마과를 지원할까 했는데…….”

“헐~ 누가 받아나 준대? 김칫국은. 난 더 일 잘하는 사람을 받고 싶거든.”

“인턴 중에 저만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누가 그래?”

“제가요!”

“풉! 도대체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거냐? 과연 내가 환자를 너한테 맡길 날이 올까 걱정되는구만.”

“…….”

“뭐, 진짜 그렇다면 생각해 보고.”

스스로를 더 채찍질해서 더 잘되라고 한 말이었는데 어떻게 이해할지 모르겠다.

물론 약간 놀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걸 보니 확실히 놀리는 재미가 있다.

“근데 선생님… 혹시 지금 안마과를 선택하게 되면 순환 근무를 하지 않을 수 있나요?”

“글쎄다. 너희가 첫 인턴이니까. 아마 가능은 하지 않을까? 한데 난 네가 순환 근무를 했으면 해.”

“…왜요? 좀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인턴이 궁금하십니까?”

“아니. 다른 과에 가면 그곳에서 또 배울 것이 있을 테니까. 내가 토요일마다 침구과 장인규 과장님께 뜸을 배우고 있는 건 알지?”

“네.”

“다들 수십 년간 한의학에 몸담고 계셨던 분들이야. 그런데 배울 점이 없을까? 물론 실력이 썩 좋지 않은 분도 계시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 역시 배울 만할 거야. 그러니 다른 곳에 가서는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

양태일은 두삼의 말에 아버지가 떠올랐다.

‘난 여전히 좁게 살고 있구나.’

느끼는 바가 많았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두삼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많이 배워. 나중에 만났을 때 지금과 다름없으면 내가 얼마나 매서운 사람인지 가르쳐 줄 테니까. 그나저나 차가 막히는 건가? 왜 이렇게 안 와?”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구급차가 입구로 들어서며 다가왔다.

현성병원 마크가 찍힌 구급차 뒷문이 열리자 의사 복장의 사내가 내려와서 서류를 건넸다.

두삼은 서류를 받으며 물었다.

“환자 상태는 어떻습니까?”

“수술은 잘됐습니다. 다만 후유증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의료 기록 보시고 혹시 궁금한 점 있으면 거기 명함도 함께 드렸으니 연락 주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인계하겠습니다.”

일단 구급차에서 침상을 내렸다. 그리고 준비해 둔 침대로 옮기려는데 환자의 얼굴이 보였다.

“…어! 이상윤 선생?!”

그는 시선을 피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한데 왼쪽 얼굴만 찡그려지는 거 아닌가.

불과 일주일도 안 돼서 이렇게 된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선선한 바람도 문제가 될 수 있었기에 일단 옮기는 게 우선이었다.

“양 선생은 내려가 있어. 이 간호사님은 잠깐만 밖에 계셔주시고요.”

1인실로 옮겨 모니터를 장치하고 링거를 다는 동안 서류를 살피던 두삼이 말했다.

현성병원에서 작성한 의료 기록엔 어떻게 뇌졸중이 왔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둘이 남게 된 방. 두삼은 그의 얼굴 쪽으로 다가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 선생님, 말은 제대로 해요?”

“…그러저러.”

“간단한 건 고개를 끄덕여도 돼요. 그럼 물어볼게요. 어쩌다가 뇌졸중이 온 겁니까?”

“…….”

“의사이니 비밀을 지키겠다는 고리타분한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에게 치료를 받을 생각으로 왔다면 협조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짧게 입을 열었다.

“…성관계를 매따가.”

“침대에서 쓰러졌다는 말이네요. 한데 상태를 보니 꽤 치료가 늦은 모양이네요? 진료 기록엔 그 때문에 몸의 절반이 마비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적혀 있네요. 혹시 상대가 몰랐던 겁니까?”

끄덕!

분명 몸이 정상적으로 될 때까지 참고 관리를 하라고 충고를 했음에도 참지 못하고 하다가 이 지경이 되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상처 입은 사람에게 소금 뿌리는 짓을 할 만큼 모질지 못했다.

“진료를 해볼게요.”

일단 목의 맥을 짚어 몸 상태를 살폈다.

맥이 불규칙하고 약한 것이 방송 중 진맥을 했을 때보다 더 나빠져 있었다.

진맥으로 알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기에 두삼은 기운을 그의 몸으로 넣었다.

아껴 쓰는 버릇이 생겨서인지 약간의 기운으로 일단 뇌경색이 일어난 뇌부터 살폈다.

‘출혈 부위가 작아서 생명을 구할 수 있었고 수술이 역시 무사히 잘됐다고 되어 있더니 정말 그렇군.’

불행 중 다행이랄까 터진 실핏줄의 2배만 더 큰 혈관이 터졌다면 그는 침대에서 죽거나 식물인간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전기적 신호는 이 정도면 나랑 비교해도 나쁘지 않은데 왜 마비가?’

기운을 더 추가해서 마비된 부분을 살피려 했다. 한데 시작부터가 좋지 않았다. 곳곳이 막혀 있었다. 결국 기운을 왕창 불어넣어 작은 세맥들과 혈관, 근육 등을 이용해 경맥을 살폈다.

‘…지진이 난 도로가 이럴까? 경맥이 완전히 뒤틀려서 막혀 버렸어!’

물기를 빼기 위해 수건을 쥐어짜듯이 기운을 뽑아 쓰다가 경락이 모두 뒤틀리고 꼬여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상윤의 현 상태는 뇌졸중으로 인한 마비가 아니라 중풍으로 인한 마비로 봐야 했다.

‘물론 나에겐 후자가 더 낫고.’

뇌는 두삼에겐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는데 뇌가 고장 났다면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했을 것이다.

“…어대?”

시간이 길어지자 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때?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 뇌 쪽 문제는 아니네요. 그랬다면 나도 손을 쓸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럼?”

두삼은 물에 젖은 걸레를 비유해서 설명했다. 중간에 걸레라는 말이 나오자 그가 인상을 찌푸려서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은 거 어쩌겠는가.

“제일 궁금한 게 치료가 가능한지겠죠?”

끄덕! 끄덕!

“유사한 경우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고 처음 치료해 보는 증상이에요. 하지만 실망하긴 일러요. 제가 알고 있는 분이 이런 증상에 많은 경험이 있으셨어요.”

처음 치료해 보는 증상이라는 말에 실망하던 그는 금세 관심을 보였다.

“…누구?”

“돌아가신 제 할아버지요. 진료 기록과 관련된 치료법을 남기셨어요. 즉! 치료 방법은 제가 알고 있다는 거죠. 단점이라면 내 실력이 할아버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정도겠네요.”

“…부, 부타드려요.”

“걱정 말아요. 방송국에서 했던 사소한 말다툼 때문에 당신에게 소홀히 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치료는 당장 할 수 없어요. 당신의 기운부터 북돋은 후에 바로 시행할 겁니다.”

“…….”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상윤은 물끄러미 두삼을 봤다. 그러다 갑자기 시선을 돌렸는데 그 순간, 그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일단 오늘 저녁은 죽으로 먹어요. 내일 아침부턴 제가 정해주는 식사가 올라올 거예요. 편히 쉬세요.”

두삼은 못 본 척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