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124화 (119/122)

# 124

35. TV 출연(3)

‘재수 없는 새끼!’

이상윤은 웃는 얼굴로 영상 속 노형진을 마사지하고 있는 두삼을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연섭을 낫게 했다고 우쭐대는 꼴이라니… 나을 때가 되었을 때 맡게 되어 운 좋게 고쳤을지 모르지. 아니 분명 그럴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병원에서 이름 있는 선생님들이 다 붙었음에도 고치지 못한 걸 한의사 따위가 고쳤을 리가 없지.’

방에 찾아갔을 때 이렇게 말하지 못한 게 못내 분했다. 삐딱하게 보기 시작하자 영상에 나오는 모습 하나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침을 이용해 피부를 수축시키는 장면 역시 시골 시장에서 가끔 보이는 사이비 약장수처럼 보였다.

‘한의사라기보단 마사지사 같잖아. 저렇게 주물러 놓고 뭔가 한 것처럼 해서 플라시보 효과를 노리는 걸 거야. 저 봐. 운동하라고 하잖아. 저런 식이면 누구라도 가능하겠다.’

한데 그의 생각과 달리 연예인 패널과 의사들은 상당히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어~ 코를 잠깐 만졌다고 냄새를 못 맡게 되다니. 대단한 재주군요, 한 선생.”

“전 그보다 신체의 신진대사를 약이 아닌 안마로 조절할 수 있을지는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말이 많아지자 영상이 멈추고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런 상황마저 불만인 이상윤은 문득, 이런 기회에 망신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방송에서야 나가지 않겠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만 제대로 알게 하는 것만으로도 소문이 날게 빤했다.

‘네 실력이 진짜라면 어렵지 않을 거다.’

음흉한 생각은 감추고 틈을 봐서 말했다.

“진맥으로 많은 걸 알아보고 주무르는 것만으로도 치료를 하는 것 같은데 직접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요! 제가 며칠 전 병원에 다녀왔거든요.”

칭찬하는 분위기는 이상윤의 말 한마디에 삽시간에 검증을 해보자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두삼이 이상윤을 흘낏 봤다.

‘뭘 봐! 실력이 있다면 진짜임을 스스로 증명해 봐.’

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두삼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나갔다.

“해보죠. 먼저 병원에 다녀왔다는 김종환 씨부터 할까요? 아! 혹시 의심하는 분! 이 있을 수 있으니 종이에다가 병원에서 진료 받은 결과를 적어두고 나오세요.”

의심하는 분이라고 말할 때 두삼의 시선은 이상윤을 향하고 있었다.

‘흥! 어디까지 잘난 척할 수 있나 보자.’

개그맨 김종환은 제작진이 건네는 종이에 병명을 적고 무대에 섰고 두삼은 바로 진맥에 들어갔다.

“요즘 위가 안 좋으시네요. 그리고 장 역시 기능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화장실을 자주 가셨겠네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치질이…….”

“악! 거기까진 말하면 안 돼요!”

화들짝 놀라 떨어지려고 하자 MC인 은주열이 그의 팔을 잡았다.

“나올 땐 자유지만 들어갈 때는 마음대로 못 들어갑니다. 일단 제작진에게 건넨 종이엔 뭐라고 적혀 있나 볼까요?”

[위장 장애.]

“오! 정확하네요. 한데 뒤에 치질이 있다고 말했는데 김종환 씨 사실입니까? 혹시 거짓말을 할 생각이면 안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저, 절대 아닙니다!”

“건드려 볼까요?”

“어, 어딜! 건드린다는 겁니까? 건드리면 절대 용서하지… 허억! 깜짝이야!”

은주열이 손을 뻗으려 하자 김종환은 팔짝 뛰며 놀라했다. 은주열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손을 댄 것도 아닌데 왜 놀라죠?”

“그게… 에이! 맞아요. 치질이에요. 됐어요?”

“치질이면 어떻습니까. 이 프로그램 이름이 뭐죠. 바로 뉴라이프, 새로운 삶 아닙니까. 이제부터 새 삶을 살면 되죠. 선생님, 혹시 치질에 좋은 침이나 안마가 있습니까.”

“물론이죠. 한데 김종환 씨의 경우 상습적인 치질이 아닌 화장실에서의 오래 앉아 있는 습관으로 인한 치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손목을 잡아 진맥하는 것으로 그런 것까지 알 수 있습니까?”

“혈액이 얼마나 힘차게 움직이는지를 파악하면 됩니다. 외치질의 경우 항문으로 내려가는 세 개의 핏줄이 제대로 올라오지 못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화장실에서 오래 앉아 있으면 내려간 혈액이 압력으로 올라가지 못해 치질이 발생하는 거죠.”

“그럼 치료는 어떻게?”

“여기서 간단히 할 수 있는 것은 내려가는 혈액을 일시적으로 막아 더 이상 커지지 않게 하는 것이죠. 아마 사흘 정도 지나면 아래서 원래대로 돌아갈 겁니다. 사실 지금 급한 건 위와 장입니다. 잔뜩 약해져 있어서 위장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습니다.”

“좋아질 방법이 있을까요?”

“안마와 이후론 며칠간 식단 조절만 하면 금방 나을 겁니다. 간단히 여기서 해볼까요? 다만 치료 이후엔 바로 화장실로 달려갈 겁니다.”

“…나중에 병원으로 가겠…….”

“당장 해보죠!”

김종환은 빼려 했지만 꼼짝없이 잡혀 제작진이 준비한 침상에 누워야 했다.

‘빌어먹을! 진짜란 말인가? 제작진과 미리 손발을 맞춘 거 아냐?’

두삼은 김종환에 이어 다른 패널과 의사들의 상태까지 척척 알아맞혔다. 그리곤 적당한 우스갯소리와 함께 간단히 치료할 방법까지 설명했다.

과연 자신에겐 무슨 소리를 할까 궁금했다.

“저도 봐주세요, 한 선생님.”

“오늘 인기가 많으시군요, 한 선생님. 그럼 현성병원의 이상윤 선생님까지 보고 영상을 계속보기로 하죠.”

“네. 잘 부탁드립니다, 한 선생님.”

다가오는 두삼을 향해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이 선생님은 양기가 많이 부족하시네요. 양기를 보할 한약을 드셔야겠습니다.”

‘이 자식이! 복수를 하는 거냐!’

마치 당신은 정력이 부족해라는 말에 이상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니나 다를까 패널들 중 일부가 짓궂은 말을 했다.

“남자는 힘인데……. 선생님은 운동 좀 하세요.”

“마른 장작이 꼭 잘 타는 건 아닌가 보네요.”

“장작과 사람이 같을 수가 있나요.”

하하하! 호호호!

방송에 나갈 수 있을까 걱정될 만큼 질펀한 얘기를 하는 이도 있었다.

‘으득! 비겁한 놈! 휴식 시간에 보자.’

당장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럴 때 그런 말을 해봐야 놀림감만 더 될 게 빤했다. 차라리 촬영이 끝난 후 제작진에게 편집을 요구하는 게 나았다.

“20분 쉬었다가 다시 촬영에 들어가겠습니다.”

따질 시간은 금방 왔다.

구석으로 가서 물을 마시고 있는 두삼에게 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낮게 이죽거렸다.

“날 엿 먹여서 고소합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제가 뭣 하러 이 선생님을 엿 먹입니까. 혹시 이 선생님 절 엿 먹이려고 했던 겁니까?”

“헛소리! 내가 양기가 부족하다가 한 게 엿 먹이려는 게 아님 뭡니까? 내가 말을 안 하려고 했지만 내 정력이 얼마나 절륜한지…….”

이상윤은 병원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섹스로 풀었다. 자연 스트레스가 많은 날에 두 번, 세 번에 걸쳐 새벽까지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그에게 양기가 부족하다는 헛소리를 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설명하려는데 두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섹스를 자주 오래한다고 말하려는 거면 안 해도 됩니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젊고 정상인 총각 의사가 양기가 부족하다? 과도한 섹스나 자위 행위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죠.”

“…….”

“적당한 소모는 몸에 좋지만 과도한 소모는 자신을 깎아먹는 겁니다. 뭐,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진단을 했으니 정확히 말씀드리죠. 섹스 후 손발이 떨리고, 가끔 코피가 날 겁니다.”

“…허, 헛소리!”

헛소리라 외치는 이상윤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리 힘이 없었다. 그가 말한 증상이 최근 심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양제만 잘 챙겨먹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한데 두삼이 그걸 정확하게 짚은 것이다.

“섹스를 멈추고 한동안 양기를 보할 수 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요. 더 심해지면 잘못하면 침대 위에서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휴우~ 이왕 말했으니 확실하게 하죠. 도대체 왜 분야도 다르고 병원도 다른 나에게 적의를 가지는 겁니까? 같이 방송을 해서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요. 오늘 이후로 방송 출연은 자제할 생각이니까. 그리고 각자 다른 곳이 아픈 환자를 치료하는 데 이기고 지는 게 어디 있습니까.”

정곡을 찔린 이상윤은 입만 실룩일 뿐 아무 말도 못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삼의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오기가 더욱 솟았다.

두삼은 두 손을 꼭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상윤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구제 불능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적당한 욕심은 스스로를 키우고 더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지만 과한 욕심은 결국 스스로를 다치게 만드는 법이었다.

‘그래도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말해줬더니만. 신경 끄자.’

대기실에서 약 올렸던 것에 대해 약간 마음에 걸렸었는데 그마저도 완전히 지워 버렸다.

휴식 후 이어진 촬영.

130킬로까지 빠지는 영상을 보고 난 뒤 주인공인 노형진이 가림막 뒤에 서서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는 시간을 가졌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와 얼핏얼핏 그의 실루엣이 가림막에 의도적으로 보일 때마다 사람들의 기대감은 커졌다.

그리고 점심시간을 가진 후 마침내 노형진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

패널들은 기립을 해서 박수를 쳤고 의사들 역시 그의 변화에 놀라워했다.

특히 깔끔하게 꾸며진 그가 보디빌더처럼 옷을 벗었을 땐 스튜디오 전체가 술렁였다.

수술 자국도, 처짐도 없는 노형진의 잘 빠진 근육질 몸매를 만들어낸 한방의학의 부작용 없는 다이어트 시술은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촬영은 그 후로도 늦게까지 계속됐다. 그가 먹는 장면에선 다들 입맛을 다셨고 93㎏인 현재 몸무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영상에선 모두 감동했다.

12시간 동안 이어진 촬영 내내 노형진은 수십 번도 더 두삼과 제작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한 선생님, 감사합니다!”

촬영이 끝나고 가려는데 노형진이 조르르 달려와 다시 감사를 표했다.

“…고맙다는 인사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요?”

“평생 할 생각인데요?”

“그럼 1년만 쉬고 해요. 그때쯤이면 다시 받아도 귀가 괜찮을 것 같네요.”

“하하하! 선생님 농담도 잘하시네요. 전 아직 촬영이 남아서 다시 가봐야 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진심으로 한 말인데…….

씩씩하게 스튜디오로 다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돌아섰다.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 * *

증조부, 조부모, 부모, 작은 아버지들이 전부 의사인 집안에서 태어난 이상윤은 어린 시절 장난감 대신 의료 기기들을 가지고 놀았고 동화책 대신 의서를 읽을 정도로 타고난 바가 있었다.

당연한 듯 전액 장학금으로 의대에 진학했고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했다.

가장 버티기 힘든 때가 인턴 때였는데 힘들어서가 아니라 당장 메스를 쥐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재능이 꽃피기 시작한 건 레지던트 때였다. 또래엔 견줄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수술을 잘했고 교수들마저 놀랄 정도로 완벽했다.

실력은 수술을 거듭할수록 늘었다. 주위에선 천재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한데 그의 실력이 늘어날수록 시기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아니, 대부분이 그를 시기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상관없었다.

배경 덕분에 겉으로 그를 괴롭히는 이들은 없었고 수술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한데 겉으로 완벽한 그도 사람이었다.

수술이 많아질수록 더 어려운 수술을 하게 되었고 더 어려운 수술을 많아질수록 그가 사망 선고를 해야 하는 사망자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했어도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죽음에 대한 미안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 스트레스를 술과 여자로 풀었다.

“…건방진 새끼, 나이도 똑같은 놈이 마치 손윗사람이라도 되는 양 훈계를 하다니!”

그는 꽉 쥔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제법 마셨는지 살짝 어지러웠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잔을 채웠다. 석 잔을 더 마셨을 때쯤 삐비빅 거리는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오빠 오늘도 왔네?”

여자는 한 달에 얼마간의 돈을 주고 함께 지내고 있는 일명 스폰녀였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어디 갔었어?”

“오빠는, 내가 매일 기계처럼 오빠를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어? 나도 가끔 나가서 술도 먹고 놀아야 오빠한테 잘해줄 수 있잖아. 안 그래?”

“…알았어. 나 급해.”

이상윤은 술잔을 비우고 스폰녀에게 다가갔다.

“나 클럽 갔다 와서 땀 많이 났어. 씻고 올게.”

“괜찮아. 어차피 또 땀 흘릴 텐데, 뭐.”

“아, 알았으니까 찢진 마. 이거 명품이야. 아잉~ 참 내가 한다니까.”

여자는 꽤나 능숙하게 흥분한 이상윤을 상대했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은 반쯤 벌거벗은 채 침대 위로 쓰러졌고 달뜬 신음 소리가 방을 채우기 시작했다.

‘네까짓 게 감히! 감히!’

신음 소리를 내며 아래에 깔려 있는 여자의 표정을 보면 묘한 승리감이 들었는데 그를 섹스에 중독되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질 때 첫 번째 쾌감이 그의 뇌를 관통했다.

“표정을 보니 더 할 모양이네? 피곤해 보이는데 그냥 쉴래?”

“…아직 부족해.”

“네네~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해야 성이 풀리죠?”

여자는 가슴부터 천천히 애무를 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피가 쏠리는 게 느껴졌다.

다시 시작된 열풍.

“헉! 헉!”

두 번째 쾌락을 얻기 위해선 더 많은 땀과 힘이 필요했다. 자연 그의 숨은 당장 쓰러질 사람처럼 헐떡거렸다.

‘감히! 감히! 가~ 암~ 히!’

“크윽!”

이상윤은 쾌감이라기엔 이상한 신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서서히 여자 위로 쓰러졌다.

두 번째 쾌락은 지금까지 수없이 느꼈던 쾌락과 달랐다. 뇌를 관통했지만 짜릿함이 아닌 찌릿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노근함이 아닌 무기력함. 게다가 좌측 뇌에서 우측 어깨, 팔로 찌릿함이 점점 내려왔다.

‘…뭐, 뭔가 잘못됐어. 119를 불러!’

“…….”

입을 열려고 했지만 입도 마비가 된 듯 제대로 열리지가 않았다.

여자는 자신의 가슴으로 쓰러진 후 일정 시간이 지났음에도 일어나지 않자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그를 밀어 옆으로 눕혔다.

“드디어 끝났어요? 이제 그만 자요. 난 샤워를 하고 거실에서 술 한 잔 먹어야겠네요. 쪽!”

‘아냐! 당장 119를 불러! 당장!’

아무리 외치려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그의 몸은 점점 굳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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