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35. TV 출연
이틀간 강제 휴일을 마치고 병원에 왔다. 군인의 병실을 가장 먼저 들러 물었다.
“주말 동안 어떠셨어요?”
“진통제 없이도 편히 잤습니다. 이제 다 나은 건가요, 선생님?”
“예. 제가 할 수 있는 조치는 다했습니다.”
“퇴원해도 되는 겁니까?”
“그러기에 앞서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혹시 3D 프린터로 의족 테스트를 해볼 생각인데 참여할 생각 있으십니까?”
하란은 생각하는 일은 바로 해야 하는지 바로 의수, 의족 만드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의족 테스트라… 병원에서 하는 겁니까?”
“아뇨. 일단은 개인적으로 하는 겁니다. 테스트에 참여하시면 지금보다 편안한 의족을 얻을 수 있을 있을 겁니다.”
“해보고 싶은데, 이젠 일터로 복귀를 해야 해서요.”
“오늘 점심때쯤 병원으로 한 사람이 올 겁니다. 그 사람에게 협조해 주신 후 그다음부터는 필요할 때 그 사람이 회사로 방문할 거예요.”
“…그렇다면 해보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연락하겠습니다.”
병실을 나와 민규식에게 전화를 걸어 원장실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올라갔다.
그가 던진 화두에 대답도 할 겸 의족에 대한 말도 해야 했다.
“어서 오게. 앉지. 목소리도 표정도 좋네.”
그는 흐뭇하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 정리는 됐나?”
“예. 이기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저를 위해 환자를 치료할 생각입니다.”
“자네를 위해서라……. 정답은 없는 문제니 이기적으로 들리지 않네. 확신이 선 것 같으니 다시 묻지. 자네라면 경훈일 어떻게 했겠나?”
“이미 영면에 든 아이 얘기는 하기 싫군요. 다만 비슷한 경우가 있다면 제 치료 능력 밖이라면 보호자에게 충분히 설명하겠습니다. 전 고치는 사람이지 결정은 보호자의 몫이니까요. …만에 하나 제가 결정할 일이 온다면 그 순간 최선의 일을 할 겁니다.”
“자네의 결정에 후회는 없겠나?”
“없습니다!”
“자네 생각은 잘 들었네. 지금이라면 어떤 환자라도 맡길 수 있겠어. 역시 쉬는 것만큼 좋은 위로가 없었나보군. 허허!”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두삼은 의수, 의족에 관한 얘기를 했다.
“오! 주변에 능력자가 있나 보군?”
“능력자긴 하죠.”
“해도 좋네. 다만 테스트가 끝나고 회사를 만들 땐 병원 이름으로 하게.”
“회사가 아니라 자선단체로 만들 생각입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네.”
“…네?”
좋은 일을 한다는데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안 된다는 말이 나오니 당혹스러웠다.
“오해 말게. 자네의 생각을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아니네. 자선단체를 무작정 만들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네. 의족, 의수에 투자하고 운용하는 회사도 생각해야지.”
“그들의 경영을 고려하자는 말입니까?”
“아니. 만일 자네가 대단한 물건을 값싸게 만들어내면 어차피 그들은 시장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어. 근데 그렇지 않고 무작정 자선단체를 만들어 공짜라 물건을 준다고 어떻게 될까? 그들은 당연히 반발할 걸세. 그리고 자넬 괴롭히려 들 걸세.”
“…복잡하군요.”
“세상은 원래 그렇다네.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어서 선의로 하는 일도 문제가 되네. 그러니 일은 나에게 맡기고 자네는 치료에 전념하게. 그리고 자네 재산이 얼마나 된다고 몇 명에게 해택이 갈 수 있겠나? 이런 일은 나라에서 주는 지원금을 적당히 받고 해야 최대한 많은 이들이 혜택을 누리게 되네.”
알 수 없는 영역이다. 하란과 얘기해 봐야겠지만 민규식의 말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겠습니다.”
“허허! 그러게. 그나저나 휴가 자주 보내줘야겠구먼. 아주 기특한 생각도 하고 말일세.”
민규식은 아주 흡족하다는 듯 말했다.
일이 갑자기 커지는 것 같긴 했지만 신경 쓸 일은 오히려 줄어드는 것이니 나쁠 것 없었다.
전화를 했다. 혹시 하란이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자긴 개발만 하면 된다고 오히려 좋아했다. 두삼 자신 때문에 허락은 했지만 생각할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 친구도 좋아하네요.”
“다행이군.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방송 촬영이 이번 주인가?”
“네. 수요일입니다.”
“잘하고 오게.”
노형일의 방송 날짜가 잡혔다. 다른 건 이미 다 찍어뒀으니 스튜디오에서 촬영만 하면 됐다.
원장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앞에서 기다렸다. 한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민청하의 모습이 보였다.
“어! 오빠. 아빠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응. 너도?”
“하아~ 퇴근을 못 해서요. 아빠 편으로 옷 좀 부탁했거든요.”
그녀는 옷이 잔뜩 든 쇼핑백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고생이 많네. 시간 빌 때 와. 마사지해 줄게.”
“오빠도 바쁘잖아요. 몇 번 갔다가 그냥 왔어요.”
“그랬어? 미안. 다음엔 안마실에 말해둘 테니 내가 없으면 그곳에서 받아.”
“본관 의사들 안마실 출입금지 된 거 몰라요? 아니, 한방센터 내에 쓸데없이 출입 금지예요.”
매일같이 들르는 곳인데 금시초문이었다.
“한방센터 선생님들 중에 본관 선생님들이랑 안면이 있는 분들이 오빠처럼 얘기했고 그래서 몇 분이 갔나 봐요. 그러다 아빠한테 걸렸어요. 직원을 누가 마음대로 부리냐고 난리 났죠. 뭐, 덕분에 휴게실에 안마의자가 생기긴 했지만.”
“그랬어? 난 왜 몰랐지?”
“바쁘니까요.”
정답이었다.
“난 부탁하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어. 가게 했던 사람이 공짜로 설마 공짜로 부려먹겠어?”
“아무튼 출입 금지. 다음에 갈 땐 전화하고 갈게요.”
“그게 낫겠다. 참! 너 혹시 임동환 선생이랑 사귀냐?”
“…왜요?”
민청하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얼른 말을 이었다.
“에이~ 일 때문에 만나는 거예요. 임 선생님이 마취술을 잘하잖아요. 우리 흉부외과가 이미 침 마취술로 수술을 한 경험이 있고요. 그래서 다시 임상 수술을 계획하고 있거든요.”
“아하~ 그랬구나.”
“근데 그게 왜요?”
“아냐! 그냥 궁금해서. 엘리베이터 다시 왔다. 가볼게. 수고해.”
“오빠도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두삼을 보며 민청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중얼거렸다.
“이 정도 됐으면 미끼를 물 때도 된 것 같은데 쉽지가 않네. 질투 작전을 더 해야 하나? 아님 내가 매력이 부족한가?”
그녀는 반짝이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큭! 다크서클. 게다가 냄새나는 옷가지나 들고 다니는 사람에게 무슨 매력을 느끼겠어. 악!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또 혼나겠다.”
민청하는 옷을 받으러 서둘러 원장실로 뛰어갔다.
* * *
오늘은 촬영일.
차를 타고 방송국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라 차가 막히지 않아 좋았는데 주차장 입구가 제법 막혔다.
드나드는 이들을 철저히 검문을 하다 보니 생기는 일이었다.
자신의 차례가 되어 창을 내렸다.
“오늘…….”
“아!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촬영 잘하세요.”
무슨 일로 왔는지 물을 거라 생각하고 대답하려는데 주차장 관리인이 다른 연예인이라 착각을 한 모양이다.
“얼굴 때문은 아닐 테고 차 덕분인가?”
비싼 차를 타고 다니다 보니 차선을 옮기면 신기하게 잘 피해주고 어딜 가든 더 친절한 기분이다.
아무튼 편하게 들어왔으면 되는 일, 주차를 하고 옷가지가 든 가방을 챙겨 방송국으로 들어갔다.
방문증을 받아 박기영이 말해준 층으로 올라가자 스태프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뉴라이프’ 촬영 때문에 왔는데 어디로 가면 됩니까?”
“제가 그쪽으로 가는 중이니 따라오세요.”
그를 따라가면서 주변을 살펴보니 안내 표시만 따라가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여기가 출연진 대기 방입니다. 이름이 적혀 있는 방에서 쉬고 계시면 됩니다.”
“번거롭게 해드렸네요. 감사합니다.”
방문 앞에 붙어 있는 종이를 보다가 자신의 이름만 붙어 있는 방을 발견하곤 안으로 들어갔다.
넓지 않지만 편안해 보이는 소파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하나 딴 후 스마트폰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박기영이 들어왔다.
“와 있었네?”
“방금 왔어요.”
“그럼 오늘 방송에 대해 간단히 설명할게.”
“피곤해 보이는데 숨 좀 돌려요.”
“촬영 끝날 때까진 그럴 틈이 없다. 잠시 후에 분장팀이 올 거야. 분장 받으면 바로 촬영팀이 와서 간단히 인터뷰를 딸 거야. 질문은 대략 스무 개쯤인데 이거야. 읽어보고 대답할 거 생각해 둬. 그다음 좀 쉰 후에 촬영에 들어갈 거야. 촬영은…….”
말하다가 숨넘어가겠다 싶을 정도로 그는 빠르게 설명을 했다.
“궁금한 점은?”
“촬영 전에 노형진 씨 봐야 해요. 할 게 있거든요.”
“촬영 들어가기 전에 보내줄게. 다른 질문 없으면 나중에 보자.”
수고하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는 사라졌다.
“다들 바쁘게 사네.”
곧장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려 카페에 들러 출석 체크를 하고 연예 면을 살폈다. 그러다 나연섭의 팀이 데뷔를 하기 전이라는 기사를 봤다.
“헐~ 이 자식 데뷔를 하는데 형한테 연락도 안 해? 다 나으면 끝이라는 거냐?”
마침 시간도 있겠다 연락을 했다.
웬일로 즉각 받았다.
-왓썹, 맨!
“…안 보는 사이에 세상 살기 좋아졌나 보다?”
-하하하! 형 덕분이죠. 하란이 누나랑, 효원인 누난 잘 있죠?
“궁금하면 찾아오든가. 갈 때 헤어지기 싫다면서 징징거리던 놈이 연락도 없냐?”
-형, 그동안 아파서 못 한 거 따라잡으려고 죽을 둥 살 둥 노력해야 했어요. 거짓말 안 하고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곤 연습만 했다고요.
억울해하는 말투가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축하한다. 데뷔한다며?”
-헤~ 그 기사보고 연락했구나. 고마워요, 형. 데뷔하고 시간 되면 꼭 찾아갈게요.
“그래, 형이 맛있는 거 사마. 근데 데뷔하고 또 얼굴에 손댈 생각하는 거 아니지?”
-제가 미쳤어요! 또 수술을 하게. 그냥 이 얼굴로 평생 살 겁니다. …뭐, 시술은 조금 받아야겠지만.
“죽기 전엔 못 고친다더니. 네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그새 잊은 거냐?”
-결심은 했는데 여기 오니 또 슬그머니 부족하다고 느끼네요. 하게 되더라도 형한테 상담 받고 할게요. 약속해요.
어려서 겁이 없는 건가.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악연도 인연인 것을.
“후우~ 시술 받고 싶으면 연락해. 형이 엄청 실력 좋은 선생님 알게 됐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받으려고 해도 연락하고.”
-헤헤! 역시 형밖에 없네요. 이제 연습실 들어가 봐야 해요. 나중에 봬요.
“그래. 열심히 살아라.”
다시 성형을 생각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열심히 살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 질문지.”
너무 정신없이 말하고 가는 통에 잠깐 잊고 있었던 질문지를 봤다.
그냥 바로 질문을 받았다고 해도 대답할 수준.
“카메라 앞에선 좀 다르겠지.”
나름 대답을 생각하고 있는데 분장사가 들어왔다.
“한두삼 선생님이시죠? 분장해 드릴게요. 혹시 원하는 스타일 있으세요?”
“분장사님께 맡길게요.”
약은 약사에게 분장은 분장사에게.
“그럴게요. 선생님처럼 동안에 피부가 하얀 분은 옆머리를 바싹 치고 윗머리는 약간 러프하게 하는 게 어울리실 거예요.”
머리 손질과 화장이 끝났을 때 왜 분장사, 스타일리스트라고 불리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하고 다니세요.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거울 속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 문을 열고 나갈 때쯤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얼른 셀카를 찍었다. 그리고 하란에게 보냈다. 남들이 할 땐 유치한 짓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그저 즐겁다.
번개같이 온 문장과 사진 한 장.
[우와! 내 애인 잘 생겼네. 종종 그런 스타일을 해도 되겠는 걸. 촬영 잘하고 와.]
“하란인 일상이 화보네.”
그저 책상에서 웃는 얼굴로 찍은 사진에 불과한데 화보가 따로 없었다.
잠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노닥거리고 있는데 엄 PD와 촬영팀이 들어왔다.
촬영팀이 방 한 켠에 검은 막을 설치하는 동안 잠깐 얘기를 나눴다.
“한 선생, 꾸며놓으니 마스크 좋은데? 어떻게 의사 패널로 계속 나오는 거 어때?”
“입에 발린 칭찬 같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네요. 한데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죠.”
“왜, 잘 어울리는데.”
“엄 PD님이 좋게 봐주시니 그렇죠.”
“농담이 아냐. 생각해 봐. 정 힘들면 괜찮은 의사 좀 시켜주든가.”
장려령을 말하는 것 같다. 하여간 어지간히 집요하다. 그래서 딴 사람을 소개했다.
“성형외과 선생님 중에 괜찮은 분 있어요. 40대이긴 하지만 PD님이 말하는 마스크가 좋으신 분이죠.”
“음, 성형외과 쪽은 지원자도, 의사도 너무 많아. 그리고 썩 내키지도 않고.”
“그럼 어쩔 수 없죠.”
“준비됐네. 옷 갈아입어요.”
포기한 건지 한 발 물러선 건 화제를 바꿨다.
검은 천을 배경으로 자리에 앉자 카메라 한 대가 앞에 놓였다.
“이곳을 보면 돼. 시작하자.”
조연출이 카메라 앞에 다가와 슬레이트를 쳤다.
“노형진 씨를 처음 봤을 때 어땠나요?”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초고도비만으로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내부가 엉망이었습니다. 스스로 걷는 것조차 힘겨워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셨나요?”
“노형진 씨가 도와준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었죠?”
“하하! 강제로라도 살이 빠지게 만들었을 겁니다. 물론 방송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상황이었으니 그럴 일은 없었겠죠.”
대답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엄 PD가 대답을 하도록 유도하면서 어렵지 않게 끝낼 수 있었다.
똑똑똑! 똑똑똑!
인터뷰 촬영을 마치고 잠깐 쉬는 사이 또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촬영팀이 아닌지 계속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실례합니다.”
의사 가운을 입은 처음 보는 사내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