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34. 사람은 죽는다(3)
지천에 깔린 각종 열매와 약재로 할아버지는 매년 술을 담갔다.
중학교 때 몰래몰래 훔쳐 먹어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매년 담는 그 많은 술을 왜 담고 누가 먹었을까, 라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어린 시절 가끔 오줌이 마려워 늦은 밤에 깨면 할아버지는 술을 기울이곤 하셨는데 어쩌면 매일 밤 그렇게 드셨는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도 익숙해지지 않으셨을까?”
크리스털 잔에 담긴 노란 술을 보다가 입으로 가져가 털어 넣었다.
꿀꺽꿀꺽! 단숨에 술을 비운 두삼은 다시 술잔을 채우며 중얼거렸다.
“거짓말쟁이. 술을 마시면 괜찮을 것처럼 말해놓고. …부족해서 그런가.”
술잔 가득 따른 후 다시 단숨에 비웠다.
“너무 급하게 드시네요. 얼음이라도 넣어서 마셔요.”
현재 있는 곳은 노대우와 함께 와서 마셨던 그때 그 바였다. 예쁜 바텐더는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얼음을 잔에 넣어줬다.
“좀 취하고 싶은데 취하질 않네요.”
“취하고 싶으면 시간도 함께 마셔야 해요. 잠깐만 기다려 봐요. 그럼 취할 거예요.”
시간과 함께 마셔야 취한다라…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겐 확신할 수 없다.
뇌전증 약효를 가진 음식을 찾기 위해 내부를 살펴보는 게 습관화가 된 건지 술을 마시는 지금도 내부를 살펴보고 있다.
한데 술이 내부로 들어가자 기운들이 열심히 간의 해독 작용을 도왔다.
“가만히 두면 시간은 절대 마시지 않을 것 같으니 제가 잠깐 도울게요.”
“어떻게요?”
“제가 두삼 씨의 직업을 맞춰볼게요.”
“대우 형에게 들은 거 아니고요?”
“노 주임님 요즘 저희 가게에 잘 안 와요.”
“왜요?”
그녀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한데 왠지 알 것 같았다. 고백을 했는데 차인 게 분명했다.
“매몰차게 거절한 모양이군요?”
“매몰차게까진 아니지만… 확실하게 거절하는 게 서로를 위해서 좋잖아요. 그건 그렇고 손을 줘볼래요?”
손을 내밀자 그녀는 손을 잡더니 이리저리 살폈다.
“손이 여자 손처럼 부드럽네요. 험한 일을 하는 것 같지 않네요. 그리고 타고난 것도 있는데 관리를 꽤 열심히 하는 것 같고요. 그에 비해 팔의 근육은… 휘익! 소도 때려잡겠는데요.”
“풉!”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도 때려잡겠다는 말이 왜 이렇게 웃긴지 모르겠다.
“계속 만지고 싶은 팔인데 더 만졌다간 오해하겠죠. 이번엔 얼굴. 음, 해를 보는 직업은 아니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위기.”
입을 쉬지 않고 요리조리 살피는 모습에 술을 마시지 않고 기다렸다.
“팔의 근육 때문에 헷갈리네요.”
“힌트를 줄까요?”
“아뇨. 이미 어느 정도 결론이 나왔어요. 오케이! 확신이 들었어요. 두삼 씨, 의사죠? 그것도 한의사.”
“어떻게 알았어요?”
“호호! 많은 사람들을 보는 직업의 특성상 촉이 좋다고나 할까요. 사실 팔의 근육 때문에 마사지사인 줄 알았어요. 한데 엄지와 검지, 중지에 살짝 굳은살이 있더군요. 그리고 지금 짓고 있는 표정 의외로 많이 봤거든요. 근처에 병원이 있잖아요.”
“아!”
“너무 많이 마시진 마세요. 천천히 마시게 할 분이 온 것 같으니 전 이만.”
그녀는 생긋 웃곤 잔을 하나 더 세팅을 해주곤 다른 손님에게로 갔다.
‘천천히 마시게 할 분?’
뭔 소린가 싶어 뒤를 돌아봤더니 민규식이 서 있었다.
“원장님! 여긴 어떻게?”
“우울한 표정으로 퇴근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왔다네. 바텐더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줄 알았으면 그냥 갈 걸 그랬나 봐.”
“바텐더가 저한테만 신경 쓸 수 있나요. 앉으세요. 스트레이트로 드려요?”
“허허! 난 술로 풀진 않는다네. 얼음 많이 넣어서 언더락으로 주게.”
“…노상철 선생에게 들었습니까?”
“자긴 위로에 익숙하지 않다고 좀 해달라고 하더군. 술을 마시라고 했다며?”
“좋은 말씀도 해주셨는데 실행할 수 있는 게 술을 마시는 것밖에 없더군요.”
“후후! 차츰 바뀌겠지. 마시세. 나도 젊었을 때 어지간히 마셨다네. 지금은 그저 즐기는 정도네.”
즐기는 정도라는 이가 무조건 원샷이었다. 오히려 혼자 마실 때보다 더 마시는 것 같았다.
“마실 만하니 떨어지는군. 바텐더! 여기 이것보다 맛있는 걸로 한 병 더 주게.”
“이런! 취하게 만들려는 오신 분이셨네요?”
“후후! 직업은 잘 맞추는데 어느 정도 술을 마시는지는 모르는 모양이군요. 걱정 마시오. 이 친구 두 병 정도 마셔도 끄떡없을 테니.”
“그런가요? 그럼 드려야죠.”
새로운 병이 오자 민규식은 병을 따고 술을 따랐다. 그리고 다시 원샷! 위로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술을 먹이러 온 모양이다.
두 번째 병이 3분의 1쯤 남자 그제야 그는 속도를 늦추며 물었다.
“환자는 편하게 갔나?”
오늘 응급실에서 본 환자에 대한 얘기였다. 아니, 이젠 환자가 아닌 고인이다.
구급차에서 내리자마자 환자의 몸을 스캔한 후 출혈부터 잡으려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관 삽관도 하기 전에 어레스트가 왔다.
제세동기로 멈춘 심장을 살려냈지만 5분도 되지 않아 다시 심장이 멈췄고 그게 끝이었다.
거의 모든 뼈가 골절이 되고 그 뼈들이 장기에 박혀 있었다. 거기에 뇌마저 3분의 1이 찌그러져 있는데 고통은 느껴지는지 온몸에 힘을 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출혈? 몸의 모든 혈관을 다 막아버리지 않는 이상 멈출 수 없는 수준인데 뭘 한단 말인가.
게다가 한쪽을 막으면 압력 때문에 다른 곳에서 출혈이 일어났었다.
“…모르겠습니다. 고통스럽지 않게 마취는 시켜줬는데 편하게 갔는지…….”
환자의 마지막 표정은 자살을 성공했다는 안도감인지 아니면 고통을 없애줘서인지 편안했다.
“최선을 다했으면 그걸로 된 걸세.”
“압니다. 근데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릴까요?”
“나도 아직 사망 선고를 내리고 나면 먹먹해지는데 뭘. 다만 기다리고 있는 환자를 위해 다시 움직이는 것뿐이야. 스스로 일어나야 해.”
“그야 당연히 알죠. 근데 위로를 해주러 오신 거 아닙니까? 위로치곤 약하네요.”
“난 이미 해준 걸로 알고 있는데?”
“해주긴 해주셨죠. 근데 제가 이해를 못 했으면 어쩌시려고요?”
“사람이 언젠가 죽듯이 자네 또한 언젠가 이해했겠지.”
“참, 위로가 되네요. 그만 일어나시죠. 어차피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일이라면 술을 마신다고 해결될 것 같진 않네요.”
“왠지 위로가 안 되었다는 표정이네. 안아줄까?”
“…아뇨!”
화장실에 다시 가 울지언정 남자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질색하긴. 나라고 좋아서 하는 말인 줄 아나? 혹시 집에 가서 마음이 정리되지 않거든 내일 오후 3시쯤 내 방으로 오게.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네.”
도대체 뭘 보여주겠다는 건지.
그나저나 두삼은 일어났는데 민규식은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앉아 있었다.
“안 가십니까?”
“술을 남기고 가면 쓰나.”
“킵해도 됩니다.”
“예쁜 바텐더를 번거롭게 하면 쓰나. 그리고 오늘 나도 술로 위로 좀 받아야 할 일이 있어서.”
“…원장님이 맡으신 분은 편하게 가셨습니까?”
“후후! 모르겠네. 다만 최선을 다했네.”
두삼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왜? 가지 않고?”
“혼자보단 둘이 낫지 않습니까? 물론 위로는 못 해드립니다. 제 코가 석자라.”
“후후! 마시세.”
두 사람은 결국 세 병을 비우고 나서야 일어났다.
* * *
오후 세 시, 이방익에게 양해를 구한 후 원장실을 찾았다.
양주 세 병을 비운 사람이 만나 싶을 만큼 멀쩡한 모습으로 민규식은 책을 읽고 있었다.
두삼은 들고 온 한약을 테이블에 올렸다.
“뭔가?”
“어제 보니 신장 쪽이 안 좋으신 것 같아서요. 한방센터 약재가 아닌 집에 있는 약재로 달인 겁니다.”
“누가 뭐랬나? 아무튼 고맙네. 근데 이걸 만들 정도면 잠을 못 잤겠네?”
“술기운 때문인지 잠이 안 오더군요. 그래서 술을 담그다가 겸사겸사 달여봤습니다.”
“술이 익으면 혼자 마시지 말게. 끙차! 가보세. 참! 그전에 이 옷으로 갈아입고.”
그가 준 건 평범한 체육복이었다.
웬 도깨비장난인가 싶다가도 민규식의 진지한 표정에 말없이 갈아입었다. 그리고 다 갈아입고 그를 따라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수술실. 한데 수술실 입구에서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보호자 대기실로 들어갔다.
“저기 구석 자리에 앉아서 1시간만 있게.”
“……?”
“부탁함세. 1시간만 이 방에 있는 이들을 잘 살펴보게.”
“…알겠습니다.”
그가 가리킨 곳은 멍하니 앉아 있는 부인 옆이었는데 누군가가 위급한 수술을 하는지 얼굴이 좋지 않았다.
‘후우~ 뭔가 의도가 있겠지.’
자신이 양태일에게 하는 명령과 비슷했기에 대기실에 앉아 사람들을 살폈다.
대기실 사람들의 행동은 대체로 비슷했다.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별표로 표시된 환자명과 수술실 시간이 적혀 있는 전광판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거나, TV 혹은 스마트폰을 보면서 안절부절못하는 이들.
어떤 수술인지 전광판에 나와 있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에서 위급 정도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고 수술이 잘되길 바라는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보호자들의 간절함을 느끼고 기분을 털어내라는 뜻인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느끼는 바는 있었다.
“…죽어줘. 아니, 경훈아, 엄마가 미안해. 살아줘.”
옆에 앉아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낮은 목소리였다.
곁눈질로 옆을 봤다. 들어올 때와 다른 없이 멍한 모습으로 전광판을 보고 있는 아주머니.
다른 점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중얼거림은 때론 들리지 않았고 때론 들렸는데 제 정신이 아닌 듯했다.
“이런 생각하는 엄마를 원망해도 좋아. 근데 아빠와 날 위해서… 그만 편안해지렴. 아, 아냐! 엄마가 미쳤나 봐. …용서해 주렴. 이겨내. 제발… 제발… 이겨내.”
“……!”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듣고 있는 자신마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슬퍼지는 음성이었다.
두삼이 보기에 그녀는 오열을 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자식이 죽기를,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
두삼은 계속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투, 표정, 꼭 쥔 손에 담기 절절함에 더 들었다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얼른 일어나 대기실을 나갔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진정시켰다.
어느새 1시간이 지났을까, 민규식이 왔다.
“표정을 보니 들었나 보네.”
“예? 혹시 저기 저분이 하는 말 들으라고 보내신 겁니까?”
대기실의 아주머니를 가리키며 묻자 민규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런 겁니까?”
“따라오게.”
그는 이번엔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수술실 한곳의 창 앞에 서서 말했다.
“저 애가 경훈이야. 제거해도 계속해서 커가는 뇌종양으로 벌써 뇌의 3분의 1일 덜어냈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경훈이가 처음 뇌종양 판정을 받은 건 5살 때였어.”
“네? 지금 보기엔 10살이 넘어 보이는데요.”
“12살이야. 수술만 다섯 번째지. 문제는 첫 번째 수술에서 이지를 잃었고, 두 번째 수술에서 다리를 잃었네. 그 다음 딱한 사정에 우리 병원의 기금을 받아 무료로 치료를 받고 있지.”
“…….”
“근데 말이야. 모든 돈을 다 대줄 수가 없다네. 두 번의 수술로 빚진 돈을 갚기 위해,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저 애 아버지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네. 야간 작업을 마다하지 않고 비는 날엔 대리운전도 한다네. 엄만 꼼짝없이 아이에게 모든 시간을 할애해야 하고. 게다가 아이가 좋아질 확률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닐세. 현재 엄마, 아빠도 알아보지 못하고 동물적인 본능만 살아 있지. 또한 더 나빠질 가능성은 있지만 더 좋아질 가능성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없네.”
오랜 병 수발에 효자, 효녀 없다고 한다. 자식이라고 다를까.
아무래도 내리사랑이다 보니 조금 더 오래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끝은 존재한다.
경훈이 엄마가 죽음을 기도함과 동시에 삶을 기도하는 모습이 이해가 됐다.
“한 선생 자네에게 경훈이네 가정의 상황을 보여주는 건 그들의 상황을 가여워하라고 보여주는 건 아니네. 의사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자네가 경훈이의 담당 의사라면 자넨 어떻게 해야겠나.”
“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더 이상의 수술을 거부하고 아이에게 안식을 주는 것이 그 가족을 위해서라도 옳았다.
하지만 감성은 아이를 살리라고 말한다.
‘그 아주머니와 다를 바가 없군.’
대답을 못 하자 민규식이 말을 이었다.
“나라면 말일세. 포기했을 거네. 물론 현재 수술하고 있는 담당의는 다른 생각이지. 최선을 다해 살리는 것이 정말 최선일까? 물론 답은 자네가 정해야 하네. 그리고 답이 정해진다면 말해주게. 그땐 자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소개하겠네.”
“제가 준비가 덜 되었다고 하신 게… 환자의 죽음에 대한 문제였군요?”
“한의사라서 그런지 몰라도 자넨 환자의 죽음을 너무 두려워해. 언젠간 마주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솔직히 몰랐네. 내가 밀어붙이고 있다면 사과하겠네. 한데… 이 말 한마디만 하지. 사람은 죽네. 나도, 자네도, 저 아이도, 그 부모도.”
사람은 죽는다는 간단한 진리가 오늘따라 심장을 울린다.
두삼은 창 안쪽에서 호흡기를 달고 수술을 받고 있는 경훈이란 아이를 하염없이 봤다.
그리고 의사가 아닌 한 인간으로 기적이 있다면 저 아이가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건강해지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