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34. 사람은 죽는다.
뜨거운 기운이 총알처럼 빠르게 얼굴로 향해 달려가 말랑말랑한 노폐물에 푹! 하고 박혔다.
치이익! 노폐물을 조금 날려 버린 뜨거운 기운은 곧 열기를 잃고 크기가 줄어들며 사라져 버렸다.
푸푹! 치이이익~ 연이어 다시 박히고 사라지는 기운들.
반드시 뚫고 말겠다는 기운들의 의지를 노폐물은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뚫렸다.
“휴우~ 결국 하나를 뚫었네요.”
“…고생하셨습니다.”
“마무리를 하죠.”
두삼은 이준호의 눈 주위의 경락을 꾹꾹 누르며 마사지를 했다.
뜸, 침, 마사지, 거기에 안경까지 더해져야 오늘과 같은 작업이 가능했다.
또한 작업을 할수록 점점 묽어지고 있다는 점이 제거 가능성을 높이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뚫린 것이 어떤 효과를 낼지는 일단 두고 보기로 하고요.”
마무리를 지은 두삼은 걸음을 빨리해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루시, 하란이 안 바쁘면 연결해 줘.”
하란은 반지에 대한 고마움으로 루시를 차에 설치해 줬다. 감시인지 감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전화 통화하긴 편했다.
-바쁜 것 같지만 두삼 님의 전화는 꼭 연결하라고 했으니 연결할게요.
“예쁘기도 하셔라.”
-누가?
신호음도 없이 바로 연결되는 건 단점이다.
“누구겠어. 바빠도 연결하라고 한 사람이지.”
-난 또. 오는 중?
“아니. 오늘은 잠깐 들러야 할 곳이 있어. 박기영 형이 부탁한 건데 예전 중국에서 유학할 때 만난 장려령이랑 애를 만나러 가야 해.”
-풉! 무슨 설명이 그래? 그냥 일이 있다고 하면 되는 일이지.
“오해하지 말라고.”
-안 해. 오빨 믿어.
“예쁘기도 하셔라.”
-풉! 이번엔 뭐가?
“그냥 다. 믿음을 깨뜨리는 일은 없을 거야.”
-그거면 돼. 잘 다녀와.
전화를 끊고 빙긋이 웃고 있는데 루시가 말했다.
-두 분 다 지금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시네요.
“그래? 같은 기분일 테니까. 달콤한 사랑 노래로 틀어줄래?”
-같은 주문을 하시네요. 같은 노래로 들려 드리죠.
첫사랑의 설렘을 노래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 * *
“두삼아, 여기.”
호텔에 도착을 하자 로비에 있던 박기영이 반겼다.
“몇 층이에요?”
“2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경호원이 있으니까 조심해.”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 조심할 게 있나요. 대신 저도 실패하면 포기하세요.”
“알았어.”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 25층을 눌렀다.
“엄 PD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래요? 얼굴 예쁜 의사를 찾는 거라면 저희 병원에도 제법 있어요.”
“연극과를 나와서 그런지 꽤나 극적인 걸 좋아해. 널 1회에 내보내려는 것도 그 때문이고.”
“극적인 거야 그냥 만들면 되잖아요? 방송국 그런 거 잘하지 않나?”
“가끔 그럴 때도 있지만 사실만큼 극적이지 않아. 상황은 만들 수 있지만 분위기만큼은 도저히 안 되거든. 시청자들도 본능적으로 느껴.”
“그쪽 세계도 쉽지 않나 보네요.”
세상에 쉬운 일은 없나 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맞은편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두 사내 중 한 명이 말했다.
“이 층은 전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장려령 씨 만나러 왔습니다. 중국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는데 얼싼 오빠라고 전해주면 알 겁니다.”
“…여기에 머무는 건 어떻게 알고… 어! 당신은 그제 방송국에서 나왔다는 작가 아냐?”
박기영을 본 경호원들의 표정이 구겨지며 분위기는 금세 험악해졌다.
하지만 두삼은 박기영과 함께 올 때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얼른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려령이 얼굴을 보고 너무 반가운 나머지 방송국의 아는 형에게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나 봅니다. 저는 현재 한강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한의사입니다. 소란을 피우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전해줘서 만나기 싫다면 그대로 내려가겠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고 정중하게 얘기를 하자 경호원들은 살짝 고민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명이 어디론가 손짓을 했다.
그러자 옷은 비슷하지만 분위기가 다른 사내가 다가왔다.
“중국 분인데 유학했다면 중국어 잘할 테니 직접 말하십시오.”
“그러죠.”
두삼은 중국어로 려령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고 말했다. 한데 말하다 보니 어째 낯이 익다.
“아! 대학교에서 려령이 옆에 계셨던 분 맞죠? 이름이 …황강이고요. 가끔 제가 침 연습할 때 도와주셨잖습니까?”
“아! 얼싼! …한데 얼굴이 조금 달라졌군?”
“몇 년이나 흘렀는데요. 형님도 이제 나이든 티가 나는데요.”
“하긴, 마지막으로 본 게 8년 전인가? 한동안 여름과 겨울만 되면 려령이가 너 안 오냐고 물었었지.”
“다음부터는 못 온다고 말했었는데……. 많이 좋아졌습니까?”
“많이 좋아졌어. 잠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려령이에게 말을 전할게.”
다행히 아는 얼굴을 만나 쉽게 해결됐다. 물론 당사자가 만나지 않겠다면 끝이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들어오래. 따라와.”
황강을 따라 가는데 박기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중국 이름이 얼싼이야?”
“…아뇨. 친해지려고 제 이름이 하나, 둘, 셋이라고 알려줬더니 그때부터 얼싼이가 된 거예요.”
“아! 한두삼. 이, 얼, 싼. 얼싼, 입에 착착 달라붙네.”
“…….”
진짜 붙어볼까 잠깐 고민했다.
“들어가 봐. 뒤에 있는 친구는 여기서 대기하고.”
복도 끝에 있는 큰 문 앞에 이르자 황강이 말했다. 분위기를 느꼈는지 박기영이 쳐다봤다.
“형은 여기 있으래요. 들어가서 제가 말할 테니까 걱정 마시고 여기 계세요.”
“아~ 그럼 안 되는데.”
“친한 형이랑 같이 왔다고 얘기는 해볼게요.”
“꼭 얘기해라, 응?”
얼싼이라고 놀린 대가로 말을 안 할 생각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 눈에 익은 여자 경호원이 보였다.
“오랜…….”
인사를 하려할 때였다. ‘꺅! 얼싼 오빠!’라는 고주파 음과 함께 소녀에서 숙녀가 된 장려령이 뛰어왔다. 그리고 팔을 잡고 팔짝팔짝 뛰었다.
얼떨떨해하다가 예전 기억이 나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한데 예전과는 반응이 달랐다.
“어? 숙녀의 머리를 함부로 만지면 안 되지.”
“아! 미안. 예전 기억 때문에, 사과할게.”
“음, 특별히 얼싼 오빠니까 용서해 줄까? 오래 전부터 만난 사이이니 아빠도 이해해 줄 거야. 그동안 왜 안 왔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으, 응. 한국에선 군대를 가야 하거든.”
“아! 알아. 지오 오빠랑, 한타 오빠, 게로 오빠, 수현 오빠도 군대 갔지. 그래서 못 왔었구나. 난 또 날 잊은 줄 알았잖아.”
그녀의 입에서 연예인 이름이 줄줄 나왔다. 군대 간 한류 스타가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혹시 병원을 찾아오면 잘해줘야겠다.
그런데 얘기를 하다 보니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국말은 왜 이렇게 잘해?”
“후후! 오빠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몰래몰래 배웠어. 근데 안 와서 얼마나 섭섭했는데…….”
“미안.”
“아냐. 배우길 잘했어. 덕분에 한국 노래 듣고 한국 드라마 보고 그랬거든. 헤헤!”
‘휴우~ 이런 애를 TV에 출연시키겠다고?’
황강은 괜찮아졌다고 하지만 두삼이 보기엔 11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긴 예전에 7, 8살 정도였으니 나아졌다고 볼 순 있겠다.
그녀가 좋아하는 새콤달콤한 음료수를 마시며 대화를 계속했다.
“근데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네가 음악 방송에서 사람 살리는 영상을 봤거든. 솜씨는 여전하던데?”
“아냐!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어. 그나저나 얼싼 오빠는 실력 좀 늘었어?”
“물론 가르쳐 준 사람이 누군데.”
“당연히 나지! 호호호!”
과거와 달리 화장을 한 성숙한 외모로 어린애 같은 말투를 쓰니 처음엔 살짝 괴리감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대화를 계속하자 옛날의 어린 소녀처럼 느껴졌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얘기했다. 그러다 밖에 두고 온 박기영을 떠올리고 아차! 싶었다.
“참! 그런데 한국은 어떻게 온 거야?”
“아빠 따라왔어.”
“언제 가는데?”
“글쎄, 아빠가 현재 바보 같은 사람을 한 명 가르치고 있나 봐. 그래서 한동안 한국에 있을 거래. 근데 그 사람 진짜 바본가 봐. 아빠가 만날 멍청하다고 욕해. 옛날 오빠보다 더 심한가 봐.”
“하하… 그래?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가야겠다.”
“벌써? 오랜만에 만났는데…….”
“한국에 오래 있을 거라면서 다음에 다시 놀러올게.”
“진짜? 거짓말 아냐? 이번에도 몇 년 지나서 불쑥 나타나려는 거지? 그땐 안 만나줄 거야!”
“내가 거짓말을 왜 해. 의심스러우면 네가 전화해. 일할 땐 곤란하지만 일 끝나고 맛있는 거 사줄게.”
“아! 그러면 되겠구나! 난 또 괜히 걱정했네.”
전화번호를 교환한 후 일어났다.
작별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 박기영은 보이지 않고 웬 중화풍 옷을 입은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는데 마치 앞을 막듯이 서 있었다.
“누구?”
자신이 묻고 싶은 말이다. 황강이 정중한 자세로 귓속말을 하는 거 보니 장려령의 조부가 아닌가 싶어서 얼른 말했다.
“안녕하세요. 대학 때 려령이와 알고 지내던 한…….”
“자네가 얼싼이라고?”
아무래도 중국 이름은 얼싼으로 해야 할 모양이다.
“…예, 어르신.”
“려령이에게 들은 적이 있어. 실력이 안 좋은 오빠한테 침술을 가르쳤다고 했었는데 그게 자네였군.”
‘실력이 없는 게 아니라 중국어가 서툴러서 수업을 못 따라가서 그런 것뿐입니다만.’
려령이야 애니까 그렇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실력이 없다는 말을 들으니 발끈한다. 하지만 내뱉진 못했다. 그를 보니 할아버지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려령이랑 친했나?”
“그렇습니다.”
“그럼 한국에 머무는 동안 가끔 려령이랑 놀아주게.”
“자주는 못 해도 가끔 그렇게 하겠습니다.”
“혹시나 엉뚱한 생각은 말게.”
“경호원들과 함께 움직일 텐데, 행여나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동료는 로비에 있을 걸세. 방송에 출연시킬 생각은 없으니 그리 알고.”
방송국 때문에 왔다는 걸 알고 있다니, 설마 박기영을 협박이라도 한 건가?
“…저도 그렇게 전할 생각이었습니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한 후 로비로 내려갔다.
* * *
민규식이 처음으로 소개한 이는 발목 지뢰를 밟아 발목이 잘린 군인 출신의 환각지 환자였다.
“낮엔 그나마 괜찮은데 밤엔 술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간지럽습니다.”
초췌하고 술 냄새가 풍기는 듯한 자신 또래의 남자는 꽤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 보겠습니다. 의족을 벗어보시겠어요?”
사내는 꽤나 복잡하게 의족을 풀었다.
‘쯧! 영호 아저씨와 비슷하군. 근데 의족은 저런 것밖에 없나?’
TV에서는 로봇 의족이 나오고 3D프린터로 제작된 의족을 신고 뛰어다니는 이들도 있는데 자신이 보는 사람은 하나같이 걸을 때마다 잘린 부위가 아플 수밖에 없는 의족을 쓰는 건지…….
이유는 짐작이 갔다. 비싼 가격 때문이리라.
장애 등급을 받는 이는 국가에서, 의료 보험 대상자면 건강보험공단에서 일정 금액의 지원금이 나온다. 한데 그 금액으로는 제대로 된 의족과 의수를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자비를 보태서 사야 하는데 돈이 없다면 중국제 저가 제품을 쓸 수밖에 없다.
‘이런 건 국가 차원에서 저렴하게 공급해야 하는 거 아닌가? 게다가 이 사람은 군인이었잖아.’
모든 걸 국가가 할 수 없다지만 상황 자체가 조금 답답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병원이 정부 지원금을 받으니 국가에서 하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그의 다리에 손을 올려 주무르기 시작했다.
“…시원하군요.”
외부로 빠져나가는 기운을 막느라 병실이 너무 조용해서일까 사내가 중얼거렸다.
“혈을 자극하고 길을 잃은 맥을 막는 과정이거든요. 며칠 걸리겠지만 끝나고 나면 간지럽지 않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군요.”
“무릎 아래론 마취를 시켜둘 생각입니다. 혹시 잠이 안 오면 수면제 처방을 해놓을 테니 간호사에게 말하면 됩니다.”
띠링!
메시지가 왔다. 흘낏 보니 혈관외과의 전철희로, 남은 혈관이 거의 없는 환자가 있으니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20퍼센트쯤 막았기에 마무리했다.
“불편하게 걷다 보니 무릎, 골반, 허리가 전체적으로 좋지가 않네요. 안마실에 연락을 해놓을 테니 안마 받은 후에 쉬세요.”
천 간호사에게 말한 후 마스크를 착용하고 본관 내과로 향했다.
전철희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웬일로 마중까지 나와 계세요?”
“투석실에서 보기엔 조금 위험한 환자라서.”
“많이 안 좋나 봐요?”
“그렇기도 한데 다른 병원에서 온 환자라서. 아무래도 매번 보던 환자들과는 다르니까.”
치료실이라서 수련의들과 간호사들이 몇 명 있었다. 그러나 덤덤했다.
이제 마스크를 벗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부탁해.”
“네, 선생님. 환자분, 손 좀 잡겠습니다.”
손을 잡자 하얀 기운이 노인의 손으로 스며들었다.
‘휴우~ 혈관이 완전 엉망이네. 이 정도면 동맥경화도 아주 심할 텐데.’
생각과 함께 너덜너덜한 혈관에 기운을 덮어씌웠다.
“다 됐습니다, 선생님.”
“오케이! 그럼 주사를…….”
전철희가 투석용 주사기를 꽂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뒤에 있던 모니터가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질렀다.
삐삑! 삐이이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