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33. 인연(4)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가령, 건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건물을 가진 사람을 마치 적처럼 생각한다.
임대료를 턱없이 높여 받고 임차인을 피도 눈물도 없이 쫓아내는 사람으로 단정을 짓는다.
물론 그런 건물주도 있다. 그러나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다 막상 자신이 건물을 가지게 되면 그땐 이해가 된다.
건물에 대한 각종 세금과 노후화에 대한 감가상각,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임차인, 매달 내야 하는 은행 이자, 공실에 대한 걱정 등.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가 건물을 가지고 있다는 스트레스로 쓰러질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뜬금없이 이런 무의미한 생각을 하는 이유는 고정운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평생 이해할 수 없을지도. 100퍼센트 그럴 것이다.
“한 선생님? 한 선생님?”
김 비서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눈앞에 있는 이 건물이 제 것이라는 말을 하셨죠?”
“네. 나중에 병원을 할 때 쓰라고 하셨습니다.”
“…하하. 제가 생각하는 병원의 규모와는 너무 다르네요.”
“작습니까?”
재벌 비서라 그런지 간댕이가 재벌급이다.
“그럴 리가요. 너무 크다는 겁니다.”
강북에 있다고 하지만 10층짜리 건물이다. 얼마나 하는지 물어보기도 겁난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세금 처리까지 완벽하게 처리된 건물입니다. 건물 관리를 맡을 변호사 사무실을 알아봐 놨는데 혹시 알고 계신 곳이 있으면…….”
“없습니다. 제가 신경을 쓸 수 있을까 걱정이네요?”
“걱정 마세요. 맡긴다고 하시면 그곳에서 알아서 해줄 거예요. 물론 저도 신경 쓸 거고요.”
“제발 그래주세요.”
“들어가서 보시겠어요?”
“…아, 아뇨. 다음에 담담해지면 그때 보겠습니다. 지금 보면 쓰러질지도 모르겠어요.”
“건물 소속 직원들에겐 한 선생님의 사진을 보여줬으니 언제든 편하게 방문하셔도 돼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는데 1층 커피숍에 가서 얘길 나누죠.”
“또요?! …네네.”
포기다. 이제는 자신의 건물이 된 건물 1층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프렌차이즈 커피숍이라 딱히 둘러볼 것도 없었는데 두삼은 연신 두리번거렸다.
자신의 건물이라니 전혀 다른 느낌이랄까.
“지금이라도 둘러보실래요?”
“…아, 아뇨. 말씀하세요.”
“건물만 달랑 드린다고 병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셨는지 돈벌이가 될 작은 회사를 만들어주셨어요.”
“하하하… 회사라니, 제가 회사를 어떻게…….”
“화장지 납품 업체인데 딱히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이 건물 10층에 사무실이 생길 거고 직원은 한 명으로 하청 업체에서 파견하는 방식으로 할 거예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는 됐다.
기존의 납품 업체 사이에 자신의 회사가 끼어들어 차익만 챙기는 회사였다.
다만 현실 같지 않았다.
한참 멍하니 김 비서의 얘기를 들어야 했다.
“서류는 여기에 있어요. 공증까지 다 받아뒀으니 보관만 하셔도 됩니다.”
“…더 이상은 없죠?”
“더 있나 여쭈어볼까요?”
“…….”
아무래도 놀리는 것 같다.
김 비서는 병원까지 데려다준 후 떠났다.
멍하니 진료실로 들어가려는데 도 간호사가 표정을 보곤 물었다.
“나가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아, 네. 부자가 됐습니다.”
“호호! 로또 당첨금이라도 받고 왔어요?”
“비슷해요.”
“진짜요? 와아~ 대박! 그럼 조만간 술 얻어먹을 수 있는 건가요?”
“얼마든지요. 매일이라도 사드리죠.”
“피이~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해요. 이 선생님이 찾으세요.”
하긴 자신도 믿기지 않는데 그녀라고 믿을까.
짝! 이방익의 진료실로 들어가기 전에 양손으로 얼굴을 세게 때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차피 지금 가진 돈도 쓸 시간이 없는데 더 많아진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 아무래도 민 원장님이랑 얘기를 해봐야겠어.’
머릿속에서 돈을 털어내고 노크 후 안으로 들어갔다.
이방익과 이경도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서 와, 한 선생. 어디 갔다 왔다고?”
“네. 마무리 지을 게 있어서요.”
“볼에 손자국이 나 있는 것 보니 대충 짐작이 가는군. 젊다고 너무 문어발식으로 놀면 안 되지.”
“…그런 게 아니라…….”
“이해해. 나도 젊었을 때 그랬거든.”
“…….”
뺨을 너무 세게 때린 모양이다. 어떤 변명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닫았다.
“이경도 씨에겐 내 실력으론 안 돼서 자네에게 맡기겠다고 말했으니 이제부터는 자네 환자네.”
“…네. 제 진료실로 가시죠.”
혹시 원인을 파악하게 되면 넌지시 알려줘도 되는 일인데 왜 저렇게 급하게 처리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긴 그러면 더 자존심이 상할지도…….’
이왕 이렇게 된 거 그의 말처럼 자신의 환자라고 생각하고 진료를 하기로 했다.
“앉으세요. 일단 진맥부터 하겠습니다.”
“네. 이 선생님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예. 그리고 혹시 오해하실 것 같아 말씀드리는데 한의학이라는 것이 의원마다 조금씩 보는 영역이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잘하는 영역이 있고 이 선생님이 잘하는 영역이 다릅니다. 가령 어떤 병원에선 제대로 치료를 못했는데 다른 병원에 가니 갑자기 좋아졌다든가 하는 일처럼 말이죠.”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제 음식을 남자 분들보다 여자 분들이 더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해해 주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오로지 진맥으로만 이상을 파악해 보려고 했다.
‘모르겠다. 몸 관리도 꽤 철저하게 한 것 같은데.’
그의 몸은 건강 그 자체였다. 요리사가 극한 직업이라 체력은 필수라는 얘기를 얼핏 들은 것 같다.
두삼의 손이 하얗게 빛났다. 몸으로 들어간 기운은 빠르게 그의 머리 쪽으로 가며 머리를 스캔했다.
‘맙소사! 이게 뭐야!’
그의 얼굴에 있는 혈 몇 곳이 막혀 있었는데 웬 기운으로 짓눌려져 있었다.
마치 두삼 자신이 교통사고를 내려고 했던 깡패의 혈도를 막아놓은 것과 같은 기술이었다.
자신만의 기술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놀라운 건 자신의 장갑을 통해 가능한 기술을 누군가는 장갑 없이 해냈다는 것이다.
“…듣기론 자고 일어났더니 맛을 느끼지 못했다는데 사실입니까?”
“예. 그 전날 호텔 행사에 참여해서 귀빈들에게 음식을 대접한 후 너무 지쳐 바로 잠들었는데 뒷날부터 맛이 느껴지지 않더군요.”
“행사 진행 중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까?”
“음, 요리 도중 중국 요리사들이 제 말을 잘못 알아들어 실수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연계되어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손님의 음식에 소량의 복숭아 즙이 들어가서 소란이 일었었죠. 그 외에는 하루 종일 음식 준비를 했으니 특이할 것도 없고요.”
“잘 해결되었나요?”
“네. 알레르기 걸렸던 손님의 할아버지로 보이는 이에게 사과를 했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줬습니다.”
“혹시 그 노인과 신체 접촉이 있었습니까?”
“악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괜찮다는 듯 제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더군요. 한데 지금 얘기와 치료와 관련이 있습니까?”
“…아뇨. 조금만 더 보겠습니다.”
진맥을 하는 척하면서 생각에 빠졌다.
그 노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손녀의 복수를 사과를 받는 척하면서 한 것이리라.
‘우리 나라에도 숨은 실력자들이 많으니 중국이야 두말할 필요 없겠지.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보고 싶네. 그나저나 장갑의 힘을 쓰지 않고 나도 가능할까?’
생각을 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장갑을 벗을 수 없으니 애초에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를 가늠할 수 없다.
‘인연이 있다면 만나겠지.’
중국의 땅덩이를 생각한다면 죽기 전에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은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경도를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얼굴에 위치한 혈이 막히면서 혀의 감각 기관을 막은 것 같습니다.”
“…이 선생님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치료가 가능할까요?”
“얼굴 경락마사지와 시침, 뜸을 병행하면 사나흘이면 막힌 혈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입니까! 다행이군요! 저는 혹시 봉침을 맞아야 하나 했습니다.”
“드라마를 많이 보셨나 보네요.”
독사의 독이 약의 재료로 쓰이는 것처럼 독이 있는 봉독 역시 약효를 가지고 있다.
봉침의 대표적인 효능은 소염 진통 작용이다. 염증이 일어난 부위에 봉침을 맞으면 염증 세포가 감소하는 연구 결과가 있고 이미 많은 한의원에서 사용 중이다. 또한 향균, 혈액순환, 면역계 조절 등의 효과가 알려져 있는데 다양한 효과만큼이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알레르기 테스트를 한 후 처치를 하니 쇼크가 올 일은 드물지만 봉침의 효과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단점이 있다.
즉, 봉침에 대해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의원이 아니라면 약국에서 소염제를 사 먹는 게 낫다.
“그건 드라마적 장치일 뿐입니다. 혀에 잘못 봉침을 놓으면 더 큰일 납니다. 치료는 오늘부터 시작하시죠. 일단 침대에 누우세요.”
치료는 누르고 있는 기운을 제거하면 되니 지금 당장도 가능했다. 그러나 좀 더 살펴보고 싶은 게 있었다.
* * *
민규식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정한 후 찾아갔다.
그는 수술을 마치고 왔는지 꽤 피곤한 모습이었다. 다만 입에 걸려 있는 따뜻한 미소는 똑같았다.
“이 시간이면 커피를 제법 마셨을 테니 차를 준비해 뒀네. 앉게.”
“감사합니다. 그런데 언제 블랙스완의 사인을 받으셨습니까?”
그의 방 한쪽에 걸크러시, 블랙스완과 함께 찍은 사진과 사인이 걸려 있었다.
“어제. 청하 어릴 때가 생각나서 그런지 정말 귀엽더군. 걸크러시와 달리 건강은 이상 없다고?”
“다들 이십대 초반이잖습니까.”
20대 초반 한창일 때는 웬만큼 몸을 혹사하지 않는 이상 피곤해도 금방 회복이 된다. 괜히 나이든 사람들이 20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잘해주게. 연예계야 물들어 왔을 때 혹사시켜서라도 돈을 벌어야 하는 곳이니 어쩔 수 없지만 일단 우리 품으로 들어온 이상 망가지는 걸 최대한 늦춰야 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딸이 걱정되어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무슨 일 때문에 자네가 먼저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한 건가?”
“고정운 회장님이 주신 돈 때문입니다.”
두삼은 그에게서 받은 보상에 대해 말해줬다.
“허허허! 그 양반 통이 큰 건 알았지만 화끈하군. 축하하네. 건물주가 됐군.”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건물과 회사에서 나오는 돈을 병원 기금에 기부하고 싶습니다.”
“왜? 돈이란 생기면 생길수록 더 가지고 싶어지는 것 아닌가. 솔직히 자네가 가진 돈이 많다곤 할 수 없네.”
“적지도 않죠. 만일 차근차근 제가 모았다면 더 욕심이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디까지 벌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한데 지금 이대로 가면 돈의 노예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의 주인이 되면 모를까 노예가 되는 건 곤란하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는 하는데 자네 돈을 병원 기금으로 받을 생각은 없네.”
“네?”
“그 돈은 자네를 위해 쓰거나 모으게. 대신 자네 의술을 병원에 주게.”
“…이미 병원 소속입니다만.”
“설명이 부족했군. 이제부터 자네 의술을 돈이 되지 않는 일에 쓰라고 말하는 걸세. 원래는 자네의 돈에 대한 욕망을 충분히 채운 후 말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찬 모양이군.”
두삼은 이번엔 그의 말을 이해했다.
“이제부터 무료 치료를 하라는 말씀입니까?”
“맞네. 돈이 많은 사람들보다 돈이 없는 이들이 더 많이 아프다는 건 자네도 알 걸세.”
당연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몸에 이상이 있으면 바로 병원을 찾지만 삶에 좇기는 이들은 그 시간을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면 자연 병을 키우게 된다. 민규식의 제안은 마음에 들었다.
“하겠습니다!”
“허허! 급하게 생각하지 말게. 자넨 아직 준비가 덜 됐네. 그러니 간단한 것부터 천천히 하세.”
“부족한 게 있다는 겁니까?”
“때가 되면 알 걸세.”
“…말씀을 해주셔야 더 빨리 알지 않겠습니까?”
그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말해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직접 깨달아야 한다는 뜻인가?’
모르겠다. 문제 해결 하러 왔다가 새로운 문제를 얻고 가는 것 같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자가 됐으니 다음에 점심 한 끼 사게. 허허허!”
“그러겠습니다.”
원장실을 나와 한방센터로 가는 내내 자신이 부족한 것을 생각해 봤다.
두삼이 생각하고 있는 부족함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민규식이 알 리가 없다.
‘양의학의 지식? 아냐! 난 한의사인데 부족한 건 너무 당연해. 그라면 공부하게! 라고 말했을걸.’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라는데 말이 더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고민은 박기영의 등장으로 깨졌다. 그는 꽤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삼아!”
“…어, 형. 방송이 더 빨리 잡혔어요?”
“아니. 부탁 좀 하려고.”
“급한 일인가 본데 말하세요.”
“네가 장려령 좀 만나주면 안 되겠냐?”
“어디 있는 줄 알고… 그새 알아낸 거예요?”
“응. 국내 호텔에 머물고 있어. 근데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어. 방송국 힘으로 밀어붙여 보려고 했는데 다음 날 중국 외교부에서 항의 전화가 오더라.”
“안 만나겠다는 사람을 왜 그렇게 만나려고 하는 건데요?”
방송을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했던 사람이 할 얘기는 아니지만 국민의 알 권리라는 핑계로 뭐든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싫었다.
“경호원들에게 떠밀려 넘어지는 순간 나도 포기했다. 근데 엄 PD가 꼭 데리고 오라는데 어떻게 하냐. 너도 실패하면 나도 깨끗이 포기하려고.”
“만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알겠어요. 어딘데요?”
자신이 부탁할 땐 당연히 들어줘길 바라고 남이 부탁할 땐 이리저리 재는 것도 우스웠다.
한 번 만나서 얘기해 보는 게 뭐가 어려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