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33. 인연(3)
속옷만 입은 고연아는 전신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전의 몸매가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의 몸매는 연아 씨의 체형에 고칠 데가 없을 정도로 균형을 이루고 있어요.’
“그래봐야…….”
서문희의 말이 무색하게 타고난 쭉쭉빵빵 몸매와 비교하기 힘든 몸매다.
물론 예전과 비교한다면 나쁘지 않았다.
많은 돈을 들여 몸매 관리를 받고 운동도 했지만 타고난 체형 때문인지 한계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한계를 조금 벗어난 듯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 비서가 예전의 신체 사이즈대로 옷을 사왔는데 맞지 않아 새로 사러 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번엔 두삼의 목소리가 들렸다.
‘타고난 건 어쩔 수 없어요. 노력해야죠. 돈이 없이 태어났다고 투덜대고 있어봐야 돈이 생기지 않듯이 외모를, 몸매를 타고 나지 않았으면 투덜대기보단 노력을 해야죠.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요? 아뇨, 방법이 있어요. 스스로를 사랑해요. 아름답지 않으면 편안한 웃음을, 몸매가 좋지 않으면 당당함을 키우면 돼요. 그리고 솔직히 세상 너무 다 가지려고 하지 말아요. 재벌 3세가 세상 한탄은… 자자! 잡소리는 여기까지. 그래도 조금은 몸매가 좋은 게 더 좋겠죠? 최선을 다해서 예쁜 몸매를 가지게 해줄게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과 달리 그는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그녀의 몸 구석구석 주물렀었다.
“하여간 말은… 그래도 나쁘진 않으니까 한번 믿어보기로 할게.”
고연아는 두삼이 앞에 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자신의 웃는 모습을 보곤 얼굴에 집중했다.
과거 성형수술을 했을 때처럼 크게 바뀐 건 없었다. 하지만 그때보다 전체적인 인상이 좋아졌다.
특히나 웃을 땐 과연 자신의 얼굴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온화하고 여성스러워 보였다.
이틀간에 의논을 거쳐 완성된 얼굴.
그래서일까 자꾸 웃게 된다.
똑똑! 다시 거울을 향해 씨익! 하고 웃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옷 가져왔습니다.”
김 비서는 여러 개의 옷을 잔뜩 들고 있었다.
“수고했어요. 놓고 나가 있어요.”
“…네, 아가씨.”
김 비서는 그녀가 거식증에 걸렸을 때 무진장 괴롭혔던 이였다.
모든 스트레스를 그녀에게 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안해요, 언니.”
“…그게 무슨?”
“언니 괴롭힌 거요. 그땐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변명을 한다고 해서 용서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두고두고 갚을게요.”
“…아니에요, 아가씨.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거 잘 아는데요. 마음에 두지 마시고 잊으세요. 옷 입고 나오세요, 아가씨.”
김 비서가 나간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놓고 간 옷을 살폈다.
오늘만큼은 최고로 예쁘게 보이고 싶었기에 모든 옷을 입어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것으로 선택했다.
화장까지 마친 고연아는 나가려다 말고 문 앞에 서서 잠깐 심호흡을 했다.
그가 만들어준 웃는 얼굴로 떠나고 싶었다.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뱉은 그녀는 손잡이를 아래로 내리며 문을 열었다.
밖엔 한두삼과 그녀의 엄마, 김 비서, 경호원 등이 대기 중이었다.
그녀는 그들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두삼을 향해 웃었다.
두삼 역시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퇴원 축하해요, 연아 씨.”
“고마워요, 한 선생님.”
“건강이 안 좋을 땐 언제든지 들러요.”
“건강이 안 좋을 때만?”
“하하! 배고프거나 얘기할 사람이 필요할 때도 들러요. 우리 많은 대화를 나눴잖아요?”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들었던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 전 대화를 나눴다고 생각하는데?”
“마음대로 생각해요.”
다행이었다. 지독한 경험을 해서인지 마음이 제멋대로 날뛰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를 마치고 떠나려니 도저히 그냥 떠날 수가 없었다.
“…한 선생님,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요?”
“그래요.”
두삼은 웃는 얼굴로 팔을 벌렸고 고연아는 천천히 다가가 그를 안았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당신을 좋아하게 됐어. 알아, 당신이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거. 그리고 날 환자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 …고마워. 참아볼게. 도저히 못 참겠으면 얼굴 보러 올게. 그땐 그냥 친구처럼 받아줘.’
그녀의 마음을 듣기라도 했을까, 두삼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또 보자, 친구.”
친구로 한정 짓는 것이 섭섭하면서도 친구로 남을 수 있어서 기뻤다. 하지만 말은 퉁명스럽게 나왔다.
“…늙은이랑 친구 안 하거든.”
“쳇! 젊다고 유세냐? 그건 그렇고 친구 안 한다면서 왜 반말이야?”
“특별히 해주려고. 친구.”
“그렇다면 이해하지. 가라.”
“응, 이만 갈게. 엄마 가요.”
고연아는 돌아섰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차에 올랐을 때였다. 눈물이 주룩 흘렀다.
“…우니?”
고 여사가 조심히 물었다.
“으, 응. 지긋지긋한 병원을 떠나게 되어 기뻐서. 내가 병원이랑 의사 싫어했잖아.”
“그랬지. 얼른 집으로 가자.”
고연아는 싫다면서 차 안에서 멀어지는 병원을 몇 번이고 바라봤다.
* * *
“아프지 말고 잘 살아.”
병원 창문으로 떠나는 고연아의 차를 보며 두삼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바로 돌아섰다.
입원과 퇴원이 하루에서 수백 명씩 이루어지는 병원에서 환자 한 명이 떠나는 데 일일이 의미를 두는 것도 우스웠다.
진료실로 가자 환자들이 제법 많았다.
“천 간호사, 짧게 끝날 분들 위주로 들여보내 줄래요.”
“네, 선생님.”
저녁에 했던 뇌전증 치료를 고연아의 오전 치료 시간대로 바꿀 생각이라 장기간 치료하는 환자는 피해야 했다.
“한 선생님, 이거 드세요.”
양태일이 커피를 내밀었다.
“너 마시려고 산 거 아냐?”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이미 내민 커피를 거절하는 것도 이상하다.
“훗! 잘 마실게. 이걸 마신다고 실험체가 돼줄 거라는 생각은 버려라.”
“…네, 선생님.”
각성이라도 했는지 욕심이 장난 아니다.
시간만 되면 안마실로 직행해서 경락마사지를 배우는 것 또한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서두를 때 조심해야 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천 간호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선생님, 선생님과 비만클리닉 상담하려고 기다리는 환자분이 계신데 들여보낼까요?”
“헐! 일찍 오셨네요?”
두삼의 진료 시간은 운이 좋으면 오전 11시, 바쁘면 오후에 시작됐다. 그런데 현재 시간이 9시 30분이니 빨리 온 편이었다.
“거의 예약손님만 받으시니 선생님께 진료를 받으려고 기다리는 분들 가끔 계세요.”
“게으름 피우지 말라는 얘기 같네요.”
“인기가 좋으신 거죠.”
“좋게 해석해 줘서 고맙네요. 참!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사람들에게 뭐 먹고 싶은지 물어봐서 식당 좀 예약해 주세요. 밥 한 끼 사려고 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지금까지 못 샀네요.”
“점심 쏘시려고요?”
“네. 비싼 것도 괜찮으니 마음껏 고르세요.”
“2층에도 말해요?”
“거긴 따로 사거나 카드를 주려고요.”
안마실의 직원들과 함께 움직이려면 점심시간으론 아무래도 부족했다.
“네. 환자분 들여보낼게요.”
오랜 시간 기다릴 요량으로 온 환자를 어떻게 무시할까. 성의를 가지고 열심히 봐주는 게 예의였다.
진료를 보다 보니 오전이 후딱 지나갔다.
진료실 밖으로 나가자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엘튼이 말했다.
“한 선생이 점심 쏘기로 했다며? 초밥집 예약해 뒀는데 괜찮겠어?”
“양껏 배부르게 드세요.”
“후회하지 마. 간호사 언니들 장난 아냐. 지난번에 내가 쐈다가 월급이 반 토막 났어.”
“감자탕 쏘시고 무슨 반 토막이에요!”
엘튼의 담당 간호사가 발끈하고 외쳤다. 엘튼 역시 지지 않고 말했다.
“감자탕보다 술을 많이 먹었잖아. 와아~ 술을 완전 음료수처럼 먹더라니까.”
“쳇! 많이 마신다고 맥주도 못 시키게 해놓곤.”
“감자탕엔 소주지! 맥주랑 감자탕 어울린다고 생각해? 안 그래, 한 선생?”
간호사들과 마치 친자매(?)처럼 지내는 엘튼.
인턴까지 해서 13명이 우르르 초밥집으로 몰려갔다. 넓지 않는 곳인데 일행이 앉자 가게가 거의 찼다.
“술은 다음에 살 테니 오늘은 배부르게 드세요. 제 지갑 적정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선생님은 역시 누구완 달리 배포가 크다니까.”
“그 ‘누구’가 날 얘기하는 거야?”
“글쎄요? 제 발 저리시나?”
“흥! 안 저리거든. 자자! 우리 인턴들 많이 먹어.”
저렇게 싸우면서 같이 앉아 있는 건 뭔지.
두삼은 아무도 앉지 않은 이방익의 옆에 앉았다. 한데 음식이 맛이 없는 건지 초밥을 먹는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입에 안 맞으세요?”
“…으, 응? 아니. 잠깐 다른 생각하느라고.”
“안 풀리는 환자가 있으세요?”
그는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운지 잠시 망설이다가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이경도 씨. 검사란 검사를 다해봤는데 원인을 알 수가 없어. 느낌상으론 얼굴 쪽 경혈이 막힌 것 같은데 혀라 주무르는 데 한계도 있고.”
“갑자기 그렇게 된 건 아닐 거 아닙니까. 원인을 찾아보면…….”
“아니, 갑자기 그렇게 됐대. 중국에 초대를 받고 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대.”
“향신료 때문에 그런 건가? 왜 있잖아요, 중국 향신료 중 혀를 마비시키는 것 같은 거요. 아님, 가짜 술이라도 마신 건 아닌지.”
“나도 의심을 해봤지. 한데 아니래. 그는 뭐든 입에 넣으면 향료와 재료를 파악할 수 있는데 이상한 걸 먹은 적 한 번도 없대.”
“정말 곤란하겠군요.”
“나보다 그가 더 곤란하지. 요즘 손님들과 투자자들도 의심을 하는 모양이야. 하긴 나도 눈치를 챘는데 전문 미식가들이 눈치를 못 챌까.”
“점심시간에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식사부터 하세요. 요리사님, 오늘 가장 맛있는 초밥은 뭡니까?”
“오늘 들어온 참치 대뱃살이 좋습니다.”
“그럼 그걸로 각 테이블마다 주세요.”
“…가격도 가격이지만 예약된 것이 있어서 다 드리는 건 곤란합니다.”
“그럼 이분에게만 주세요.”
이방익의 기분도 풀어줄 겸 비싼 초밥을 추가로 주문했다.
“비싼 걸 뭣 하러…….”
거부의 말은 아니었다.
대뱃살 초밥이 나오자 그는 기분이 풀리는지 예전처럼 눈을 감고 음미했다. 한데 좋은 밥 먹고 헛소리 한다고 그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러지 말고 한 선생이 한번 보면 어때?”
“…제가요?”
“그래. 혹시 내가 맡은 환자라서 꺼려지는 거라면 걱정 말게. 이효원의 일로 자네 실력이 나보다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적을 만들고 싶으면 누군가가 못 고친 환자를 그가 보는 앞에서 고쳐라. 그럼 어떤 의사든 너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튀지 말라는 말로 어느 조직이든 비슷할 것이다. 모난 놈이 정을 맞는 법이니까.
전에 불법적인 방법을 이용해서 다른 과 과장의 잘못된 진료를 덮은 것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이 꼴 저 꼴 다 보기 싫다면 혼자 일하는 게 나았다. 일단 같이 일하는데 불편한 건 싫었다.
“이효원과는 다른 케이스인데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훗! 자존심이 상하는 건 자신보다 아래, 혹은 비슷한 상대라고 생각한 이에게 느끼는 감정이야. 엄두가 나지 않은 이를 보면 망가뜨릴까, 아님 옆에 두고 이용하거나 한 수 배울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 난 후자를 선택했어. 그러니 자네랑 일하고 있지 않나. 그리고 지금처럼 실력이 부족함을 당사자에게 고백하는 게 더 자존심이 상한다는 건 알고 있어?”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보낼 테니까, 자네가 한번 봐.”
“…알겠습니다.”
여러 케이스의 환자를 맡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방익은 더 이상 자기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고민이 풀린 건지 맛있게 식사를 했다.
‘돈 쓰고, 일 얻고… 손해 보는 장사네.’
속으로 가볍게 투덜대곤 식사에 집중했다.
딸랑!
차임벨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리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게 됐다.
한데 들어오던 남녀도 고개를 돌린 사람들도 일순 멈칫했다. 서로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임동환과 민청하였는데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다.
불편한 얼굴을 하는 임동환과 달리 민청하는 담담했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사람들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방센터 식구들이죠? 흉부외과의 민청하예요. 이쪽으로 앉아요, 임 선생님.”
단번에 분위기를 정리한 그녀는 두삼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두삼 오빠도 있었네요. 맛있게 먹어요.”
“으, 응. 너도 맛있게 먹어.”
잠깐 안마과 사람들의 시선이 두삼에게 쏠렸다. 그러나 금방 원래대로 돌아갔다.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기 보단 맛있는 초밥을 하나라도 더 먹는 게 남는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느긋하게 먹는 이방익과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하는 안마과 사람들 덕분에 늦게 들어온 임동환과 민청하의 식사 속도는 비슷했다.
두삼은 계산을 위해 가장 먼저 일어났다. 카드를 내며 말했다.
“이쪽 테이블 것까지 같이 계산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가게 직원이 계산을 마치고 막 카드를 긁으려고 하는 순간 임동환이 막아섰다.
“왜, 네가 우리 것까지 결제해?”
“할 수도 있죠. 청하에게 밥을 사기로 약속한 것도 있고요.”
“됐어. 내가 사면 샀지 남에게 얻어먹는 건 신세지는 거 같아서 불편해. 이걸로 결제해 주세요.”
싫다는데 뭐랄까, 두삼은 어깨를 으쓱한 후 물러섰다. 그는 결제를 한 후 민청하와 휑하니 가버렸다.
“하여간 특이한 선배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카드를 내밀었다. 한데 직원이 말했다.
“방금 결제했는데요.”
“아! 일행이 다른데…….”
“그래요?”
직원은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후 낭패한 얼굴로 들어왔다.
“안 보이네요. 어쩌죠? 본인이 결제를 한다고 해서…….”
“하하! 명함 드릴 테니 혹시 찾아와서 카드 취소하게 되면 연락주세요. 다시 올게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덕분에 어쩌면 공짜로 먹을 수도 있잖아요. 하하하!”
과연 임동환이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를 상상하니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