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32. 약도 때론 독이 된다(2)
“맛이 없으세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접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이방익에게 조심히 물었다.
“자넨 맛있나?”
“…글쎄요. 저야 미식가가 아니니까요.”
“미식과는 상관없어. 맛있는 건 그냥 입에 넣었을 때 맛있는 거야.”
“…하하! 뭔가 실수가 있겠죠. 일단 다음 건 맛있을 수 있으니 먹어보죠.”
아직 9가지가 남았다. 실수가 있을 수 있으니 다른 걸 먹어보자고 제안했다.
다행히 그도 하나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수긍했다.
두 번째는 갓 구운 빵에 소의 골수와 캐비아를 약간 올린 음식이었다.
골수의 텁텁한 맛과 캐비아가 터질 때마다 느껴지는 묘한 바다향이 갓 구운 빵의 곡물 향과 섞이며 굉장한 맛을 만들어냈다.
“맛있는데요!”
“…그럴 수밖에 오늘 날 그를 있게 한 음식이니까 그의 아래 있는 셰프들도 눈감고 만들 수 있어.”
“근데 선생님 전에 여기 와본 적 있으시죠?”
“…아, 아닌데.”
말이 살짝 떨리는 것이 분명 와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에게 예약을 하게 만들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진상 짓이라도 한 건가? 그럴 사람은 아닌데, 아니 음식에 관해선 예외인가?’
모를 일이다.
아무튼 다행히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음식도 맛있었다. 왜 이경도가 자신의 음식점에 와서 먹어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음식이 입안에서 춤을 춘다든가, 소가 자라던 목장 따위가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입안에 음식을 넣자 혀의 모든 부분에서 신호가 발하며 뇌를 자극했고, 그 순간 맛있다는 감탄과 함께 다양한 호르몬이 분비가 되어 행복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하지만 음식이 나올 때마다 이방익은 예전에 먹던 것과 똑같다고 투덜댔다. 요리사의 자세가 아니라나.
그러면서도 접시는 꼬박꼬박 비우는 건 뭔지.
그리고 여섯 번째 음식이 들어왔다.
도미 외부는 바싹 익고 내부는 촉촉한 생선 스테이크로 한라봉과 우리나라 봄나물을 이용해 소스를 만들었다고 했다.
절반쯤 잘라서 입에 넣었다.
“……!”
첫 음식과 마찬가지로 맛이 상당히 미묘했다. 그냥 제사상에 올라간 동태전을 간장에 찍어먹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물론 동태전보다는 맛있었다. 하지만 전에 먹었던 수준 높은 음식 때문인지 그렇게 느껴졌다.
두삼도 이렇게 느낄진대 이방익은 어떨까.
그는 휴지에 음식을 뱉었다. 그리고 나이프와 포크를 접시에 놓아버렸다.
와인으로 입을 헹군 그가 화난 음성으로 물었다.
“이번엔 어떤가?”
“전에 음식에 비해 많이 안 좋네요.”
“그렇지? 이경도 이 사람 확실히 문제가 있어. 얼굴마담이거나 허명이거나.”
이방익은 이경도에 대한 욕을 줄줄이 내뱉었다. 한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노크 소리와 함께 이경도가 웃는 얼굴로 들어왔다.
안면이 있다고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한두삼 씨. 즐거운 식사 하고 계십니까?”
“아… 네네.”
“이번 주에 서비스하고 있는 제철 음식을 이용한 도미 스테이크인데 만족하셨습니까?”
두삼은 예의상 그랬노라고 답하려 했다. 한데 이방익이 먼저 말했다.
“맛없었소. 과연 주방에서 이 음식을 먹어 보고 손님 상에 올리는 건지 묻고 싶을 정도요.”
이경도는 무서울 만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방익을 봤다. 그러나 이방익은 이경도의 표정에 지지 않을 만큼 화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음식은 형편없다고 했소. 먹어보시오. 당신 입맛엔 어떨지.”
“…….”
기에 눌린 건 아닌 것 같은데 이경도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방익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화난 표정으로 바뀌었다.
“당신은! 전에 와서 행패를 부렸었던……! 분명 출입불가라고 했을 텐데.”
어라? 불똥이 왜 자신에게 튀는 건지.
두삼이 얼른 변명을 하려했는데 다행히 이방익 쪽 불이 활활 타올랐다.
“행패라니! 비싼 음식을 먹으면서 이상하다는 말을 하는 게 행패요?”
“영업을 방해하는 것이 행패지 뭡니까!”
“좋소. 백번 양보해 행패라고 합시다. 그리고 내가 알아서 나가겠소. 하지만 가기 전에 마지막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이거 레시피 당신이 만들었소?”
“…그렇습니다.”
“훗! 그럼 당신 입맛이 이상해졌거나 손이 이상해진 게 분명하군요. 이제 두 번 다시 올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시오. 한 선생, 가지.”
“…아, 네.”
이거야, 원. 기껏 예약 자리가 비어 불러줬는데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나가기 전에 이경도에게 한마디 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요. 원래는 좋으신 분인데… 대신 사과드립니다.”
“…….”
자존심이 많이 상한 모양이다. 그는 인상을 굳힌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데 그가 물었다.
“…도미 스테이크 맛이 어땠습니까?”
“그게…….”
“솔직히 말해주셔도 됩니다.”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라도 솔직히 말해야 했다.
“첫 번째 요리와 이번 요리는 다른 요리와 확실히 달랐습니다.”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서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두삼은 조용히 백합실에서 나왔다.
* * *
고연아에게 노형진의 음식 먹는 영상을 보라고 한 건 두삼이 생각하기에도 다소 황당한 처방이었다.
한데 그 황당한 처방이 기적을 만들어냈다.
‘신호가 줄어들고 약해졌어!’
불과 며칠 만에 뇌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던 ‘음식을 거부하라!’라는 전기적 신호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먹기 싫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거식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고치고 있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없어요.”
이제 정상인에 비해 살짝 마른 편인 얼굴은 ‘먹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온몸에 경련이 일어날 만큼 심한 구토의 고통이 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먹고 싶으면 연락해요. 도와주러 올게요.”
“…무슨 선생님이 흑기사예요?”
“후후! 흑기사 하죠, 뭐. 그러니까 아무 때고 불러요.”
“새벽에라도?”
“흑기사라 밤엔 위험하지만 당연히 와야죠. 오늘 하루도 영상 열심히 봐요.”
“…저 사람 얼굴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 거예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그럼…….”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데 문이 열리면 원 여사가 들어왔다. 한데 그녀가 들어오자 희미하지만 향긋한 고기 냄새가 풍겼다
“아! 한 선생 가려고?”
“예, 여사님. 근데 요즘 건강해 보이시네요?”
살이 쪄 보인다는 말이다.
“호호! 한 선생 덕분에 많이 건강해졌어요.”
원 여사의 말에 고연아가 발끈해서 외쳤다.
“살이 쪘다는 소리거든! 그리고 음식 냄새 풍기지 않게 해달라고 했지? 또 고기 먹고 왔지?”
“얜, 무, 무슨 소리를… 이상하다, 냄새를 완전히 빼고 온다고 한 건데……. 네가 만날 저 영상을 보고 있으니 그런 거 아냐! 보고 있으면 자꾸 먹고 싶은데 어떻게 해.”
“누가 엄마한테 저거 보래? 그냥 엄마 방에 가 있으면 되잖아!”
“싫거든! 난 우리 딸이랑 같이 있을 거야!”
티격태격 거리는 모녀, 시끄럽긴 했지만 이젠 살 만한가 보다 싶어 보기 좋았다.
‘훗! 김 비서도 쪘군.’
영상이 효과가 좋긴 좋은가 보다. 한방센터로 가서 곧바로 특실로 올라갔다.
막 아침 진료를 마쳤는지 이은수가 나오고 있었다.
“은수야! 일 시켜놓고 얼굴도 제대로 못 봤네.”
“선배, 어서 와요. 서로 바쁘니 어쩔 수 없죠. 근데 걸크러시 퇴원은 언제예요?”
걸크러시 멤버들의 컨디션은 두삼의 생각보다 빨리 정상 수준이 되었는데 이은수의 실력이 그만큼 좋았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왜? 지겹냐?”
“아뇨.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약을 더 먹이면 오히려 독이 될 것 같아서요.”
“퇴원은 이번 주 금요일 날 할 거야. 점심때부턴 그냥 맛있는 식단으로 바꿔.”
“그래도 돼요?”
“너도 주치의야. 그런 결정은 굳이 나한테 안 물어 돼. 참! 그동안 얼굴을 못 봐서 오늘에서야 주네. 자!”
“뭐예요? 상품권?”
전에 받은 상품권 중 남은 것이다.
이은수가 고연아와 연관은 없지만 걸크러시를 잘 봐준 덕분에 고연아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봄옷이라도 사 입어.”
“괜찮아요. 지난 번 현수 오빠 대신에 당직까지 서 줬는데요.”
“그 대가는 받았으니까 거절하지 않아도 돼. 며칠 안 남았으니 끝까지 고생해 줘라.”
“…고마워요, 선배.”
“내가 고맙다. 그리고 한동안 특실에 계속 손님이 올 거니까 잘 부탁한다.”
“제 일인데요, 뭘. 참! 지금 안에 원장님이랑 이방익 선생님 와 계세요.”
“하아~ 노인네들 주책이라니까.”
허허허! 하하하! 호호호!
특실 안으로 들어가자 두 양반의 웃음소리와 걸크러시 멤버들의 가식적인 웃음이 들렸다.
방해하기 싫어 입구 소파에서 앉아 기다렸다. 잠시 후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두 사람이 나왔다.
“…그렇게 좋으세요? 근데 사인은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하하하! 안티 팬이 아닌 이상 어떻게 걸크러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사인과 사진은 많을수록 좋은 거라고.”
당당하게 말하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일어나려는데 할 말이 있는지 민규식이 앉았다.
“서문희 선생 돕기로 했다지?”
“네. 저도 도움 받을 일이 있어서요. 병원 일에는 방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조금 방해돼도 상관없어. 오랜 식구가 나가서 개업을 한다는데 잘되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도와야지.”
하여간 대인배다.
“그리고 오늘 여기 온 건 당직 날 병원을 위해 애써줘서 고맙다,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라네.”
사인지를 물끄러미 보자 그는 얼른 말을 이었다.
“험! 이건 겸사겸사 온 김에 받은 거라네. 아무튼 오늘 한 말 잊지 말게. 그럼 난 가네.”
소중하듯 챙겨가는 것이 아무래도 겸사겸사는 자신 같았다.
‘그나저나 잊지 말라고? 사람 살릴 걸 잊지 말라는 건지, 아님 그날을 잊지 말라는 건지…….’
고맙다, 수고했다는 말은 그가 자주하는 말이었다. 근데 잊지 말라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오늘 할 일을 위해 보나의 병실로 갔다.
“어서 와, 한 선생.”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서 선생님. 보나 씨, 이 선생에게 현재 상태에 대해 들으셨죠?”
“네. 신체 나이가 20대래요. 호호호!”
“앞으론 개인적으로라도 가끔 들르세요.”
“당연히 그럴 거예요. 귀찮다고 쫓아내지만 마세요.”
“언제든 환영입니다. 오늘 할 일을 시작해 볼까요?”
시술을 하지 않으려던 보나 역시 다른 멤버들의 시술을 본 후에 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보나는 두삼이 보기에 더 이상 손볼 곳이 없었다. 좌우가 살짝 비대칭이긴 했지만 그마저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과연 어떻게 바뀔지.’
“왼쪽 턱 부근에 웃을 때 살짝 패는 부분이 있어 거기에 3미리 정도 두께로 막아줘. 역시 왼쪽 윗입술 아래쪽에 2미리 정도 두께로 펴주고.”
“이 정도면 돼요?”
“보나 씨 미소 지어 볼래요? 끝부분은 살짝 올려줘. 그래 그만큼. 다음은 코끝. 물렁뼈처럼 만들거니 안쪽으로 만들어줘.”
아주 약간의 변화라 과연 눈에 띌까 했는데 그 약간의 변화가 눈으로 볼 땐 확 차이 나게 보였다.
문득! 서문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을 봐. 지나가는 여자를 흘낏 봤는데 묘하게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 자연스럽지 않은 건 금방 찾아내. 그럼 그런 어색한 점들을 없애면 어떻게 될까?’
서문희는 자신만의 성형 세계를 찾아낸 게 분명했다.
“됐어. 어때 보여?”
고친 부분을 최대한 머릿속에서 지우고 전체적으로 얼굴을 보려고 노력했다.
아까 전과 달라진 것이 있나 싶다.
“이목구비가 살짝 더 또렷해진 느낌적인 느낌?”
“맞아. 평소 얼굴엔 그 정도야. 그럼 이번엔 어떤지 볼래. 보나 씨, 편하게 웃어봐요.”
보나는 화보를 찍듯이 웃었다. 그러자 뭔지 모르지만 아까완 달라 보였다.
“좀 더 어려 보여요. 그리고 더 훨씬 자연스럽고 예뻐 보이는 것 같아요. 근데 어디가 바뀐 건지는?”
“보나 씨가 원하던 게 웃을 때 예쁜 모습이거든. 한 선생보다는 얼굴 주인이 마음에 들어야겠지?”
서문희가 거울을 건네자 보나는 한참을 자신의 얼굴의 상태를 살폈다. 꽤 만족스러운지 얼굴 표정이 밝았다.
“이대로 해주세요, 선생님.”
“그래요. 한 선생, 시작할까?”
피시술자가 오케이를 했으니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방금 전 만들어놓은 기운 주위로 새로운 기운을 덮어씌운 후 먼저 만들어놓은 기운을 회수하면 틀이 만들어진다.
거기에 주사기로 위치에 맞게 제작된 보형물을 삽입한 후 보형물이 굳을 때까지 기다리면 끝이다.
“선생님.”
“응.”
서문희가 주사기로 보형물을 삽입할 때 됐다 싶으면 신호를 보냈다. 자신이 할 수도 있고 그 편이 편했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그녀가 시술을 하는 게 맞았다.
“다 됐어요, 보나 씨. 퇴원하기 전에 어색한 건 없앨 거예요.”
그저 주사기로 적당량을 주입만 하면 됐기에 금세 끝났다. 완전히 굳는 데 5일에서 2주 정도, 큰 힘만 가하지 않으면 시술을 한 후 생활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말씀 나누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 일을 해야 해서.”
“한 선생님! 선생님은 사인이나 사진 필요 없으세요? 선생님껜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다고 멤버들이 말했거든요.”
나가려는데 보나가 말했다.
두삼은 검지로 눈썹 부근을 긁다가 말했다.
“…흠! 급한 일은 아니니까 그럴까요.”
걸크러시가 사진과 사인을 해주겠다는데 어떻게 거절할까. 아까 민규식이 한 말에 공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