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110화 (105/122)

# 110

32. 약도 때론 독이 된다.

3월, 여전히 싸늘하긴 했지만 그래도 봄이라고 한결 풀린 느낌이다.

일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스케줄은 바쁜 거 같은데 도와주는 이들이 생기면서 여유가 생겼다.

고연아의 경우 먹방을 본 효과 덕분인지, 다른 외적, 내적 변화 덕분인지 식사 후 물리치료를 짧게 해도 구토를 하지 않게 되었다.

걸크러시의 경우 서문희와 이은수가 있어서 매일처럼 마사지를 요구하는 강가영을 제외하곤 크게 신경 쓸 것이 사라졌다.

물론 여유가 생기니 금세 또 다른 일이 생겼지만 정신없이 뛰어다닐 만큼은 아니었다.

그중 하나가…….

“한 선생, 팔에 기운 좀 넣어줘.”

서문희가 너무 자주 진료실을 찾아와 사전 성형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물론 얼굴이 아닌 팔, 다리 부분이라 시간이 금방 끝났지만 그녀의 행동이 걱정됐다.

두삼은 그녀가 내미는 팔이 아닌 다른 팔을 잡고 지금까지 넣어줬던 기운을 살폈다. 한데 기운은 사라지고 이상한 물질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쪽이라니까.”

“선생님, 무슨 일을 하시는지 정확하게 설명하기 전까진 해드릴 수 없습니다.”

“주사한 물질 때문에 그러는 모양인데 이거 며칠이면 몸으로 흡수되어 외부로 배출 돼. 이거 의약품 승인까지 받은 물질이야.”

“설령 그렇다고 해도 스스로의 몸을 학대하듯이 괴롭히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네요.”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서문희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하는 행위로 인해 누군가가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건 사양이다.

“휴우~ 한 선생을 귀찮게 하긴 싫었는데.”

“선생님이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보다 제가 조금 귀찮은 게 낫습니다.”

“어머! 고백하는 거야? 이거 너무 갑작스러운데.”

“…아닌데요?”

“풉! 그렇다고 그렇게 정색까지 하면 농담한 내가 뭐가 되니?”

장난스럽게 말하던 그녀는 갑자기 뭔가 아픔이 느껴지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환자를 테스터로 이용하는 것보다 내 몸에 테스트하는 게 덜 괴롭거든.”

“…….”

“내가 한강대학병원을 그만두려는 이유는 위험함을 내포한 성형수술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서야. 꼭 뼈를 잘라내서 조립하듯 붙여야 예뻐질까? 꼭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고 부작용을 감수해야만 예뻐질까? 안전하고 자연스럽게 아름다워질 순 없을까?”

두삼은 환자가 감사하다며 준 음료수를 까서 서문희에게 건넸다. 그녀는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최소한의 수술과 시술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예뻐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유행을 바꿔 버리고 싶어.”

“…선생님의 생각은 알겠습니다. 한데 그것과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솔직히 말할게. 내가 하고자 하는 시술은 쁘띠 성형이야.”

“보톡스나 필러를 주사기로 삽입하는 비수술적 성형 시술 말이죠?”

“공부 좀 했나 보네?”

혼나지 않기 위해 조금 봤다. 수박겉핥기 정도랄까.

“아무튼 쁘띠 성형의 장점은 많아. 그중 가장 좋은 건 시술 중 모양을 바로 확인 가능 하고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는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모양이 나오진 않아. 아무리 해도 한 선생만큼은 세밀하게 되지 않지.”

“병원을 떠나시면 어차피 제가 계속 도울 순 없지 않습니까.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당연히 그렇지. 그리고 모든 환자를 한 선생에게 부탁할 순 없는 일이고.”

“그럼?”

“몇 명의 샘플이 필요해. 그리고 가끔씩 한 선생의 도움이 필요하고.”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안마과가 맨 처음 스타마케팅을 했듯이 성형외과를 개업했을 때를 대비한 마케팅의 일환이랄까.

만일 실력이 개뿔도 없는 사람이 스타마케팅을 통해 이름을 얻으려 한다면 절대 수긍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력 있는 이가 의술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두삼이 보기에 서문희는 후자였다.

그녀는 얼굴에서 매력을 찾는 능력이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순 없다. 만약 진짜라면 그녀가 하려는 일에 찬성이다.

과거엔 삶을 바꿀 수 있는 성형수술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는데 나연섭에 이어 하라를 치료하다 보니 성형에 대해 약간 거부감이 생긴 것이다.

‘부탁할 일도 있고.’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면 도울 생각이 있습니다.”

“…진짜? 성형에 대해서 부정적이지 않았어?”

“선생님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리고 제가 싫어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성형수술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요. 그럴 바엔 선생님을 응원하겠습니다.”

“…이거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럽네.”

“서로 윈윈하는 관계가 되자는 거죠. 저도 선생님 도움이 필요하고요. 혹시 지금 하는 테스트가 하라 씨에게 시술을 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맞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괜히 하라 씨의 얼굴에 기운을 주입하라고 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근데 뭐가 문제인 겁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선생의 기운만큼 보형물을 주사하고 싶어.”

시선을 천장으로 돌려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건 쉬워요.”

“어떻게?”

“거푸집처럼 만들면 돼요. 처음엔 약간 어색하겠지만 보형물이 굳고 나면 거푸집만 없애면 끝이죠.”

“후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의논할걸.”

“그러시죠.”

“미안해서 그랬지. 염치가 있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선생에게 이것저것 부탁하는 것도 상당히 낯 뜨거웠다고.”

“에? 왜 전 그런 기색을 못 느꼈을까요?”

“내가 연기력이 좀 되거든. 그런데 날 꽤 뻔뻔한 여자로 생각했던 모양이네?”

“…하하. 그,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성격이 좋다? 그 정도 표현이 맞겠네요.”

“그래? 꽤 긍정적이네. 그럼 그 긍정적인 성격으로 지금 당장 해줄 수 있어?”

“…지금요?”

“걸크러시가 언제까지 머물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다른 멤버들도 자신이 불만인 부분을 고치고 싶은 모양이야.”

“당장은 곤란하고 좀 이따 올라갈게요.”

해주기로 한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다만 진료 중이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성격이 급하다는 건 확실히 알 것 같다.

“알았어. 시술할 준비해 두고 기다릴게.”

그녀가 가고 나자 이번에 양태일이 들어왔다.

“선생님, 성공하고 왔습니다!”

양태일은 어제 돌아와 패배를 인정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안마실로 보내 안마사들이 하는 마사지를 배우게 했다.

“몇 번이나 성공했는데?”

“두 번입니다!”

“최소라는 말은 귓등으로 들었냐? 아무튼 내가 정한 횟수니 성공은 성공이지.”

두삼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벗고 침상에 누웠다.

“해봐.”

“마사지로요?”

“침으로 해봐. 40일 후엔 다른 과로 가는데 마사지만 가르쳤다고 욕먹긴 싫다.”

“알겠습니다!”

양태일은 장갑을 끼고 드레싱카에서 침을 꺼냈다. 그리고 옷을 위로 올리더니 거침없이 꽂았다.

12개의 침 중 두 개 실패.

‘의심이 많은 사람이 믿기 시작하면 더 무섭다더니 딱 그 짝이네. 가진 기도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한 것 같고.’

생각과 달리 나온 말은 질책이었다.

“집중 안 하지? 빨리 둔다고 ‘와! 잘한다’ 칭찬해 주는 사람 없다.”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재도전.

하지만 실패.

집중을 했는데 오히려 기가 안 실린 침이 하나 더 늘었다.

“다시!”

“다시!”

진료실은 다시라는 말밖에 들리지 않았다. 결국 여섯 번째 성공했다. 아무리 기가 있다고 믿기로 했다지만 기를 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엔 성공. 내 혈에 구멍을 만들 셈이야? 혹시 나한테 불만 있어?”

“…아닙니다.”

“아니긴. 여섯 번이나 반복하면 환자도 그렇게 생각할걸. 침에 기를 담을 수 있다는 건 실패했을 때 부작용 역시 클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앞으론 적어도 두 번 안에 성공할 수 있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럼 올라가서 반복해. 이번엔 열 번 연속 성공하면 내려오고. 참! 다음 주부터 있는 시침을 통한 마취 회의엔 참여해.”

“제가요? 그 회의 레지던트 선생님들부터 참여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나 대신 참여하라는 거야. 이 선생님이랑 엘튼 선생님껜 말해둘 거야. 싫으면 관두고.”

“아, 아닙니다.”

“얼마나 잘 들었는지 시험 볼 거니까 졸 생각은 말고. 가 봐.”

두삼이 볼 때 양태일은 재능이 있었다.

특히 철두철미한 성격 덕분인지 침을 혈에 정확하게 꽂는 것만 보자면 상위 10퍼센트의 실력이다.

현재는 써먹을 곳이 딱히 없지만 내년엔 꽤 기대가 된다. 그래서 지금부터 안마과로 오라고 꼬셔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보단 마취과로 써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똑똑!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기에 천 간호사인 줄 알았는데 이방익이었다.

“한 선생, 내일 약속 잊지 않았지?”

“물론이죠. 내일 8시, 가게 맞은편에 있는 편의점에서 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주말에 이경도 셰프의 식당 예약은 힘들었다. 혹시 예약이 취소되면 연락을 준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어제 전화가 온 것이다.

말했더니 어제부터 이렇게 시시때때로 들이닥쳐 확인을 했다.

“좋아! 그럼 내일 보세.”

“…네.”

얼른 내일이 지났으면 좋겠다.

* * *

여자와 데이트할 시간도 없는데 남자와 데이트라니. 거기다 식당 드레스코드 때문에 정장 차림에 머리에 헤어젤까지 발라 꾸며야 했다.

편의점 창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던 두삼은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후우~ 드레스 코드에 꽃다발이 없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이왕 온 거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10분쯤 기다리자 이방익의 차가 도착했다.

“여어~ 한 선생, 들어가지.”

근데 웬 선글라스에 마스크? 안 그대로 험악하게 생긴 양반이 저래놓으니 범죄자 같다.

건널목을 건너자 주차를 한 그가 차에서 내렸다.

“웬 밤중에 선글라스입니까?”

“네온사인 불빛이 눈부셔서 말이야.”

“마스크는요?”

“감기 기운이 조금 있어서. 기본적인 예의 아닌가.”

마치 생각해 온 것처럼 즉각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들어가시죠.”

“그러지.”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에 직원이 대기 중이었다.

“예약자분 성함이?”

“한두삼입니다.”

“저 직원을 따라 백합실로 가시면 됩니다.”

안내원을 따라 깔끔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진 복도를 걷자 백합실이 나왔다.

내부는 정말 데이트하기에 딱 좋은 모습이다.

“토요일 스페셜 코스 2개에 코스에 어울리는 추천 와인을 주문하셨죠?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오! 별실이라니 돈 좀 썼군.”

“…이왕 대접하는데 화끈하게 해야죠.”

예약이 취소된 곳이 이곳뿐이었다. 참고로 별실은 별도의 요금이 있었는데 밥값보다 비쌌다.

“참! 선생님, 양태일 선생 다음 주 회의에 참여하라고 했습니다.”

“자네 인턴? 실력이 꽤 괜찮나 보네?”

“아직은 아닌데 나중엔 꽤 잘할 것 같더라고요.”

“음, 한 선생이 그리 말할 정도면 인재라는 소린데. 우리 과에 오게 꾀어봐야 하나?”

“선생님은 절 너무 과대평가하세요.”

“난 자넬 평가한 적이 없어.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무슨 수로 평가하겠나?”

“선생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내가 인정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해. 그 얘긴 여기까지 하지. 이제부터 오로지 음식에 집중하세.”

그는 마스크를 벗고 약간의 물로 입을 헹궜다. 그리고 그가 두 번째 헹굼을 할 때 첫 번째 음식과 와인이 도착했다.

“양상추에 불가리산 요거트와 계절 과일 소스로 상큼함과 달콤함을 강조했습니다. 프랑스식 기법과 한국 전통의 기법을 조화시킨…….”

그냥 모양 낸 양상추에 소스 올린 음식에 무슨 설명이 길기도 긴 건지.

두삼은 얼른 집어먹고 싶은데 이방익은 끝까지 경청하며 음식을 살폈다.

“즐거운 식사 되십시오.”

계속 이대로라면 즐거운 식사를 하긴 글렀다. 음식을 좋아하고 잘 만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방금 직원이 설명한 맛을 다 느끼기엔 무리다.

“드시죠, 선생님.”

건배를 제의하며 얼른 먹기를 종용했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음식이 줄어든다면 이방익은 코로 다 먹었을 정도로 냄새를 맡아댔다.

“그러자고.”

그가 포크를 음식에 대자마자 두삼도 얼른 포크를 이용해 첫 번째 음식을 먹었다.

한입 크기.

소스의 신맛과 달콤함, 양상추의 아삭함 비싼 음식이라 느껴보려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뭐야? 이 정도면 그냥 양상추에 쌈장 찍어먹는 게 더 낫겠다.’

솔직히 실망이다. 자신에겐 아무래도 이런 음식이 입에 안 맞나 보다 생각하고 이방익을 봤다.

눈을 감고 천천히 공기를 들이마시며 음식을 먹고 있는 그. 그가 어떤 감탄을 터뜨리나 궁금했다.

한데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음식을 꿀꺽 삼킨 후 돌연 인상을 썼다. 그리고 화가 난 듯 말했다.

“역시, 지난번 내 입맛이 틀리지 않았어. 맛이 제각각 따로 놀아. 이 따위를 음식을 내놓고 우리나라 제일이니, 세계 10대니 하는 말을 떠들다니!”

그에게도 맛이 없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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