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94화 (92/122)

# 94

28. 별도 병이 든다.

나연섭이 그랬듯이 신체는 일정 단계를 넘어가면 자가 치유가 되고, 나이가 젊고 노력할수록 치유 능력은 극대화되는 게 틀림없었다.

이효원의 세맥들이 어느 순간 효율이 좋아지더니 단 며칠 만에 망가졌던 경락과 경혈이 만들어지고 세맥까지 만들어졌다.

왼쪽과 완벽하게 똑같다고 할 순 없었다. 왼쪽이 4차선 도로라면 오른쪽은 3차선 도로였다.

하지만 연습을 하면 자연스레 넓혀질 것이 분명했기에 더 이상 자신이 손을 댈 이유가 없었다.

“…어때요?”

이미 스스로 느끼고 있는 건지 상태를 묻는 이효원의 표정은 기대감이 가득했다.

두삼은 그녀의 손을 놓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축하해! 다 나았…….”

덥석!

“꺄악! 오빠! 고마워요!”

축하해라는 말에 무슨 말을 할지 알았는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덥석 안겨왔다.

“…어어~ 너, 넘어져.”

현재 하란의 집 스케이트장이었다.

물론 이제 실력이 좋아져서 넘어지지 않았다.

“넘어지면 어때요. 정말 고마워요! 쪽! 쪽!”

“…그, 그만해라.”

매달려서 볼에 마구 뽀뽀를 하는데 하란이 보고 있어 조금 민망했다. 한데 멈추라니까 입에 ‘쪽!’하는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하고 나서야 내려왔다.

“……!”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보자 이효원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아쉬워요? 진한 키스로 해줘요?”

“…미, 미쳤냐?”

“피이~ 그냥 감사의 인사거든요. 감사가 부족하면 말해요.”

한참 부족해! 라고 말하면 그 순간 하란의 스케이트 칼날이 이마에 박히겠지.

“…충분해.”

“아님 언니한테 부탁할까요?”

“…그, 그렇다면… 쿨럭! 허, 헛소리 말고. 앞으론 사나흘에 한 번 편한 시간에 들러.”

“더 할 게 있어요?”

“별거 아냐. 네 몸 상태를 확인하려는 거야. 이방익 선생님도 이제 안 계시잖아.”

무리가 가는 다리에 기운을 불어넣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히 안심하다가 더 다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안 그래도 부탁드릴 생각이었는데. 감사해요, 오빠.”

“무리하지 마. 그리고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는 것 같으면 집이든 병원이든 찾아오고.”

“그럴게요. 그러고 보니 이제 언니 집에 더 머물 수도 없겠네요?”

“머물고 싶은 만큼 있어도 돼.”

하란이 말했다.

“언니 사생활도 있는데 그럴 수야 없죠. 정말 고마워요, 언니.”

이효원은 하란에게 조르르 가서 안겼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오빠 소개시켜 주고 찾아준 것도 언니잖아요. 그리고 수영장을 이렇게 만든 것만 봐도 언니가 날 위해 얼마나 신경 썼는지 잘 알아요.”

“널 광고 모델로 쓸 수 있었잖아. 아무튼 생각보다 빨리 나아서 다행이야.”

스케이트장에서 나와 거실로 자리를 옮겨서도 고맙다는 인사가 이효원의 입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코치님 도착했나 봐요. 오늘은 링크장이 예약되어 있어서 내일 두 분한테 맛있는 거 살게요. 시간 꼭 비워두세요. 그리고 오빠 치료비는 언니에게 맡겨뒀으니 받으세요.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하란과 두삼을 다시 한번 꼭 안아주곤 갔다.

“또 한 명이 떠나니 시원섭섭하네.”

“뽀뽀해 줄 사람이 없어져서 서운한 건 아니고?”

“아, 아니거든!”

“말을 더듬는 것이 더 수상해? 하긴 국민 여동생 이효원의 입술 뽀뽀를 누가 싫어할까.”

“…싫지는 않지만 원하지도 않거든. 내가 원하는 건…….”

“원하는 건?”

그렇게 빤히 보지 마! 입술만 보이잖아!

“아냐. 근데 치료비를 맡겨놨다는 건 뭔 소리야?”

“우리 회사에서 받기로 되어 있던 광고비를 오빠한테 주기로 했어. 그게 계약 조건이었어.”

“광고비를 통째로 다 준다고? 그렇게 많이 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오빠가 효원이에게 해준 것에 비하면 많다고 할 수 없지. 그러니 그냥 받아.”

솔직히 여기저기서 많이 받다 보니 이젠 담담하다.

부자들이 통장에 얼마 들었는지 모르는 정도만큼은 아니지만 돈에 대한 감각이 둔해졌달까.

“통장에 넣어줄까?”

“아니. 너희 회사 이제 개인 투자도 받는다면서? 거기에 투자해 주면 안 돼?”

“가능해. 다만 액수가 커져서 세금이 장난 아니게 많아질 거야.”

“버는 만큼 내야지. 참! 수수료도 떼.”

“그럼 수익률이 예전처럼 되진 않을 거야.”

“상관없어. 이제 부족함 없이 버는데 너한테 언제까지 신세를 질 순 없잖아.”

“뭐야? 그동안 신세진다고 생각한 거야?”

“그건 아니고. 음… 뭐랄까?”

두삼은 검지로 볼을 긁으며 하란이 기분 나빠하질 않을 적당한 대답을 찾으려고 했다. 한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훗! 알았어요, 고객님. 회사에 도움을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그나저나 이제 아침마다 얼굴도 못 보겠네?”

시원섭섭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게. 근데 스케이트장은 이제 수영장으로 바꿀 거야?”

“원래 수영장이었으니 그래야지. 오빠가 스케이트 탄다면 그대로 놔두고.”

“요즘 운동이 부족해서 수영이나 할까 했거든. 근데 근처에 수영장이 없잖아. 물론 조금 가면 있겠지만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고…….”

“굳이 멀리 다닐 이유가 없지. 수영장 사용해도 돼.”

“공짜로 해달라는 거 아냐. 아침은 내가 해줄 수 있어. 아! 아주머니가 계시는구나.”

“…효원이도 없고, 요즘 회사 다니느라 저녁까지 먹고 와서 아주머니에겐 청소만 부탁하려고.”

어째 얘기가 너무 잘 풀리니 분위기가 살짝 어색해졌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자. 오늘은 이만 가볼게.”

“얼음 녹이고 물을 바꾸려면 한 이틀쯤 걸릴 테니까 월요일부터 오면 돼.”

“그래. 참! 아침은 주로 뭘 먹어?”

“간단한 거. 난 아무거나 상관없으니까 오빠가 먹고 싶은 걸로 해.”

“알았어. 내일 보자.”

후다닥 하란의 주차장으로 갔다.

뜬금없이 남의 집 수영장을 쓴다는 말을 하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잠시, 곧 어떤 수영복을 사고 아침 식단은 어떤 게 좋을지 고민했다.

* * *

위가 비었을 때도, 찼을 때도, 물이나 침을 삼켰을 때도 위는 부지런히 뇌와 전기적인 신호를 주고받는다.

심장이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뛰듯이 위 역시 한 순간도 쉬지 않는다.

뇌로 향하는 수많은 신호 중 약에 포함된 물질이 스며들며 발하는 신호를 찾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정도는 아니지만 힘들었다.

한데 행운은 한꺼번에 오는 건지 이효원의 완치 판정을 내린 날 밤에 드디어 원하는 신호를 찾았다.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매일 두세 시간씩 내부의 전기적 신호를 보는 건 꽤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가끔 안이하다 싶을 만큼 형식적으로 볼 때가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잠깐 짬을 내서 산 래시가드 수영복보다 반바지 형 짧은 수영복이 더 낫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정신의 3분의 1은 자신의 몸속의 임독양맥으로 기운을 돌리고 있었고, 3분의 1은 환자의 내부를 살피고 있었다.

좋게 말하자면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멍한 상태였다.

한데 그 멍한 상태가 기적을 만들어냈다.

‘뇌전증 약이 어디에 효과를 보이느냐!’고 묻는 자신의 신호를 환자의 뇌가 알아들은 것처럼 몇 개의 신호를 보여줬다.

위를 자극해 약효를 스며들게 하는 신호, 뇌의 한 부분을 자극해 호르몬들이 분비되게 하는 신호 등.

그리고 분비된 호르몬들로 인해 소화액이 분비되고, 또 다른 뇌의 한 부분을 자극하고, 그에 새로운 호르몬이 생성되고.

마치 도미노처럼 투입된 약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만일 지금처럼 알아봤으면 몇 년이 지나도 못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군.’

약효가 직접 뇌의 이상 신경세포를 자극해서 뇌전증을 줄여주는 게 아니라 호르몬이 분비되고 그 호르몬으로 인해 뇌가 자극되어 신경세포를 안정화시키는 일을 했다.

서둘러 약을 복용한 지 7시간째인 환자에게 갔다. 그리고 위에서 직접 살피기보단 조금 전처럼 환자의 뇌를 향해 보여달라고 염원했다.

“어라? 안 되네.”

“뭐가 안 된다는 말씀이세요, 한 선생님?”

뇌전증 연구실 소속 담당 간호사가 물었다.

“…아니에요. 혼잣말입니다.”

대답을 한 후 몇 번 더 시도를 해봤지만 조금 전처럼 잘되지 않았다.

‘딴 생각을 해야 하는 건가?’

일부러 딴 생각을 해보고 멍한 척을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타인의 뇌에 신호를 보내는 건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과정을 알게 되니 전기적 신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7시간이 지난 환자의 경우 약효가 거의 작용하지 않고 있었다.

몇 명을 더 살펴본 후 김영태 교수에게 갔다. 그는 잔뜩 쌓인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두삼이 다가가자 고개를 들며 말했다.

“오늘은 조금 일찍 끝냈군. 퇴근하게.”

“퇴근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그럼? 아! 드디어 찾은 건가?”

그는 놀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네. 현재 환자들이 복용하는 뇌전증 약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설명해 주게.”

두삼은 자신이 보았던 것을 설명해 주었다.

“어떤 호르몬인지 아나?”

“아뇨. 호르몬을 구분하진 못합니다. 다만 어느 지점을 자극해야 호르몬이 나오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음, 일단 그 호르몬이 정답이라고 할 순 없지만 다른 치료제도 같은 호르몬을 분비시키는지 알아봐야겠군.”

“그렇죠.”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냈다지만 갈 길은 멀었다.

다른 치료제가 다른 호르몬을 분비시킬 수도 있었고, 오늘 발견한 호르몬이 뇌전증을 완전히 치료하는 치료제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뇌전증은 이미 정복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한 단계를 넘겼다는 생각 때문인지 기분 좋게 퇴근을 준비했다.

옷을 갈아입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차가 주차된 곳으로 가려할 때였다.

“오빠, 이제 퇴근해요?”

“어! 청하 씨! 여행에서 돌아온 거예요?”

“벌써 다녀왔죠. 일주일 전쯤에 와서 그동안 못 만나던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대학 친구들 만났어요.”

“재미있었어요?”

“호호! 덕분에요. 참! 선물은 내일 출근해서 드릴게요. 오늘 만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네요.”

“저한테까지 선물을… 고마워요. 근데 내일 토요일인데 출근이에요?”

“정식 출근은 3월인데 과장님이 당장 출근하래요. 하여간 노는 꼴을 못 본다니까요.”

“고생하시겠네요.”

“레지던트일 때보단 낫겠죠. 근데 겨울이라 오토바이 지하에 대놓은 거예요?”

“아뇨. 일이 있어서 요즘은 차 타고 다녀요.”

“그래요? 그럼 저 좀 태워주시면 안 돼요? 태워주기로 한 친구가 잡혔는지 도통 내려오질 않네요.”

“어디 가는데요?”

“강남역이요. 불금이잖아요. 2호선 탈 수 있는 곳까지만 태워줘도 괜찮고요.”

“멀지 않으니 데려다줄게요.”

“오옷! 최고! 근데 오빠, 언제까지 말 높일 거예요? 이제 말 놔요.”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지. 하하! 갈까?”

막 차가 있는 곳으로 옮기려는데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아는 얼굴이 보였다.

“선배, 이제 퇴근해요?”

“…응. 근데 누구? 애인?”

탐탁지 않은 얼굴로 대답하는 그는 민청하를 보곤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삼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소개했다.

“아뇨. 우리 병원 흉부외과 전문의인 민청하 선생님. 여긴 학교 선배이자 침구과 전문의인 임동환 선생님.”

“처음 봬요.”

“네, 처음 뵙겠습니다. 근데 혹시… 민 원장님의 영애 아닙니까?”

“원장님이 아버지인 건 맞지만 영애라는 말은 가당치 않아요.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태양한방병원 원장인 제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아! 태양병원 임 원장님! 몇 번 뵀었는데 그때 말한 아드님이 임 선생님이셨군요. 잘생겼다고 하셨는데 정말 그러시네요.”

“별말씀을요. 그런데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강남역에 갈 일이 있는데 두삼 오빠가 데려다준다고 해서요. 만나서 반가워요. 두삼 오빠, 가요.”

민청하가 재촉을 했기에 임동환에게 살짝 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한데 임동환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다급하게 말했다.

“저도 강남역에 가는데…….”

뭐지? 자기가 데려다주겠다는 말인가?

그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그러나 민청하가 그러겠다고 하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민청하를 바라봤는데 그녀는 이미 돌아서서 말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만나게 되면 인사해요. 그럼!”

그 말을 끝으로 민청하는 두삼의 팔까지 당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승리자가 된 것 같은 느낌에 우쭐하면서도 왠지 모를 찝찝함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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