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27. 배우는 게 남는 거다(2)
“크흠! 실례하네.”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봤다. 침구과의 장인규였다.
“장 선생님, 여긴 어쩐 일로……?”
“약재에 대해 좀 알아보다가 여기까지 왔네. 약재를 음양에 따라 분류한 것이 자네였군.”
그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하며 분류를 위해 놓아둔 상자의 약재들을 살폈다.
“저 친구가 약재 분류를 도와달라고 해서요.”
공동희가 ‘내가 언제? 니가 스스로 한 거잖아?’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무시했다.
“약재를 구분하는 법은 누구한테 배웠나?”
“제가 시골 출신이거든요.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한의원을 하셨고요.”
“그럼 뜸에 대해서 잘 아나?”
“학교에서 배운 것보단 조금 더 아는 정도입니다. 물론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고요.”
배영옥을 치료할 때 뜸을 사용했지만 그 방법은 특별한 건 아니었다.
“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도대체 장인규가 왜 여기에 왔고, 뜬금없이 뜸에 대해 묻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도 과장이 묻는 질문에 답을 해야겠지?
“…장담컨대 없어선 안 될 분야죠.”
“어정쩡하다는 말이군.”
“쿨럭!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저… 배움이 부족했죠. 장 선생님이 교수님이었다면 분명 뜸에 대해 달리 생각을 했을 겁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뜸이 다른 분야에 대해 부족하지 않음을 설명해야 했다.
“조금 위로가 되는군. 근데 내가 교수라면 뜸에 대해 좀 더 깊게 배웠을 거라는 말 진짠가?”
“아, 네. 물론이죠. 그랬다면 안마과가 아니라 뜸과에 있었을지도 모르죠.”
“훗! 아부에 능하군.”
“아부라니요. 진심입니다.”
아부 맞다. 하지만 같은 의학센터 과장의 기분을 맞춰주는 건 자그마한 예의였다.
한데 그 자그마한 예의가 엉뚱한 결과로 돌아왔다.
“진심이라니 그렇게 하도록 하지.”
“네? 무슨 말씀인지……?”
“한 선생에게 기꺼이 뜸에 대해 가르쳐 주겠다고. 언제가 좋겠나? 난 아침이든 저녁이든 상관없는데.”
“…….”
“일단은 하루 한 시간씩만 하지.”
한 시간이라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밤까지 일만 하는걸요.”
“뭔가를 주장하려면 정확하게 말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까…….”
비밀로 해야 하는 것들뿐이다.
“…토요일 날, 점심 먹고는 시간이 남겠네요. 그때 4시간쯤 하시죠.”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좋아. 그럼 이번 주 토요일부터 보기로 하지.”
“…제가 준비할 것은 없습니까?”
“뜸을 만들어보게.”
“어떤 환자를 기준으로 할까요?”
“허~ 정말 마음에 드는군. 지금까진 뜸을 만들라고 하면 그냥 아무 기준 없이 만들어 오는 이들밖에 없었는데. 저기 자네 친구는 힘이 세지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 그걸 기준으로 하지.”
공동희는 눈치가 빨랐다. 자신이 토요일 날 실험체가 될 것이라는 바로 깨달았다.
“선생님, 전 토요일 날 선약이 있습니다만…….”
“조금 전에 산삼 먹은 건 비밀로 해주겠네.”
“……!”
공동희가 ‘방금 먹은 게 산삼이었어?’라고 눈빛으로 물었고 두삼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눈빛 따위를 읽는 능력은 없었다.
* * *
“수영복의 유행이 얼른 바뀌었으면 좋겠네요.”
통유리 너머의 수영장을 보고 두삼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박기영이 말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고마워할걸.”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래시가드를 입고 수영을 하고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 고마워해야 할지 의문이다.
“…고마워할 정도는 아닌데요?”
“저기 있는 이들이 내 손바닥만 한 삼각 팬티를 입고 있다고 상상해 봐.”
그는 오동통하지만 작은 손을 들며 말했다.
젠장! 상상해 버렸다.
“…고맙네요. 남녀 수영복 유행이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걸 바라야겠네요.”
“나도 그 생각 중이야. 그나저나 참 열심히 하지?”
수영장에 온 지 10분이 넘어서야 수영장을 열심히 걷고 있는 노형진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게요.”
“요즘 살 빼는 기쁨을 안 것 같아. 하루가 다르게 살이 빠지는 게 눈에 보여. 엄 PD는 꽤나 극적인 장면이 연출될 것 같다고 좋아하고 있어. 지금 속도라면 1회 방송에 나갈 수도 있을 거야.”
“놉! 그건 안 돼요.”
“왜?”
“속도가 너무 빨라요. 지금 속도라면 치즈가 녹은 것처럼 축 늘어진 뱃살을, 아님 아랫배에 길게 찢어진 수술 자국을 시청자에게 보여주게 될 거예요. 그리고 장담컨대 시청률이 떨어질 거고요. 누가 그런 걸 보고 싶겠어요.”
“그럼 어쩌려고?”
“빠지는 속도를 줄이고 빠진 지방에 근육을 채워 넣어야죠.”
“다시 살을 찌우겠다고?”
“찌진 않을 거예요. 물론 약간 찐다 해도 어쩔 수 없고요. 아무튼 오늘은 운동 그만하자고 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죠.”
“에휴~ 난 모르겠다. 의사가 알아서 하겠지.”
수영장에서 나와 노형진을 데리고 간 곳은 고기 무한리필 가게였다. 노형진은 의아해하며 말했다.
“선생님, 저 요즘 거의 안 먹습니다.”
“알아요. 몸무게가 149킬로까지 빠진 것만 봐도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죠.”
“근데 여긴 왜?”
“살을 빼려면 먹지 않는 게 중요하죠. 하지만 너무 급속도로 빠지면 피부가 늘어지는 걸 막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제부터 먹어야 해요.”
“…먹고 싶지 않아요.”
“과연 그럴까요?”
“방송을 위해 무슨 장난을 치는 건지 모르지만 전 절대 먹지 않을 겁니다.”
살이 빠지면서 자존감이 조금 올라간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피력했다.
보기 좋았다. 하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방송 때문이 아니에요. 그리고 과연 이렇게 해도 먹지 않을까요? 실례할게요.”
두삼의 손을 뻗어 그의 코를 세우듯이 꾹꾹 눌렀다. 그리고 그의 후각을 원래대로 되돌려 놨다.
“…고기 냄새가……!”
눈이 두 배나 커졌고 연신 코를 벌름거렸다.
“좋죠? 거기에 이것까지 하면.”
그의 등으로 가서 등을 정성스럽게 안마했다. 카메라가 없었다면 대충했겠지만 극적 효과를 위해 일부러 천천히 위에 걸린 전기적 신호를 줄였다.
“가, 갑자기 배가 고파졌어요!”
“예전의 3분의 1쯤은 먹어야 배가 부르다는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의 반응은 격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말했다.
“…많이 먹지 않을 겁니다. 전 살을 뺄 거예요.”
“긍정적이네요. 하지만 굶으면서 빼는 건 제 치료와는 맞지 않아요. 먹어요. 다만 국물과 탄수화물, 과중한 양념은 안 됩니다. 고기와 약간의 소금, 혹은 쌈장.”
두삼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기를 잔뜩 가져와 불판에 올렸다.
“…진짜 절 시험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까?”
“방송이 아닌 개인적인 시험이긴 합니다. 다만 시험 결과를 매일 마사지를 하며 확인하게 될 테니 너무 걱정 말고 먹어요. 잘못된다 싶으면 즉시 방향을 바꿀 생각이니까요. 이래도 안 먹겠다면 어쩔 수 없죠. 늘어진 살은 수술로 처리할 수밖에요.”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그는 천천히 고기 한 점을 들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씹으며 고기 맛을 음미했다.
그는 보는 것만으로 식욕이 생길 만큼 맛있게 먹었다.
“어때요?”
“…들 익었네요.”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빨간 부분이 있었거든요. 근데 왜 뱉지 않죠?”
“많이 먹지 못하는 만큼 입에 들어가는 걸 소중히 여기려고요.”
“좋은 생각이긴 한데 앞으론 그러지 말아요. 배 아프면 오히려 손해랍니다. 참! 앞으론 수영은 적당히 하고 헬스를 하세요. 근육을 키워야 해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자! 이제 익었네요. 얼른 먹죠.”
촬영팀과 함께 점심을 맛있게 먹고 먼저 일어났다.
노형진이 예전에 먹던 양의 3분의 1은 일반인에 불과한 두삼의 두세 배는 족히 됐는데 한 점, 한 점 소중히 먹고 있어서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어? 딸기가 나왔네. 아주머니 딸기 하나 주세요.”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연아에게 주기 위해 청과물 가게에서 딸기를 한 팩 샀다.
환자에게 이렇게 친절한 의사가 또 있을까.
자화자찬을 하며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꺼져!”
친절함에 대해 뭔가 대가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이런 취급을 받는 걸 원한 것도 아니다.
‘역시 말을 못 하게 해뒀어야 했나?’
몸이 약해졌다는 핑계로 입과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해뒀었다. 그러다 입을 열어줬는데 나오는 말이 참 공격적이다.
“우리 연아 씨가 오늘은 뭣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걸까요? 딸기까지 사왔는데.”
“…귀가 막혔어? 꺼지라는 말 안 들려? 그리고 우리라는 말 쓰지 마! 왜 내가 너의 우리야.”
“너무 그러지 말아요. 안 그래도 연아 씨 밥 먹이고 수업 들으러 가야 해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냥 할 일을 하고 얼른 가봐야겠다.
식사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침구과 선생님이 뜬금없이 찾아와 뜸을 배우라는 거예요. 내가 시간이 없는 건 연아 씨도 잘 알잖아요? 근데 그렇게 얘기했더니 스케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더군요. 입 살짝 벌려요. 아님 옆으로 흘러 되게 추해요.”
“…….”
추하게 보이는 건 싫은 건지, 아님 살고 싶은 건지 밥을 먹일 땐 그나마 조용하다.
아이들이 잘 때 가장 예뻐 보인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말을 할 수가 있어야죠. 사실 내가 하는 일은 비밀스러운 게 많거든요.”
“안 궁금…….”
“꼭꼭 씹어서 드세요. 아직까지 위와 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못된 말을 하려는 입에 다시 죽을 넣었다.
죽을 다 먹고 딸기를 으깨 먹이려 할 때였다. 웬일로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은 언제 풀어줄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모른 척하지 마! 엄마한테 다 들었어. 침으로 사람 몸을 마비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지?”
“음! 사모님은 오늘부로 퇴원을 시켜야겠네요.”
“그건 알아서 해. 그래서 언제 풀어줄 건데?”
“손윗사람에게 높임말을 써야 하는 것도 아직 배우지 못한 사람이 높임말을 배웠을 때?”
“…농담 아냐.”
“지금은 풀어줄 수가 없어요. 풀어주는 즉시 다시 토하게 될 테니까요.”
“해보지도 않은 걸 어떻게 알아?”
“몸을 마비시키는 능력뿐만 아니라 연아 씨의 머릿속에서 몸으로 계속 ‘토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능력도 있거든요.”
“…잊었어, 아니,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건강의학에서 유명한 의사선생님이 도와주러 오겠지만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도 될까요?”
“…그래.”
“잊으려고 하지 마요.”
“…….”
“잊으려고 노력하면 그 기억을 다시 머릿속에서 한 번 되뇌는 것밖에 되지 않아요. 그냥 받아들여요. 그런 남자가 있었다, 정도로요. 그다음 당신의 인생을 살아요. 그러다 보면 당신을 정말 좋아해 주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르죠.”
“…없으면?”
“장담컨대 있을 거예요. 내가 당신을 예전보다 더 멋지게 만들어줄 거거든요.”
무사히 딸기까지 먹인 후 2층에 위치한 휴게실로 향했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내가 왜 주말에 여기 있어야 하는 거야?”
“저 은수랑 영화 보러 가기로 했단 말이에요, 형!”
“산삼 먹었으니 책임을 져야지. 그리고 넌 만날 붙어 있으면서 무슨 데이트. 정 하고 싶으면 술을 줄이고 그 시간에 데이트해.”
“그 산삼 네가 준 거잖아!”
“어? 형 서운하게 산삼을 공 팀장님께만 준 거예요? 서운하네요.”
“난 더덕인 줄 알았어.”
더덕 말린 것에 섞여 들어온 산삼이었다. 그래서 준 건데 장인규는 그것이 산삼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구차하게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또한 시간이 없다뿐이지 뜸의 대가가 뜸에 대해 가르쳐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근데 그거 진짜 산삼 맞아? 산삼을 먹으면 막 힘이 솟아야 하는 거 아냐?”
“저도 좀 줘요. 저 좋다고 달라는 게 아니에요. 형의 사랑스러운 후배인 은수를 위해서라도.”
한 놈은 진짜 산삼이 맞느냐고 묻고 다른 한 놈은 여자 친구를 위해 자신도 먹어야 한다고 징징대고… 교육이 쉽지 않을 것 같다.
다행히 그들의 징징거림이 한계에 도착할 때쯤 장인규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