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27. 배우는 게 남는 거다.
침구과 장인규의 진료실은 항상 쑥 타는 냄새로 가득하다.
큰 창문이 있는 방에 수시로 환기를 하고 별도의 공기청정기를 두 대나 더 갖다 뒀지만 하루 종일 뜸을 시술하니 소용이 없었다.
연세 많은 환자의 손 위에 밥알 크기의 뜸을 놓고 지켜보던 장인규는 뜸이 피부를 태우기 전에 핀셋을 이용해 재빨리 제거했다.
“다 됐습니다. 요즘은 좀 어떠세요?”
“한결 편해져서 요즘은 잠도 잘 잔다오.”
“지난번에 지어드린 약 꼬박꼬박 복용하는 거 잊지 마시고 나흘 뒤에 다시 뵐게요.”
“수고했어요, 의사 양반.”
“네. 근데 빨래나 무거운 건 남편분께 부탁하세요. 차가운 물에 설거지하지 말고요. 그럼 더 빨리 좋아질 겁니다.”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나? 의사 양반이 얼른 낫게 해주는 게 빠르지.”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나가는 환자를 보며 장인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음 환자 들어오라고 해.”
“예약 손님인데 안 오셨습니다, 선생님.”
“후우~ 다들 낫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괜찮아졌다 싶으면 오질 않는다. 그러다 다시 악화되면 찾아온다. 그러다 완전히 망가지면 그땐 방법이 없다는 걸 모른 건가.
경고를 해봤지만 소용없다.
“그만큼 삶이 바빠서인지 아님 어리석은 건지 어쩔 수 없지. 뜸은 얼마나 있지?”
“지난번 만들어놓으신 것의 3분의 1쯤이요.”
“할 일 없는데 뜸이나 만들어둬야겠네.”
그가 쓰는 쑥은 유명한 약재상에게 물건을 받아 그가 직접 만든 것이다.
“연락해서 가져오라고 할까요?”
“아니. 류 선생은 뭘 하나?”
“오전에 진료했던 환자들 진료 기록 살피고 있어요. 불러올까요?”
새로 들어온 의사들의 경우 한 달 동안은 오전 진료만 허락된 상태다.
그만큼 손님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과장과 다른 의사들을 돕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 김 간호사는 잠깐 쉬고.”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류현수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장 선생님.”
“그래요. 약재실에 가서 여기 적힌 약재들 가져와요.”
“…예, 알겠습니다. 근데 선생님, 약재 옆에 적힌 음양(陰陽)은 뭡니까?”
“이봐요, 류 선생.”
“예, 선생님.”
“아직까지 본인이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전문의 자격증이 있는 걸로 아는데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선생님. 얼른 가지고 오겠습니다.”
후다닥 나가는 류현수를 보고 장인규는 피식 웃었다.
“퇴근 전까지 가져오면 인정하지.”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약재의 세계는 끝이 없다.
환자의 상태, 체질, 사용량, 약재가 자란 환경 등등. 약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면 보약 한 첩이 그저 한 달간 꾸준히 먹어 몸을 좀 더 보(補)한다는 의미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장인규 자신이 그 세계의 끝을 봤다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극히 일부, 약재에 대한 지식이 뜸에 투영됐고 그래서 뜸에 대해선 다른 누구보다 한 발자국 먼저 앞서 나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한 발자국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침구과라고 침과 뜸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 자신의 한의학적 실력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분야가 침구과일 뿐이라네.”
그동안 조금이라도 더 앞서가기 위해 아등바등 공부를 했던 그였다.
하지만 쉰이 넘어가자 이젠 자신이 아는 바를 누군가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죽고 나면 사장될 게 빤한데 아까웠다.
한강대학병원에 들어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데 교육을 시작할 때까지 아직 1년이 넘게 남았는데 그동안 심심했다.
그래서 류현수를 찍은 것이다.
“한 놈은 배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니…….”
임동환을 가르칠까 해서 몇 가지를 시켜봤지만 시키는 일만 하는 척할 뿐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없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류현수가 상자를 들고 왔다.
“선생님, 가져왔습니다.”
임동환보다 빨리 왔다. 그 말인즉, 약간의 고민도 없이 약재를 담아왔다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그놈보다 더 구제불능인 놈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군.’
한마디 해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
“…벌써요?”
“약재실에 있는 직원에게 쪽지를 주니 알아서 챙겨주던데요.”
“응? 약재실 직원이? 줘볼래요?”
그는 상자를 받아 일일이 확인했다.
장인규는 약재를 구분할 때 색깔, 촉감, 냄새로 구분했다. 특히 손끝에서 느껴지는 촉감은 약재가 양의 성질을 가졌는지 음의 성질을 가졌는지 정확히 알려줬다.
‘질은 나쁘지 않은 정도지만 내가 원하는 재료야!’
음양이 완벽했다.
“…이걸 약재실 직원이 줬다고요?”
“예, 선생님. 제가 약재실은 처음이라 직원에게 물어보니 직접 골라가든지 챙겨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챙겨달라고 했습니다.”
“직원은요?”
“네?”
“직원은 약재실에 있냐고 묻는 겁니다.”
“직원이니까 당연히…….”
장인규는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나섰다. 김 간호사에게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말한 후 바로 약재실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약재실의 직원은 컴퓨터를 보고 있다가 말했다.
“조금 전, 침구과의 약재를 챙겨준 사람이 당신이요?”
“침구과라면… 아, 네.”
“혹시 한의사요?”
“아뇨. 한의사라면 여기에서 일하고 있진 않겠죠. 한방센터 행정지원실 직원입니다. 근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건지?”
“다름이 아니라 어떻게 내가 원하는 대로 약재를 골라줄 수 있었죠?”
“…쪽지에 적힌 대로 약재실에서 그대로 가져다 드린 건데요. 혹시… 문제가 있습니까?”
“그 얘기가 아니라 양의 성질을 가진 약재와 음의 성질을 가진 약재를 어떻게 그렇게 구분을 지을 수 있었냐는 겁니다.”
“적혀 있었습니다.”
“…네?”
“약재실에 들어가 보시면 알겠지만 정확하게 구분이 되어 있다고요.”
“…확인해 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혹시 약초를 가지고 나오시면 정확한 양을 측정하고 기록해야 하니 보여주셔야 합니다.
“구경만 할 생각이오.”
그는 직원이 올려주는 입구로 들어가 약재실로 들어섰다.
약간 서늘하고 습기가 전혀 없는 것이 약재를 보관하기에 적절했다.
“허~ 정말이었군.”
일반 한의원에 있는 약재 보관함을 몇 배는 키워둔 듯한 약재 보관함 위에 약재명과 함께 음양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음기, 혹은 양기만 가진 약초들의 경우 기운이 포함된 정도로 두 분류로 나뉘어 있었다.
장인규는 보관함을 열고 약재를 만져보며 색깔과 냄새를 맡았다.
“역시 제대로야!”
스무 개 넘게 살펴봤지만 모든 약재가 제대로 분류되어 있었다.
더 이상 확인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 직원에게 물었다.
“여기 약재실의 약은 누가 분류한 겁니까? 처음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보름 전쯤 약재 분류가 세분화됐습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행정지원실에서 보내오는데 그럼 제가 정리해서 넣어둡니다.”
“행정지원실에서 나누어서 들어온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행정지원실로 가봐야겠군요. 고맙소.”
그는 약재실에서 나와 곧바로 행정지원실로 갔다.
“어? 장인규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원실엔 웬일이세요? 뭐 시키실 일 있으세요?”
안면이 있는 직원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전 대리라고 했었나?”
“하하… 육성열 대리입니다.”
“아! 육 대리, 미안하네. 약재실에 약재 구매를 담당하는 이가 누군지 아나?”
“약재 구매라라면… 잠시만이요, 선생님. 하 주임, 약재 구매가 자네 담당 아니었나?”
육성열은 안경을 쓴 남자를 향해 물었다.
“아! 그거 현재 공 팀장님이 하고 계세요.”
“공 팀장님이?”
“예. 직접 하시겠다고 해서 넘겼습니다.”
두 사람의 얘기 속 공 팀장이라면 장인규 역시 알고 있었다. 행정지원실의 실질적인 장으로 여러 차례 만나고 술자리도 함께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 한의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던 눈치였는데 약재상 중 약재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있는 건가?’
약재를 분류한 이가 분명 한의사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의사라면 내 기술을 가르쳐 볼 생각이었는데.’
약재상에게 한의학 기술을 가르치느니 어설픈 한의사에게 약재 구분법을 가르치는 게 훨씬 나았다.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약재를 구분하는 능력이면 자신의 뜸 기술 역시 빠르게 가르칠 수 있었는데 아까웠다.
“공동희 팀장님이 담당한답니다. 조금 전에 나갔는데 전화해 볼까요?”
“…아니네. 내가 나중에 물어보지.”
힘없이 돌아서려 할 때였다. 직원 중 한 명이 말했다.
“공 팀장님 제가 좀 전에 봤는데 지하 3층 화물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약재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마과 선생님이랑 같이 있던데요.”
안마과 선생과 함께 있다는 소리에 다시 기운을 차린 장인규가 물었다.
“…안마과라면 이방익 선생?”
“아뇨. 엄청 동안인 젊은 분 있으시잖아요.”
“한두삼 선생?”
“아! 네. 한 선생님요.”
“고맙네.”
그는 서둘러 지원실을 나왔다. 한데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어디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일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저기 있군.’
넓은 지하 주차장이지만 살펴볼 곳은 한정되어 있었다. 트럭이 서 있는 곳만 확인하면 됐다.
가까이 다가가자 약재상과 얘기하는 두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한쪽에 서서 그들의 말을 엿들었다.
“사장님, 이 감초는 못 써요. 농약이 너무 많아요.”
“…한 선생, 이거 농약 없다고 해서 가져온 거야. 중국산이라고 다 농약을 쓰는 건 아니라고.”
“제가 이 감초를 푹 달여 드릴 테니까 한 달간 꾸준히 드셔보실래요? 장담컨대 사장님 우리 병원에 입원하셔야 할 거예요.”
“…그 정도라고?”
“네. 완전 최악이에요. 사장님, 저희가 약초를 받을 때 가격을 후려치는 것도 아니고, 중국산이라고 안 받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저 약재로 쓸 수 있는 수준으로 가져다 달라는 것도 힘드세요?”
“그게 아니라… 나도 미치겠다고. 한약 상가 인간들이 도대체 말을 들어 처먹어야지. 이것도 잔류 농약 검사 결과지까지 확인하고 가져온 거야. 나도 약재를 제법 보는데 농약 유무까지 알아맞히는 건 힘들다고.”
“알았으니까 저기 안쪽에 넣어둔 감초 좀 꺼내주세요.”
“…그건 품질이 나쁘다고 해서 다른 한방병원에서 싫다고 한 건데?”
“약재는 모양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오케이! 이걸로 할게요. 그리고 그 농약 감초 준 업체 전화번호 알려주세요.”
“뭐 하려고?”
“당연히 식약처에 연락을 해야죠. 그 감초 사장님이 반품하면 그들이 그냥 버릴까요?”
“아니, 팔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가 농약 덩어리를 푹 고아서 먹게 내버려 둘까요?”
“한 선생 꽤 무섭구나. 그럼 이틀 후에 연락해. 내가 관여됐다는 건 알려지긴 싫거든.”
“아니죠. 지금 바로 연락해야죠. 그래야 사장님이 의심을 안 받죠.”
“반품은?”
“어차피 돈은 나중에 주는 거 아니에요? 식약처 사람들이 왔을 때 들고 들어가면 끝날 것 같은데.”
“듣고 보니 그게 더 깔끔하겠네. 더 필요한 건?”
“다 된 것 같네요. 다음에 오실 땐…….”
“알았어! 농약 없는 약재, 괜찮은 약재로 갖다줄게.”
트럭이 떠나자 두삼과 공동희는 박스들을 지하 창고로 옮겼다.
장인규는 조금 더 지켜보자는 창고 쪽으로 몰래 다가갔다. 그리고 반쯤 열어둔 창고에서 두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먼저 입을 연 건 공동희였다.
“바쁘다면서?”
“바빠도 해야 할 건 해야지.”
“약재가 네 담당도 아니잖아.”
“약간의 시간을 투자해서 안전한 약재를 쓰게 되면 결국 우리 병원과 환자에게 좋잖아.”
“오호~ 그런 대단한 생각이었어?”
“하하! 그건 아니고. 솔직히 내가 제일 많이 쓰고 있잖아. 모르면 모를까 빤히 눈에 보이는데 나쁜 약재를 쓸 수는 없잖아.”
“그렇긴 하지. 근데 언제까지 네가 할 수는 없잖아. 직원에게 고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건 어때?”
“그러고 싶은데 쉬운 일이 아냐.”
“쉬워 보이는데?”
두삼은 박스에 담긴 약재를 분류된 작은 상자에 마구잡이처럼 던지고 있었다.
“보기엔 그렇지. 하지만 수련의까지 10년을 공부해도 쉽지 않은 일이야.”
“…자랑처럼 들린다.”
“자랑이야. 자! 이거 씹어라.”
“…뭔데?”
“그냥 먹어. 좋은 거야.”
“아무리 약재를 담당한다고 해도 함부로 먹으면 안 돼. 이건 병원의 재산이야.”
“남자한테 무지 좋은 거야. 특히 네 체질엔. 오늘 밤 잠을 못 잘지도 몰라.”
“…가끔 예외는 있는 법이지. 그냥 씹어 먹으면 돼?”
재미있게(?) 노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장인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