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89화 (88/122)

# 89

26. 오지랖(2)

한강대학병원의 하루 평균 수술 건수는 120여 건이다. 12시간 근무를 한다고 봤을 때 시간당 10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두삼이 수술 중 한두 건에 들어간다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한데 오늘은 달랐다.

“어서 오게.”

급한 수술일 거라 생각해서 달려왔는데 민규식은 의외로 여유로웠다.

“위급한 수술은 아닌 모양입니다?”

“뭐야? 자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고 있었나?”

“오늘이 무슨… 아!”

무슨 말인가 싶어 날짜를 떠올리던 두삼은 한 달 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일이 생각났다.

“하아~ 요즘 정신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젊은 친구가 벌써부터 그러면 어떻게 하나? 혹시나 싶어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정신없게 만드는데 한 몫 하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조금 서운하네요.”

“그저 ‘죄송합니다’ 한마디면 끝날 일을 남 탓으로 돌리다니 자네도 점점 뻔뻔해지는군.”

“죄송합니다. …이제 끝입니다.”

“허허허! 능글능글해진 아들을 보는 기분이군. 한 말이 있으니 여기까지 하지. 그나저나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아도 되겠나?”

“약속도 잊었는데 준비할 시간까지 바라면 예의가 아니죠. 언제든 가능합니다.”

“그럼 잘 부탁하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자를 위한 일인데 내가 고마워해야지. 그럼 난 잠시 후 다른 교수들과 들어가겠네.”

오늘 드디어 침을 통한 마취를 공식적으로 선보이는 날이다.

활성화될 때까진 십 년이 걸릴지 이십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지만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다.

스크럽(SCRUB)을 하고 수술실로 들어가자 안면이 있는 간호사가 장갑을 끼워줬다.

“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 이 선생님.”

먼저 자리를 하고 있는 마취과 이진석에게 인사를 했다. 그와는 이미 몇 차례 같이 마취를 했기에 친했다.

그의 옆에 서자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어서와. 요즘 활약이 대단하다며?”

“활약은요. 그냥 바쁜 것뿐입니다.”

“겸손은. 김 선생이 고맙다고 전해주래. 세미나 갔을 때 소아과 일 봐줬다면서?”

“운이 좋았죠.”

김진선이 부탁한 일을 하러 소아과에 갔다가 우연찮게 위험한 아기를 봐줬었다.

“또 겸손. 겸손이 지나치면 건방져 보여.”

“그럼 건방 좀 떨까요?”

“그건 재수 없고.”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환자 들어온다. 사람들 앞이라고 떨지 말고 잘하자.”

이진석의 말처럼 환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같이 들어온 레지던트들이 수술 준비를 마치고 나자 수술의가 들어왔다.

그는 40대 중반의 흉부외과 과장으로 머리숱이 유난히 없었다.

“거기 서 있는 선생이 오늘 마취를 한다고요?”

“네, 선생님.”

“이진석 선생이 마취를 할 경우 심장에 무리가 올 것 같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허락했지만 잘못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침을 통한 마취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아님 환자가 위험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건지 그것도 아님 얼굴을 꽁꽁 가리고 있어서인지 말투가 꽤나 강압적이었다.

“예, 선생님.”

그는 두삼의 짧고 담담한 대답에 마땅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참관인들이 들어오자 환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마취의인 이진석 선생이 옆에 있으니 걱정 마세요. 한숨 푹 자고 나면 끝나 있을 겁니다.”

“…부, 부탁… 드립니다.”

환자가 힘겹게 대답을 하자 수술의는 두삼을 향해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마취를 시작하겠습니다.”

두삼은 옆에 놓인 침통에서 침을 들어 뒷목과 어깨 바로 밑쪽에 침을 꽂았다.

전신 마취 침법은 수술하는 자세에 따라 시침이 불가능할 경우를 대비해 두 가지로 준비했다.

“다 됐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벌써?”

“양의학의 마취와 비슷합니다. 숙련되기가 힘들지 일단 숙련이 되면 정확한 위치에 꽂으면 순식간이죠.”

흉부외과 과장은 몇 번 테스트를 한 후에 물었다.

“수술 도중 풀릴 가능성은?”

“침을 뽑지 않는 한 문제없습니다.”

“…좋아. 그럼 시작하지.”

수술이 시작됐다. 조금만 떨어져도 수술하는 장면을 볼 수 없었기에 환자의 상태를 알리는 기계를 가끔 쳐다보는 것 말곤 할 일이 없었다.

자연 주변에서 참관하는 이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원장님 말씀을 의심한 건 아니지만 실제로 보게 되니 신기하군요.”

“저도 몇 번째 보는 거지만 여전히 신기합니다.”

“한데 꼭 필요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늘 환자처럼 마취가 되지 않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까? 게다가 환자가 깨어 있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요.”

“필요함이야 완성되고 나면 만들어지지 않겠습니까. 최근 성형외과에서 전신 마취로 인한 사건사고들도 많잖습니까. 또한 검사가 어려운 환자들이나 아이들에게도 효과적일 테고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두 사람의 대화가 현재 한의학의 마취에 대한 위치를 말해주는 듯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랄까.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나중엔 어떨지 모르지만 현재로써는 마취 방법을 만들어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게 두삼의 생각이었다.

발전은 자신을 매장시키는 데 한몫했던 잘난 협회에서 알아서 할 터였다.

과다 출혈로 인한 혈압 하락이 있었지만 오늘은 마취만 하고 가만히 있었다.

다른 한의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건 오늘 취지와는 맞지 않았다.

“수술 완료. 봉합은 자네가 하게.”

봉합을 퍼스트에게 맡긴 과장은 두삼을 보며 물었다.

“마취는 언제까지 놔둬도 되는 거요?”

“24시간은 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마취를 풀 땐 그냥 침을 뽑으면 되고요.”

“그럼 오늘 이대로 두는 게 낫겠군. …수고했어요.”

수술이 무사히 끝나자 마음이 풀렸을까 그는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수술실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봉합을 마친 환자까지 나가고 나자 참관인들이 다가왔다.

그중 부원장이 물었다.

“부분 마취도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전신 마취처럼 간단한가?”

“전신 마취보다 더 적은 수의 침을 사용합니다. 사지 중 하나씩도 가능하고 상반신, 하반신 마비 역시 가능합니다.”

“침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분명 신경을 자극해서 마취를 시키는 걸 텐데 위험성은 없습니까?”

다른 사람이 물었다.

“너무 긴 장침을 사용하거나 엉뚱한 곳을 찌를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마비가 되거나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긴 장침이 내부의 장기를 찌르면 죽겠지만 현재 사용한 침을 이용한다면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일시적인 마비 현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시적이라면 감각 신경이나 운동 신경이 되돌아온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신경을 직접 찌르는 것이 아니라 혈 자리를 이용해 그 밑에 있는 신경을 누르는 방식인 거죠. 침을 빼고 손가락으로 혈을 자극하면 되돌아옵니다.”

“경우와 사람에 따라선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군요.”

진땀이 날 정도로 집요했다. 그러나 어떤 의료 행위이던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신경이 끊어진다면 그럴 수 있겠죠. 그에 철저한 교육이 선행되어야겠죠.”

“혹 수술 도중 환자가 발작을 일으켜 침이 빠진다면 어찌 되나?”

질문은 계속 됐고 그에 대한 답을 성심껏 했다. 한데 거의 끝날 때쯤 엉뚱한 질문이 나왔다.

“자네가 마스크맨인가?”

슈퍼맨도, 배트맨도, 스파이더맨도 아닌 마스크맨. 짜증 난다.

흘낏 민규식을 보며 눈빛으로 도움을 청했다.

“허허! 이 친구가 병원 일을 도운 건 사실이지만 마스크맨이란 이상한 별명이 붙을 정돈가. 자자! 그 얘긴 내가 식사 시간에 따로 해줄 테니 이만 끝내세.”

원장 말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참관인들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일제히 나갔다.

“고생했네. 오늘과 같은 일을 한두 번 더 해야 할 수도 있을 거야.”

“해야 한다면 해야죠. 다음엔 잊지 않겠습니다.”

“허허! 그래야지. 오늘은 관람한 사람들과 해야 해서 점심은 다음에 하세.”

“챙겨야 할 사람이 있어 점심은 한동안 못 먹습니다.”

“아! 연아 양을 깜빡했군. 참! 오전에 원 여사님을 봤나?”

“연아 씨 어머니 말씀입니까?”

“그래. 입원했는데 자네에게 치료를 받고 싶어 하더군. 그러니 올라간 김에 잠깐 봐주게.”

“울화증인데 굳이 제가 볼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나 붙여도 되겠지. 하지만 딸을 치료하는 자네와 얘기하고 싶어서 온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을 붙여서 될까?”

“…이제 얘기 상대도 해야 합니까?”

“상담도 치료네. 게다가 상담 치료비는 비싸다네.”

“…이제 프로이드의 심리학도 봐야겠군요.”

“읽어보게. 재미있을 걸세. 허허!”

민규식과 헤어진 후 VIP실로 올라갔다.

* * *

“깨어 있었네요? 이제 슬슬 체력이 회복되고 있나 보네요.”

고연아는 밥을 들고 들어오는 두삼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려 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눈만 살짝 작아질 뿐이다.

한데 그걸 기가 막히게 알아채곤 엉뚱한 말을 했다.

“내가 오길 기다렸던 거예요? 중간에 오고 싶었는데 많이 바빴어요.”

‘아니거든! 너 따위가 바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누가 널 오길 기다렸다는 거야? 옆에 앉지 말고 꺼져!’

소리를 쳐보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녀 자신의 생각과 달리 두삼은 거리낌 없이 그녀의 옆에 앉아 목을 받혔다.

“저녁은 조금 진하게 해서 가지고 왔어요.”

‘내가 어린애야! 저리 꺼져!’

“정신이 없어서 쫄은 거 아니냐고요? 아니거든요. 이 죽으로 말하자면…….”

‘알아! 아니까 설명하지 마! 얼마나 대단한 죽이라고 올 때마다 설명하는 거야!’

이번에 하는 말은 들렸을까 두삼은 말을 멈추고 물끄러미 고연아를 쳐다봤다.

‘…뭐! 뭐!’

빤히 쳐다보니 왠지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시선을 피했다.

한데 두삼 피식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얼른 맛나게 점심 먹죠. 저도 배고프네요. 자, 아~ 해요.”

‘…주, 주사기 치워! 내가 애완동물이야? 숟가락으로 먹여주든지!’

이를 악물려고 해보지만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주사기가 싫으면 얼른 먹고 나아요.”

장난스럽게 말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진지하게 말할 땐 자신의 생각을 읽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됐다.

특히 음식을 먹인 후 귀와 턱에 손을 댈 때면 따뜻함이 전해져 기분이 좋았다.

‘내, 내가 무슨 생각을… 얼굴도 못생긴…….’

절대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선이 굵어서 남자답고 피부는 웬만한 여자보다 좋았다.

‘얼굴만 잘나면 뭐 해! 남자는 뭐니 뭐니 해도 마음씨가 우선…….’

살짝 미소 지은 표정으로 밥을 먹이는 모습을 보면 절대 악인은 아니었다.

게다가 말하는 것을 보면 자신을 살린 사람 아닌가.

흠을 잡으려고 하나하나 찾아보지만 단점이 거의 없었다.

‘다, 단점이 왜 없어! 수다스럽잖아. 남자가 무슨 말을 이렇게 많이 하는 거야. 봐봐! 또 말하려고 하잖아.’

“남자가 바람피우는 걸 본 후 살을 빼다가 거식증에 걸렸다면서요?”

‘…이, 이 나쁜 새끼야! 그 얘기는 왜 꺼내! 좋게 봐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놈이구나!’

“완전히 이해한다면 거짓이겠지만 그 마음 조금은 이해해요.”

‘이해? 웃기지 마! 너 같은 게 뭘 이해해! 사랑한다고 생각하던 이에게 더럽다고, 구토가 쏠리는 걸 참으며 만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어? 그러니 이해하는 척 하지 마! 정말 구역질 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 말을 하고 싶었다. 아니, 지금 못 하더라도 꼭 기운을 차려서 면상에다 침을 뱉으며 말해주리라고 다짐했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삼은 말을 이었다.

“연아 씨는 거식증이지만 난 폭식증에 걸렸었어요. 닥치는 대로 먹었어요. 구토를 하고 또 먹었죠. 길진 않았지만 그땐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얘기는 길었다.

왜 폭식증에 걸렸는지를 차근차근 듣다 보니 좀 전에 욕하던 마음이 옅어졌다.

목숨이 위험한 사람을 살리고자 노력한 것뿐인데 세상은 의료 사고로 몰아 의사 면허를 뺏으려 하고, 아버지는 사고를 치고, 애인은 이별을 통보하고,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인생 참 고달팠겠다 싶다.

‘…불쌍하긴! 이렇게 누워 있는 내가 더 불쌍해.’

고연아는 방금 가졌던 마음을 애써 부정했다.

“그때의 일 때문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루하게 살았었죠. 하지만 돌아가신 할아버지 덕분에 행운을 얻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다행히 행복해졌답니다. 자! 다 먹었네요. 재미없는 얘기 듣느라 지루했죠?”

‘…응, 지루했어. 알면 하지 마.’

“사실 힘내라고 한 말인데, 말주변이 없어서 자랑하는 것처럼 들렸을 수도 있겠네요.”

‘응, 자랑하는 것처럼 들렸어.’

“자! 다 먹었네요. 내일은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재미있는 얘기를 해줄게요.”

연신 투덜거리다가 막상 두삼이 떠날 때가 되었다니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왜 일까?

그의 손이 머리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자고 싶지 않은데…….’

좀 더 눈을 뜨고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은 너무나 포근해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자려 할 때였다.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연아 씨에게 저의 치료가 작은 행운이 되었으면 해요. 잘 자요.”

‘…….’

뭐라 대답하기 전에 고연아는 잠에 빠져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