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23. 개원(2)
크리스마스 때 하란과 직원들과 파티를 한 걸 제외하곤 해가 바뀌어 한 살을 더 먹어도 생활은 달라지는 게 없었다.
아침에 이효원을 치료하고, 병원으로 가 여기저기에 불려 다니며 일하다가 오후에 안마과로 가서 마무리했다.
딱히 불만은 없었다.
쳇바퀴 같은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게임을 하는 이들도 일일 퀘스트를 하며 쳇바퀴를 돌지 않는가.
스각! 스각!
스케이트 날에 걸리는 얼음을 밀어낼 때마다 들리는 소리가 꽤 상쾌하다.
이젠 스케이트 타는 것도 익숙해져서 이효원의 손을 잡은 채 보조를 맞출 정도는 됐다.
또한 치료를 하면서 어느 정도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내부와 외부를 따로따로 볼 수 있었다.
“우와~ 오빠, 어렸을 때 스케이트를 배웠으면 이름 꽤나 날렸겠어요.”
“스승이 훌륭하잖아.”
“에? 특별히 가르쳐 준 것도 없는데요?”
“네가 스케이트 타는 걸 봤잖아.”
사실 스케이트를 잘 타게 된 것은 말 그대로 이효원 덕분이다.
과거 하란의 어머니, 배영옥의 임독양맥을 뚫을 때 자신의 몸 내부가 똑같이 움직였듯이 이효원을 치료하는 동안 그녀의 근육 움직임, 자세를 계속 염두에 두다 보니 자신의 몸에 적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효원을 카피했다고나 할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점프를 하거나 회전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나랑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근데 오늘은 꽤 오래 하네요?”
“잠깐만. 이것만 하면 돼. 됐… 어어~!”
꽈당!
마지막 물꼬를 터준 후 말을 한다고 정신을 잠깐 놓았더니 호되게 넘어졌다.
“오빠, 괜찮아요?”
“괜찮아, 오빠? 손잡아.”
두 미인이 각각 손을 내밀었다.
“고맙다. 근데 효원이 넌 넘어지는 사람 잡아줘야지 그 순간 손을 놓아버려? 의리 없게.”
“그때 잡아봐야 함께 넘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더 다치는 거고요.”
“아~ 네에~ 그러셨어요?”
“진짜라니까요. 근데 방금 뭐가 됐다는 거예요?”
얄밉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괜히 도와주다가 다치면 그게 더 낭패다.
“네 오른발의 기본적인 틀이 완성됐어. 이제부터 연습해도 돼.”
“…진짜요?”
“응. 대신 무리는 하지 마. 여전히 효율은 좋지 않아서 금방 지칠 거야. 그리고 계속 반복하고 지켜봐야 하니까 지금처럼 아침 시간은 빼놓고.”
물꼬를 만들어뒀다지만 발로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기운의 양은 대략 15퍼센트이다. 효율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덥석! 갑자기 이효원이 두삼을 껴안았다.
“…고마워요, 오빠. 진짜 고마워요.”
“이, 인마! 떨어져! 다 큰 애가…….”
“조금만요. 조금만…….”
조금만이라면서 한참을 안고 있는 이효원.
국민 여동생이 안아주면 좋아해야 하는데 왜 자꾸 하란의 눈치를 보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다행히 하란은 등을 토닥여 주라고 제스처를 취했다.
토닥토닥!
“마음고생이 심했지? 애썼다. 하지만 이제 겨우 2단계 종료야. 고맙다는 인사는 다 나았을 때 받을게.”
“피이~ 그때 또 안아달라고요?”
“…그 말이 아니거든! 얼른 떨어져… 어어!”
밀치려는 순간 이효원이 휙 하니 떨어지는 바람에 다시 얼음 바닥에 넘어져야 했다.
절뚝절뚝!
두 번째 넘어지면서 타박상을 당했는지 걷는 게 조금 불편했다.
현관을 나서는데 루시가 말했다.
-두삼 님, 대퇴골 타박상이나 골절, 무릎 연골 찢김이 의심되네요. 얼른 병원으로 가셔야겠어요.
“…나 한의사거든. 그리고 병원에 출근하는 중이고.”
-다행이네요. 꼭 진료 받으세요.
말을 제대로 알아듣긴 하는 건가?
프로그램이랑 싸워봐야 뭐 하겠는가.
“걱정해 줘서 고맙다. 간다.”
-잘 다녀오세요.
“…….”
루시의 눈이 되어주는 카메라를 잠시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오토바이에 올라 어느 정도 벗어난 후에 중얼거렸다.
“뭐야? 마누라같이. 근데 왜 대답을 하고 싶어지는 건지… 사랑이 그리운 건가?”
비루하게 살 땐 결혼을 포기했는데 이제 조금 살 것 같은가 보다.
“쓸데없는 생각 말자. 그나저나 오늘도 춥네.”
겨울에 오토바이를 타는 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병원에 도착하니 8시 30분.
아슬아슬했다.
“안녕하세요, 한 선생님.”
“좋은 아침입니다, 한 선생님.”
“어서 와요, 한 선생님. 커피 마실래요?”
안마과의 식구가 늘었다.
도 간호사를 제외하고 각 진료실 간호사와 업무를 보는 간호사, 2층 업무를 보는 간호사까지 다섯이 늘었다.
업무를 보조해 주는 이들까지 치면 다소 북적이는 느낌이 난달까.
“이 선생님은요?”
“오늘 개원이라 그러신지 잔뜩 기합이 들어가 일찍 오셨어요. 근데 어디 아프세요? 자세가 어정쩡하네요?”
“아침에 빙판에 두 번이나 넘어졌어요.”
“저런! 조심하지 않으시고. 다치진 않았어요?”
“괜찮아요. 곧 다 나을 거예요.”
“…무슨 말이 그래요?”
멍든 피부와 근육을 몸속 기운들이 부지런히 치료 중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간호사들과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방익의 진료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한 선생! 왔으면 잠깐 얼굴 좀 보자.”
“네, 선생님.”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평소에 쓰지 않던 안경을 쓰고 서류를 보고 있었다.
도 간호사의 말처럼 개업이라고 살짝 흥분한 모습이다.
‘나도 기합을 더 넣어야 하나?’
이미 일상화된 병원 생활이라 딱히 흥분이 되지 않았다. 외과나 응급실처럼 긴박할 만큼 큰 사건은 없었다.
다만 수술실도 몇 번 들어갔을 만큼 서서히 업무 분야가 늘고 있었다.
“밖에 환자는?”
“글쎄요. 우리 과엔 아직 없네요.”
“잘됐네. 조금 이따가 내가 부른 손님이 올 거야. 한 선생한테 붙여줄 테니까 솜씨를 마음껏 발휘해 봐. 워낙 관리를 받던 사람이라 별건 없을 거야. 하지만 원하는 바는 확실하게 효과를 볼 수 있도록 해줘. 작은 것도 약간 크게, 생색은 확실하게. 무슨 말인지 알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안다.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말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환자는 어떤 의사를 좋아할까?
실력이 좋은 의사? 병을 꼼꼼히 잘 설명해 주는 의사? 서비스가 좋은 의사?
상황마다, 환자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당장 목숨이 걸린 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 많은 이들은 실력보다 환자에게 친절한 의사를 좋아한다.
정확하게는 환자의 의문을 꼼꼼하게 잘 설명해 주고 해결 방법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의사의 실력이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환자가 ‘왜 이렇게 안 낫는 거야?’라는 의문을 가지기 전에 고쳐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말이다.
의사 입장에서 보면 하루에 봐야 할 환자들은 많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친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돈을 받지 않고 하는 무료 봉사를 하는 게 아니잖은가.
아무튼 이런 면에서 보자면 한의사는 의술이 아닌 입으로 먹고 산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환자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편이다.
피드백이 바로 나오는 병이 아닌, 대부분 환자가 인내를 가지고 병원을 들락날락해야 하는 병을 치료하다 보니 설득을 잘해야 했다.
그러다 비싼 한약재를 팔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두삼은 말발이 좋다곤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악력이 없을 때 3년간 먹고살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어느 정도 단련이 되어 있었다.
“생색은 낼게요.”
“그 정도면 돼. 아! 도착했나 보다. 전화 왔다.”
책상 위의 스마트폰이 울리자 그는 얼른 받았다.
“어, 왔어? 입구 들어와서 15미터쯤 직진해서 오다가 오른쪽으로 보면 안마과 있어.”
그가 전화를 끊고 얼마 되지 않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자에 마스크를 한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연예인가 보네.’
겨우 보이는 눈과 전체적인 느낌만으로도 연예인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우라가 있었다.
“혜원 씨, 어서 와.”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혜원이라는 이름과 목소리가 S급 스타인 윤혜원임을 알 수 있었다.
“병원에 몇 번 찾아갔었는데 선생님이 안 계셔서 얼마나 서운했는데요.”
“미안. 갑작스레 효원이를 맡게 되어서 그렇게 됐어. 설마 누가 서운하게 했어?”
“아뇨. 그냥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요.”
“하하하! 이건 혜원 씨가 보고 싶었다니 영광이네. 요즘은 어떻게 지내?”
“새로운 드라마 준비한다고 정신없죠. 식단 조절 해도 이제 나이 때문인지 살이 안 빠지네요.”
딱 보기에도 말랐는데 살이 뺄 게 있나 싶다.
“그럴 것 같아서 불렀어.”
“호호! 선생님이 관리해 주시려나 싶어서 얼른 달려왔어요.”
“혜원 씨를 돌팔이인 내가 맡을 수 있나.”
“선생님이 돌팔이면 돌팔이가 아닌 사람이 있나요?”
“저기 저 친구. 한 선생, 인사하지. 여긴 톱스타 윤혜원 씨.”
“안녕하세요. 한두삼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윤혜원이에요. 근데 너무 젊어 보이시는데요?”
“저 친구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다니까. 올해 서른넷이라고 누가 믿겠어? 방법을 가르쳐 달라니 돈 주고 받으라고 하더군. 하하하!”
“어머, 그래요? 선생님 말씀처럼 실력이 엄청 좋으신가 보네요.”
이방익은 자신을 낮추고 두삼을 띄웠다. 듣고 있던 두삼은 민망함에 말했다.
“과장님도 참… 이 과장님 말씀은 그냥 후배를 띄워주기 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야 그렇지만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칭찬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어요. 제가 느끼기에 실력이 괜찮은 이에게도 실력이 형편없다며 혼을 내셨죠. 아무튼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톱스타 이미지와 달리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모습에 절로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혜원 씨, 불편한 곳이 있거나 원하는 게 있으면 자세히 말해.”
“그래야죠. 근데 혹시 불만족스러우면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한 선생, 다른 손님은 내가 맡을 테니 자네는 혜원 씨에게 최선을 다하게.”
“네. 그러겠습니다.”
자신의 진료실로 가려는데 이방익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귓속말로 속삭였다.
“스타 마케팅 알지? 치료비는 신경 쓰지 말고 보약도 팍팍 지어줘.”
윤혜원을 봤을 때 짐작했다.
의사들이 TV에 나오기 위해 1억을 썼네, 1억 5천을 썼네, 라는 말이 떠도는 이유는 출연하고 나면 그만큼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큰 병원들의 경우 스타 의사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내보내기도 한다.
두삼 역시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밥도 제때 먹지 못하고, 퇴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외과 의사들을 존경하지만 솔직히 그들처럼 살 자신은 없었다.
아니, 정확하겐 과거의 일로 그렇게 열심히 살아봐야 각자의 이익 앞에선 아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근데 선생님 개인 병원에 손해가 가지 않겠습니까?”
“손해는 무슨. 그리고 병원 팔았어.”
“에? 선생님 이름으로 된 곳이잖아요?”
“이름은 계속 쓰는 조건이야. 물론 내가 없다고 해도 잘 돌아가는 곳이고.”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곧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그래서 저한테 맡기신 거군요.”
“무슨 짐작인지 알겠는데 반만 맞아. 사실 내가 해도 상관없어. TV 출연도 1년 후부터는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그저 내가 키운 병원을 팔아놓고 대대적인 영업을 하는 건 도의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무엇보다도 우리 분야에 유명한 사람이 많을수록 내 목적이 빨리 달성되지 않겠어?”
대인배라고 해야 하나, 아님 정상을 밟아본 사람이라 그런지 아주 쿨했다.
“왠지 어깨가 무겁네요.”
“무거우라고 한 말이야. 3등 안에 들어야 할 거 아냐. 그러니 신경 써. 하하하!”
그는 가벼운 농담으로 기분까지 풀어줬다.
“한 선생님, 준비됐습니다.”
두삼의 담당 천 간호사가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수고했어요. 갈게요.”
천 간호사와 함께 진료실로 들어갔다. 윤혜원은 진료 침상에 옷을 갈아입고 앉아 있었다.
마스크를 벗고 있었는데 TV로 볼 때보다 훨씬 예뻤다. 하지만 매일같이 하란을 봐서인지 심장이 빨라지는 일은 없었다.
“진맥 좀 해볼게요. 혹시 불편한 곳 있으세요?”
맥을 잡으며 물었다.
“다이어트 때문에 기운이 좀 없어요. 그리고…….”
말을 하다가 천 간호사를 흘낏 봤다.
치료할 때 혹시 오해를 받을 수 있었기에 함께 들어온 것인데 불편한 모양이다.
“천 간호사님, 잠시 자리 좀 비켜주실래요?”
천 간호사가 나가고 나자 입을 열었다.
“아랫배의 살이… 좀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건 잠시 후에 보기로 하죠. 음, 다이어트를 자주하시죠?”
“아무래도 그렇죠. 집에 있을 때 살짝 살이 쪘다가 속된 말로 입금되면 빼죠. 많이 안 좋나요?”
“내부 장기의 기가 많이 쇠했습니다. 충분히 쉬면서 관리를 받는 게 좋은 상태입니다.”
“다이어트 할 땐 항상 그래왔어요. 이번엔 조금 심한 정도?”
윤혜원의 상태는 더할 것도 없이 상당히 안 좋았다.
말투를 보아 그녀 자신은 버틸 수 있다는 투다.
스타 마케팅을 해야 하는 입장에선 이런 경우 듣기 원하는 대로 말해주고 뱃살에 더 신경 써주면 훨씬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대로 둘 순 없었다.
두삼은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