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22. 길을 만들다(2)
* * *
“여긴 어쩐 일이야? 이방익 선생님과는 아는 사이?”
두삼에게 임동환은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는 동안 전 여자 친구에게 치근거렸다는 점만 마음에 걸릴 뿐, 류현수가 느끼는 것처럼 보기 싫을 정도는 아니었다.
“저 안마과에서 일하게 됐어요.”
“안마과? 안마사로 취업한 거야?”
악의는 없지만 재수 없는 물음에 어이가 없어진다.
“선배, 저도 한의사거든요? 그리고 안마사는 시각장애우들밖에 못 해요.”
“으, 응. 그렇지. 그냥… 네가 침을 놨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렇게 물은 거야.”
“다시 잡기로 했어요.”
“…그래도 되는 거야?”
“그때 제가 잘못한 건 없어요. 그저 뭔가에 휘둘려서 그런 결정을 했을 뿐이고요.”
“…그렇구나. 다행이다. 그럼 네가 안마과에 이방익 선생님과 함께한다는 그 한의사?”
임동환은 뭐가 떠올랐는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방익 선생이 이 녀석과 함께 일하고 싶어 병원에 들어온 거라고?’
이방익이 한의사계의 스타라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돈과 명예를 둘 다 가진 그가 왜 굳이 한강대학교병원에 왔는지 의아해했었다.
그때 들은 것이 바로 실력 좋은 누군가와 함께 일하기 위해서라는 소문이었다.
한데 소문의 주인공이 두삼이라니.
대학교 때 두삼에게 가지고 있던 자격지심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침술의 영재, 교수, 화타 환생 등. 자신이 들어야 할 환호와 가져야 할 인기를 독차지한 놈.
게다가 자신이 점찍어 놓은 주해인마저 차지한 놈.
자신의 앞길을 막기 위해 태어난 놈 같았다.
그래서 치워 버렸다. 한데 다시 나타난 것이다.
‘말도 안 돼! 전문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보건의를 끝내고 침도 잡지 않은 녀석이 제대로일 리가 없어. 마사지와 물리치료를 배웠다더니 그걸로 뽑혔을 거야.’
침술에 대해 깎아내려 보지만 그래도 뒷맛이 좋지 않았다.
“네. 그렇게 됐어요. 근데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들어가요. 선생님들 기다리시겠어요.”
“…그러자.”
안으로 들어가자 현재까지 신설된 10개의 과 과장과 센터장이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대화가 끊기지 않게 조용히 들어가 이방익의 옆에 앉았다.
한데 그게 더 집중을 시켰나 보다.
반백의 대머리인 센터장 고웅섭이 물었다.
“지금 들어오는 젊은이는 누군가?”
“처음 뵙겠습니다. 안마과의 한두삼입니다.”
“오! 한 선생이었군. 너무 어려 보여서 학생인 줄 알았네. 학교는 어딘가?”
“경해대입니다.”
“침구과 임 선생도 경해대라고 하지 않았나? 젊은 의원 둘이 있는데 둘 다 경해대라니. 다른 학교 젊은 의원들이 노력해야겠군요.”
고웅섭은 그저 칭찬을 한마디 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하지만 다른 대학 교수들에겐 그렇게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한마디가 묘한 기류를 만들어냈다.
“제 모교에도 훌륭한 인재들이 많습니다.”
“제 모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합격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우리 원강대가 더 많습니다, 선생님.”
“고작 한 명 차이 나는데 ‘더 많다!’고 표현하기엔 그렇습니다. 저희 한천대야 말로 요즘 가장 핫하죠.”
과장들은 말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모교가 무시당한다고 생각했을까 모두 한 마디씩 했다.
대수롭지 않게 뱉은 한마디에 좋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흉흉하게 바뀌자 당황한 건 오히려 고웅섭 센터장이었다.
“허어~ 내 말을 그렇게 받아들이면 내가 미안하지 않나. 내 사과할 테니 기분들 풀고 하던 센터의 발전 방향에 대해 얘기하세.”
연장자이자 센터장인 그가 말하자 교수들은 당장은 수긍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모종의 결심을 하고 있었다.
1시간 넘게 영혼이 없는 대화가 이어지자 모임은 어영부영 끝나 버렸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둘만 남게 되자 이방익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중얼댔다.
“센터장님이 하필이면 가장 민감한 부분을 말해 버려서 앞으로 볼 만하겠어.”
“뭐가요?”
“아까 교수들 하는 거 보지 않았나? 얘기하는 내내 아마 자신의 모교 학생들 중 실력이 괜찮은 인물을 생각하고 있었을걸.”
“모교 출신을 데리고 온다는 말씀입니까?”
“아마 그럴걸.”
“T.O가 납니까?”
“얼마나 많은 환자가 오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백에 구십구는 현재의 인원으로 부족할 거야. 현재 수련의들도 없지 않은가.”
“음, 그럼 큰일이네요.”
“왜? 교수가 되지 못할 것 같아 걱정 되나? 걱정 말게 만일 안마로 인한 치료가 보다 확실해지면 그땐 어느 대학을 가도 교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교수가 된다면 좋겠지만 사실 안 되어도 상관없다.
쉴 시간도 없는데 교수까지 하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아닙니다. 교수가 되라고 해도 걱정입니다.”
“하긴. 근데 뭐가 큰일이라는 건가? 아! 후배들?”
대답은 씁쓸한 미소로 대신했다.
‘그래도 다른 곳보단 나으니 잘하겠지.’
미리부터 걱정해봐야 무슨 소용일까. 일단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 * *
그저 스케이트를 신고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정도만 기대했는데 수영장을 빙판으로 만드는 것이 그냥 기온만 낮춘다고 되는 일은 아님을 알게 됐다.
얼음을 얼리는 전문가가 따로 있었고 온도 역시 꾸준히 맞춰줘야 했다.
“이렇게 거창할 것 같았으면 그냥 링크로 갈 걸.”
“대신 개인 스케이트장이 생겼잖아.”
하란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니 조금 위안이 된다.
“근데 오늘 루시는 조용하네? 아직 못 고친 거야?”
“이번 기회에 용량을 늘리려고 부품을 주문해 놔서 좀 걸릴 거야.”
“드론은 여전히 움직이는데?”
“최소한으로 작동시켜 뒀어. 어어… 오, 오빠 잡아.”
스케이트를 신고 있던 하란이 미끄러지면서 뒤로 넘어지려 했다.
두삼은 미끄러지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있었기에 얼른 손을 뻗었다.
손을 잡자 하란의 다리가 두삼 쪽으로 오면서 몸이 기울었다. 그래서 한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
“…….”
다리와 다리가 엇갈린 상태에서 딱 붙었다.
드라마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세가 아니라 성인물에서 나올 법한 꽤 부끄러운 자세였다.
“으음, 조금 나중에 올 걸 그랬나?”
이효원이 눈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좀 그러지 그랬냐. 하필 지금 딱 나타나서는.”
두삼은 하란을 바로 서게 하며 말했다.
“어머! 어머! 이 오빠 태연한 것 좀 봐. 뻔뻔한 거예요? 아님 예전에 바람둥이였던 거예요?”
“우리 치료 1단계로 돌아갈까?”
“…위기에 처한 언니를 돕다니 정말 멋지세요, 오빠. 전 이제 뭐 하면 되는 거예요? 하하!”
“일단 스케이트 신고 내려와서 손부터.”
“근데 오빠, 손을 내밀 때마다 강아지가 되는 기분인 거 알아요?”
“뼈다귀라도 사올까?”
“칫! 방해했다고 너무 까칠한 거 아녜요? 그러지 말고 오빠도 타세요. 손잡고 타면 되잖아요.”
“네 속도를 어떻게 따라가냐?”
“여기서 무슨 속도를 내요. 그냥 천천히 얼음을 가르는 기분만 내는 거죠. 얼른 타요.”
“스케이트 없어.”
“짜잔! 그렇게 말할 것 같아서 언니가 준비해 뒀죠.”
준비성도 좋으셔라.
사실 이효원이 말하는 방법대로 하는 게 제일 좋았다. 실시간으로 확인이 가능했고 흐름을 단숨에 파악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못 타. 스케이트 타본 적 없어.”
얼음 위에서 뭔가를 해본 건 어릴 때 논에서 썰매를 타본 게 다였다.
“뭐예요? 그것 때문에 이 핑계, 저 핑계 댄 거예요? 오빤 운이 좋은 줄 아세요. 금메달리스트에게 스케이트를 배우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 배워서 같이 타면 되잖아.”
하란이까지 등을 미는데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스케이트를 신고 빙판에 섰다. 설 수는 있었지만 앞으로 나가는 건 도통되지 않았다.
뭐랄까 머리와 다리가 따로 노는 기분이랄까.
“…이래선 집중을 할 수가 없어.”
“호호! 처음엔 다 그래요. 무릎 살짝 구부리고, 손!”
“이거야, 원…….”
손을 뻗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점프를 뛰는 건지…….
오늘 따라 이효원의 대단함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효원이 양손을 잡더니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중심을 잡느라 이효원의 기를 읽을 틈이 없다. 자신의 운동신경이 이렇게 둔했나 싶다.
“어어! 어어!”
엉덩이에 힘을 너무 줬는지 다리는 앞으로 가고 엉덩이는 뒤로 빠진다.
넘어지겠다 싶은 순간 하란의 손이 허리를 받쳐줬다.
“나도 있으니까 너무 겁먹지 마.”
“…고마워.”
하란이 빙긋 웃어주니 왠지 모르게 든든했다. 물론 약간 꼴사납다는 생각도 들었다.
‘넘어지면 어때. 다치지만 않으면 돼.’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한데 그 순간 신기하게 잔뜩 긴장된 몸이 풀렸다. 그리고 잔뜩 힘을 주고 있을 때보다 훨씬 안정적이게 됐다.
“그래요, 그렇게 힘을 뺀 상태에서 한 발씩 대각선으로 밀어요.”
요령을 잘 모르니 쉽진 않았다.
살짝 하란을 돌아보며 어떻게 타는지 보고 몇 번 시도를 하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졌다.
‘이제 효원이의 내부를 볼까?’
양손이 하얗게 빛났고 그 빛은 효원의 양팔을 통해 온몸으로 번져갔다.
이효원이 스케이트화를 신고 빙판에 올라서면 온몸에 퍼져 있던 기운이 활성화되며 하체로 활발하게 모여들었다.
언제나 봐도 신기한 현상.
다친 다리에 집중했다.
1단계 치료가 장마로 인해 폐허처럼 망가진 도로의 형태를 복구하는 공사였다면, 2단계는 망가진 도로에 아스팔트를 까는 공사였다.
제대로 된 길을 만들고 그 길을 통해 기운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다.
고통스러운 1단계를 계속해서 반복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스팔트까지 깔지 않는다 해도 길을 지나다닐 수는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
그리고 그 결과를 지금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대로 되긴 했는데 기대만큼은 아니네.’
물처럼 빠르게 맥을 타고 내려가던 기운은 망가진 맥에 이르자 호스에서 벗어난 물처럼 옆으로 퍼져 버렸다.
하지만 첫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는 법.
맥에서 벗어난 기운은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발의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녔다.
‘유도를 할 수 있을까?’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넓게 퍼져 있는 기운은 내버려 두고 다시 기운을 들여보내 이효원의 기운에 더했다.
그리고 호스(맥)에서 벗어나자마자 왼 발의 온전한 맥의 방향으로 내달리게 만들었다.
‘따라온다!’
일부에 불과했지만 꼬불꼬불 간 길을 이효원의 기운이 따라왔다. 그리고 따라온 기운 중의 일부가 상승하는 맥으로 들어갔다.
문득 떠오르는 아이디어.
‘길이 없는 곳도 계속 지나다니면 길이 생기듯 맥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할수록 올라가는 기운은 조금씩 많아졌다.
10번을 반복한 후에 자신의 기운을 끊었다. 그리고 올라가는 곳의 맥을 지켜봤다.
희미하지만 길이 만들어진 걸까, 극히 적은 양에 불과했지만 지속적으로 기운이 들어왔다.
‘기뻐하긴 힘들어. 하나 더 해보자.’
이번엔 다른 길로 유도했고 또 다시 10번을 반복했다. 그리고 지켜본 결과 흔적이 만들어짐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전체 맥의 0.1퍼센트도 되지 않았고 왼 발과 똑같이 만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가능성을 봤다는 것에 무척 기뻤다.
지금까지 그저 추측으로 움직이다가 처음으로 가능성이 보이니 기쁘고 재미있었다.
“아자!”
파이팅을 넘치게 외치고 세 번째 길을 만들려 할 때 갑자기 이효원의 내부에서 튕겨지듯 나왔다.
스케이트를 타고 있음을 잠깐 망각하고 ‘아자’를 외치면서 양손을 하늘로 뻗은 것이다.
“어어!”
퍼억!
갑자기 벽이 보였고 그대로 처박혔다.
혼자서는 달릴 수 없는데 이효원의 손을 쳐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갑자기 손을 놓으면 어떻게 해요! 안 다쳤어요?”
빙판을 침대 삼아 누워 있는데 이효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하지만 다친 사람답지 않게 두삼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곧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머리를 다쳤나?”
하란 역시 걱정스럽게 내려다봤지만 두삼은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