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22. 길을 만들다(1)
오랜만에 이력서를 써서 민규식에게 건넸다.
“이보다 더 자세히 뒷조사를 하셨겠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드리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허허허! 그 사람 은근히 뒤끝이 오래가는군. 이제 드디어 우리 병원 의사가 되는 건가?”
“이미 절반쯤 그랬다고 보는데요.”
“그건 그렇지. 근데 값싸게 부려지는 게 싫진 않고?”
연봉 1억이다. 실수령액을 700만 원이 조금 안 되게 받는 것이니 지금까지 건당 받는 것에 비하면 적다.
그러나 불만은 없었다. 사실 그동안이 너무 비정상적이었던 거다.
“그동안 많이 챙겨주셨잖습니까.”
“그야 자네 실력으로 얻은 결과잖나. 능력만큼 버는 건 당연하다고 난 생각하네. 아무튼 나 사장과 같은 건이 있으면 소개해 줄 테니 열심히 해주게.”
“예. 원장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신경과로 가나?”
“네. 오늘 연구실 안내받기로 했거든요.”
“치료제를 개발해 보게. 그때부턴 돈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을 걸세.”
“덕담으로 듣겠습니다.”
그게 쉬웠으면 누군가가 벌써 개발했을 것이다.
마스크와 가운으로 갈아입곤 김영태 교수의 방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휴가는 잘 다녀오셨어요?!”
“선생님, 이거 드세요.”
“네, 안녕하세요. 잘 다녀왔습니다, 김 간호사님. 감사합니다, 어머님.”
복도를 걷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귀찮지 않았다. 오히려 인사를 할 때마다 그들의 밝은 기운을 받는 느낌이라 좋았다.
“어서 오게. 커피 한 잔 하고 연구실로 가지.”
김영태 교수의 방으로 들어가자 그는 커피부터 권했다.
“그래, 휴가는 잘 보냈나?”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살아 계실 때 찾아봬야지. 바쁘다는 핑계가 나중에 후회가 된다네.”
씁쓸하게 웃는 것이 커피의 쓴맛 때문만은 아닌 듯 보였다.
“그러겠습니다. 한데 실험 대상자는 구하셨습니까?”
전에 실험 대상이었던 이들은 모두 퇴원을 해서 정기적인 방문만 하면 됐다.
물론 퇴원을 했다고 다 나은 건 아니다. 그중 연령별로 20퍼센트에서 80퍼센트까지 다양한 치료를 한 후 장기적 관점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환자는 넘친다고 말했지 않나.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외국인까지 지원을 했다네. 모두 50명인데, 불쌍하다고 절대 멋대로 치료를 하면 안 되네. 정해진 규칙에 따라 서서히 치료와 실험을 병행할 것이네. 치료할 사람은 실험군을 제외하고도 많으니 치료는 그들에게 온전히 집중해 주게.”
어차피 지난주처럼 신경과에 온전히 집중을 하긴 힘들었다.
“알겠습니다. 한데 50명을 수용할 공간이 병원에 있습니까?”
“이번에 연구비가 제법 많이 나왔다네. 직접 가보지.”
김영태 교수의 연구소는 본관 건물 뒤쪽에 위치한 별관건물에 있었다.
“여긴 한강대학교 의학연구소. 의사들이 하는 연구를 돕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곳에서 자체적으로 새로운 약을 만들어 실험을 하기도 한다네. 한약의 성분을 분석해 새로운 약을 만들 때 꽤 유용할 걸세.”
“연구원들과 알아두면 좋겠군요.”
“모든 일이 그렇지 않나. 오른쪽으로 가지.”
로비에서 오른쪽 복도로 들어가자 전자자물쇠가 달린 문이 나타났다.
“자, 이게 자네 신분증이네. 이게 없으면 지문 인식으로도 가능하지만 잊어버리지는 말게.”
“보안이 꽤 철저한가 보군요?”
“대단하진 않지만 최소한의 보안은 해야지. 만일 약 개발이 진행되면 그땐 철저해지겠지.”
철컹!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하네요?”
“오늘 저녁에 1차 실험자 스물다섯 명이 들어오면 그때부터 북적이겠지. 실험은 이미 나와 있는 약의 반응을 살피는 것부터 시작할 거야. 내일 아침엔 이쪽으로 바로 오면 되네.”
“알겠습니다.”
보안이 잘된다는 걸 제외하곤 병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새로운 기기들이 들어왔다고 말했지만 의료기기, 특히 신경과에서 쓰는 의료기기까지 알기는 힘들었다.
구경을 다하고 다시 신경과로 가서 입원 환자 중 급한 이들의 치료를 했다.
다만 속도는 예전보다 한결 낮추었다.
처음에 10퍼센트를 치료했다면, 이번엔 5퍼센트로 줄이고 대신 인원을 늘렸다.
중간에 신부전증 환자를 위해 내과와 소아과에 다녀오고 나니 12시 30분이었다.
이제야 오전 일정이 끝난 것이다.
“후우~ 이 선생님이 기다리시겠네.”
푸드코트에서 샌드위치와 우유를 사서 먹으며 한방센터로 갔다.
물론 마스크를 벗고 한방의 가운을 입은 채였다.
이곳에서까지 마스크맨이라는 촌스러운 별명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아, 예.”
얼마 전까지 텅 비었던 곳에 이제는 제법 많은 이들이 오가고 있었기에 인사를 했다.
그러다 공동희 대리, 아니, 이제 한방의학센터 행정지원팀 팀장을 봤다.
“여어~ 공 팀장.”
“…한 선생님, 동갑이지만 서로 존중하면서 지내는 게 낫지 않겠어요?”
“참나, 너도 너다. 반말한다고 널 존중하지 않는 건 아니거든.”
“불편합니다.”
“그럼 넌 높임말 쓰든가. 수고.”
다시 높임말을 할 것 같지 않다고 생각되었을까 지나가는데 쭈뼛거리며 그가 말했다.
“…안마과에서 주문한 의료 용품 가져가.”
“그래? 어디 있어?”
“저기.”
그가 가리킨 방향엔 라면 박스 크기의 박스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캐리어가 있는 것이 저걸 나르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직원들 없냐?”
“다들 바빠. 오픈까지 두 달 정도 남았는데 벌써부터 다 출근시키면 낭비야.”
“지원팀답다. 나중에 용품 얻을 때 엄청 빡빡하게 구는 거 아냐?”
“아끼는 건 당연한 거야. 물론 치료에 필요한 용품은 아끼지 않겠지만.”
“어련하시겠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얼른 나르자.”
“됐어. 너희 과 것만 챙겨가. 제대로 왔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대조해야 해.”
“알았다. 대신 끝나고 잠깐 들러. 마사지해 줄게.”
“…너 혹시? 아니다. …아무것도 아냐.”
“싱겁긴. 이 두 박스 맞지? 수고해.”
박스를 들고 안마과로 갔다.
이방익은 접수 데스크의 간호사와 얘기하고 있다가 두삼을 보곤 말했다.
“한 선생, 출근 시간이 너무 자유로운 거 아냐?”
“죄송합니다. 정식 오픈 하면 달라질 겁니다. 이 의료 용품 박스는 어디에 놓을까요?”
“여기다 놓아주세요. 정리는 제가 할게요. 참! 전 안마과를 담당하게 된 도예리예요.”
“안녕하세요, 도 간호사님. 한두삼입니다.”
“도 간호사는 예전에 내 병원에서 일했었어. 임신하고 그만뒀다가 복귀했어. 몇 년 만이지?”
“5년요.”
“애는 잘 크지?”
“…예. 둘째도 있어요.”
“둘이면 부지런히 벌어야지. 그만둘 때 다시 시작하게 되면 우리 병원으로 오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여기로 복귀했네.”
“선생님도 참. 거긴 T.O가 없잖아요.”
“도 간호사가 복귀한다고 했으면 바로 자리를 만들었지. 아무튼 괘씸하긴 하지만 처음 오픈하는 이곳 상황을 생각하면 도 간호사가 이곳에 온 것이 행운이라고 할 수도 있지.”
“일을 잘하시나 봐요?”
두삼이 물었다.
“잘해. 두 사람 몫은 거뜬할걸.”
“이 선생님 또 비행기 태우시는 거 보니 커피를 마시고 싶은가 보다. 알았어요. 타 올게요. 한 선생님도?”
“감사합니다.”
“아! 근데 믹스커피예요.”
“상관없습니다.”
도 간호사가 탕비실로 들어가자 이방익이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마셔보면 믹스 커피의 새로운 맛을 느낄걸. 진짜 그만둔다고 했을 때 도 간호사 커피 못 마시는 게 제일 아쉬웠어.”
설마 그 정도일까 했다.
한데 커피를 마셔보고 정말 평소에 마시던 믹스커피인가 싶을 만큼 놀라웠다.
“큭큭! 내 말이 맞지. 그만 놀라고 들어가지. 할 얘기가 있네.”
커피를 들고 그의 진료실로 들어갔다.
“참! 자네 진료실부터 구경해야 하지 않나?”
“환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요.”
“그럼 먼저 얘기하지. 지난번에 봤을 때 우리 과는 안마사를 채용한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러셨죠.”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일반 안마가 아닌 치료를 위한 안마를 위해서라면 나의 기술과 한 선생의 기술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나?”
“아! 그렇군요.”
필요하다면 직접 할 수도 있지만 환자가 밀려올 때도 감안해야 했다.
클리닉까지 하게 되면 하루 종일 안마만 해야 하는 될 것이다.
“그래서 한가한 지금 일주일에 두 번 그들을 교육시킬까 생각중인데 한 선생 생각은 어때?”
“당연히 해야죠.”
“오케이! 시간은 편하게 정하게. 한 선생이 하지 않는 날 내가 하는 것으로 하지.”
“염치불구하고 그러겠습니다.”
“바쁜 걸 빤히 아는데. 참! 1시간 후에 각 과의 과장들과 얘기하기로 했어. 센터 의원들끼리 얼굴이나 익히자는 차원이니 참석할 수 있으면 해.”
“그래야죠.”
좋든 싫든 간에 앞으로 봐야 할 사람들이다. 미리미리 안면을 익혀두는 게 좋았다.
“클리닉에 대해선 어떻게 됐습니까?”
“일단 제출해 뒀어. 센터장님이 병원장님이랑 의논해서 결정하기로 했네.”
“저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겠군요? 그럼 안마사들 가르치는 건 일단 두고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걱정 마. 비만클리닉은 무슨 일이 있어도 뺏어올 테니까. 그리고 한 선생이 있는데 원장님이 어느 정도 가산점을 주지 않겠나. 하하하!”
“하하. 기대해 보죠.”
얘기를 마치고 진료실로 왔다.
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엔 진료를 볼 수 있는 침상이, 왼쪽엔 간단히 치료를 할 수 있는 장비와 도구들 놓아두는 주사실 겸 창고가 있다.
볼 것이 없음에도 두삼은 구석구석을 천천히 살폈다.
“보건소의 내 진료실이랑 비슷하네…….”
비슷하다는 건 느낌일 것이다.
오래된 섬 보건소의 진료실과 얼마 전에 리모델링이 끝난 진료실이 비슷할 리가 없었다.
공중보건의를 끝내는 날, 가운을 입고 두 번 다시 누군가를 진료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한의사 한두삼]이라 적힌 명패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두삼은 격세지감을 느꼈다.
병원 일을 하지 않더라도 먹고 사는 덴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쪼개고 쪼개 한강대학병원에 들어온 이유는 한의대를 다닐 때 당연하게 생각하던 꿈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병원 생활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좋았다.
“험험!”
헛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방익이 들어와 있었다.
“노크 소리도 못 듣다니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군.”
“…한의대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하는 건 누구나 꿈꾸는 일이잖습니까.”
“난 아니었는데. 돈을 많이 버는 게 꿈이었어. 그래서 나만의 한의원을 만들었던 거고.”
“…그러시군요.”
“이제 돈은 벌만큼 벌었거든. 그래서 새로운 꿈을 이루고자 들어온 거야.”
“안마를 의학의 분야로 인정받기 위해서 말입니까?”
“민 원장님께 들었나 보군. 맞네.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그럴 리가요. 근데 무슨 일이십니까?”
“갈 시간 됐네.”
“…벌써요?”
“푹 빠져 있었나 보군. 괜스레 미안해지네.”
“…아닙니다. 가시죠.”
가운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과를 나와 센터 출구 쪽으로 나갔다.
다른 과에서도 약속 장소로 가는지 여러 명이 앞에서 가고 있었다.
그때 좌측 복도에서 중년 여성이 나오며 이방익에게 아는 척했다.
“어머! 이 선생님. 약속 장소에 가시는 거예요?”
“아! 성 선생님. 가시는 길이면 같이 갈까요? 한 선생 인사드리게. 한방부인과의 성희숙 선생님.”
“처음 뵙겠습니다. 한두삼입니다.”
“반가워요, 한 선생. 근데 혹시 경해대?”
“네. 선생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래요. 그럼 이은수 선생 알겠네?”
“네, 후뱁니다.”
“혹시 한 선생이 면접 봤어요?”
“…….”
어떻게 알았지?
“이은수 선생을 뽑아줘서 고맙다고 하려고 꺼낸 말이니 긴장 마. 어쩜 애가 그리 솜씨가 좋은지. 아무튼 3차 면접 점수가 최고점이라 이것저것 묻다 보니 선배가 면접을 봤다고 해서 유추해 본 거야.”
“…은수 실력이 뛰어난 거지 제가 칭찬받을 일은 아닙니다.”
“뛰어난 실력이 있는지 알기 위해선 보는 사람도 실력이 좋아야 하는 법이야. 아! 그렇게 되면 나도 그렇게 되는 건가? 호호호!”
꽤 재미있는 양반이다.
약속 장소는 과거 양반집을 현대식으로 고친 고풍스러운 찻집이었는데 부침 냄새가 나는 걸 보니 곡주도 파는 것 같았다.
막 들어가려 할 때 전화 통화를 하며 나오던 임동환과 마주쳤다.
“어? 넌…….”
“안녕하세요, 선배.”
센터 의사들끼리 만난다고 했을 때 만날 거라 예상했기에 담담하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