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21. 휴식(3)
***
부모님 집에서 하루를 쉬었다. 그리고 점심을 사드린 후 서울로 올라왔다.
한데 올라오자마자 류현수에게 연락이 왔다.
-형··· 나 왜 이렇게 재수가 없죠?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술 먹고 싶으면 술 먹고 싶다고 말해.”
-···술 먹고 싶어요.
“그래. 보쌈에 소주 한잔하자.”
장충동이 족발로 유명하다고 족발만 있는 건 아니다.
장소를 잡고 위치를 메시지로 보내자 10분이 지나지 않아 그가 도착했다.
술이 먹고 싶어 한 전화인줄 알았더니 진짜 무슨 일이 있는지 죽상이다. 그리고 자리에 앉기 전부터 소주를 시켰다.
“아줌마! 소주부터 주세요.”
“병원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냐?”
“요즘은 병원이 아니라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어서 괜찮아요. 그리고 오늘 같은 날은 책 본다고 머리에 들어올 것 같지도 않고요.”
“무슨 일인데?”
아주머니가 가져온 소주를 따서 한 잔 따랐다.
“크~ 오늘 면접이었어요.”
“그래? 근데 왜? 면접이 잘 안 됐어?”
“면접이야 그럭저럭 잘 봤어요. 그런데 면접관이 지랄이라서 문제죠. 면접관이 과의 과장급이라면서요?”
“응. 아마 그럴걸.”
“오늘 절 면접 본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그는 소주를 연거푸 두 잔 더 마신 후 말을 이었다.
“임동환! 그 인간이 면접관석에 앉아 있는데 얼마나 당황했는지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니까요.”
“···임동환 선배?”
두삼 역시 믿어지지 않았기에 반문했다.
“예! 진짜 면접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나올 뻔했어요.”
교수급 명단을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아니면 민규식 원장이나 다른 사람이 꽂은 사람이라는 건데 실력이 좋을 가능성이 높았다.
“수련의 때랑은 다르지. 너도 전문의가 되는데 설마 뭐라 하겠냐?”
“그 인간과 같은 과라는 거 자체가 싫어요. 그리고 분명 사사건건 간섭할 게 분명해요. 형은 그 선배랑 같이 일하고 싶어요?”
“난 상관없는데?”
“···쿨하시네요. 아무튼 전 싫어요.”
“싫으면 어쩔 건데?”
“전과를 하든가, 그것도 아님······.”
얼버무리는 것이 현실을 모르진 않나 보다.
“죽기 싫을 정도 아니면 버텨. 그리고 버티면서 실력으로 눌러 버려.”
“그게 말처럼 쉽나요?”
“말처럼 쉬우면 그게 이상한 거지. 빠르면 내후년에 한강대학교에 한방의학과가 생기는데 침구과 교수 T.O가 몇 명일 것 같아?”
“···적어도 4명?”
“그래. 적어도야. 내후년에 당장 교수가 되는 건 무리겠지. 하지만 네가 실력을 보인다면 몇 년 안에 교수가 되는 것도 꿈이 아냐.”
“······.”
“설마 수련의 때보다 힘들겠냐?”
대형 대학병원을 끼고 있는 의과대학의 교수가 되는 건 이사장 배경이 있다면 모를까 그야말로 하늘에서 별 따기다.
수십 년간 온갖 아부를 떨어도 교수의 눈 밖에 나거나 줄을 잘못타면 교수는 고사하고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될 수도 있다.
한데 이런 기회를 사람이 싫다고 놓친다?
바보가 아닌 이상 한번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다.
“···형은 무슨 과예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나? 안마과.”
“에? 그런 과가 어디 있어요?”
“생길 거야. 대학에선 어떨지 모르지만. 아무튼 고민해 봐. 감정적인 결정이 미래의 네 모습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단 것만 기억하고.”
“······.”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
그만두고 여자 친구랑 한의원을 내고 알콩달콩 사는 것이 더 행복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동환 선배 얼굴 보기 껄끄럽겠다.’
상관없다고 했지만 마음 한켠에서 이는 찝찝함은 어쩔 수 없었다.
***
잔뜩 취한 현수를 택시에 태워 보낸 후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늦잠을 자보자고 알람도 맞추지 않고 잠에 들었다.
“······.”
해가 중천에 떠 있길 바라고 눈을 떴는데 조금 일찍 잠이 들어서인지 평소보다 더 일찍 깼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습관이 이래서 무서워요.”
다시 눈을 감았지만 정신이 너무 말똥말똥했다.
결국 몸을 일으켜 자리를 잡고 차분히 내부를 관조하며 기운을 돌렸다.
쓰고, 모으기를 반복해서인지 예전과 비교하면 상당히 많은 양이 몸 구석구석을 돌며 세포를 깨웠다.
‘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나연섭을 깨우고 아침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냥 앉아 기운을 돌리다 보니 묘한 고양감에 멈추지 못했다.
물론 그 고양감이 계속되진 않았다.
어느 순간을 지나자 비행기가 착륙하듯 고양감 역시 서서히 떨어졌다.
“음, 앞으론 이 정도는 해야겠구나.”
온몸이 사우나에서 막 나온 듯 가뿐하고 날아갈 것 같았다.
방을 나서자 썰렁한 거실 공기가 반긴다.
“···조용하네. 곧 익숙해지겠지.”
어머니가 싸준 복분자 엑기스를 물에 타서 한 잔 마신 후 아침을 준비했다.
“아! 혼자 먹을 거지.”
생각 없이 준비를 하다 보니 평소처럼 3인분 이상을 준비해 버렸다.
혼자 다 먹을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몸속 에너지를 쓴 후에 폭식을 하는 건 에너지로 가지만 멀쩡한 상태에서 먹으면 살로 갔다.
고민을 하다가 마당으로 나가 건물 옆에 있는 비상계단으로 올라갔다.
자고 있으면 내려올 생각이었는데 한미령은 빨래를 널고 있었다.
“똑똑!”
“···아! 깜짝이야. 오빠였구나.”
“여기 아무래도 문을 달아둬야겠다.”
비상계단을 쓰지 않을 땐 몰랐는데 아무래도 도둑에 취약한 구조다.
“괜찮아요. 문 꼭 닫고 자는데요.”
“아냐. 아무래도 불안해. 대문을 달고 아래층과 연결된 인터폰도 달자.”
“돈 많이 들 텐데······.”
“괜찮아. 연섭이 치료 끝내고 두둑이 받았어.”
“···오빠가 알아서 하세요. 근데 옥상엔 웬일이에요?”
“아! 맞다. 아침을 하다 보니까 너무 많이 해서 같이 먹자고. 아침 했으면 어쩔 수 없고.”
“아, 아니에요. 금방 갈게요.”
아래로 내려가 양념을 살짝 더했다. 건강식도 좋지만 먹는 행복감 역시 중요했다.
2층으로 올라온 한미령은 얼른 부엌으로 들어왔다.
“오빠 제가 도와 드릴게요.”
“됐어. 다했으니까 앉아 있어. 끝! 자아~ 먹자. 함께 아침 먹는 건 처음인가?”
점심, 저녁을 자주 함께했기에 어색할 일은 없었다.
막 숟가락을 들었을 때였다.
딩동! 누군가가 왔다고 인터폰이 울렸다. 하란과 이효원이었다.
“아침부터 웬일이야?”
-오빠, 오늘부터 혼자 밥 먹잖아. 특별히 같이 먹어주려고 왔지.
“···눈물 나게 고맙네. 들어와.”
두 사람이 합류했지만 의외로 식탁은 조용했다.
뭔가 어색한 분위기.
분위기가 싫었는지 이효원이 입을 열었다.
“이야~ 맛있다. 오빠 음식 잘하네요.”
“고맙다. 많이 먹으렴.”
“사랑받는 남편이 되려고 배운 거예요?”
“아니. 공중보건의 생활할 때 혼자 모든 것을 해야 할 때가 있었거든. 살기 위해 먹다가 문득 ‘할 일도 없는데 이왕이면 맛있게 먹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떠오르더라. 그때부터 열심히 만들어서 먹다 보니 이렇게 됐어.”
“···뭐, 뭔가 짠하네요.”
“하하하! 새옹지마라고, 그 덕에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된 거니 좋은 일이지.”
“그럼 어떤 걸 제일 잘해요?”
“글쎄? 해산물이려나? 지낸 곳이 섬이라 해산물을 가장 많이 먹었거든. 문어나 게 삶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한다.”
“그래요? 그럼 저녁엔 해산물 콜?”
“···말이 갑자기 왜 그렇게 되냐?”
“언니, 미령 씨, 먹고 싶지 않아요?”
“오빠도 쉬어야지. 근데 얼마나 잘 삶는지는 궁금하긴 하다.”
“···전 괜찮은데······.”
이효원의 물음에 하란과 한미령은 괜찮다는 듯 말했지만 어째 먹고 싶다는 표정들이다.
“그래, 먹자. 이럴 때 아님 언제 먹겠냐. 가게 저녁 시간이 다섯 시부터 여섯 시이니 비워둬.”
머릿속으로 뭘 사야 할지 생각하는데 하란이 말했다.
“참! 근데 오빠, 차는 저대로 둘 거야?”
“그러게. 큰길 쪽 주차타워에 주차를 시킬까 생각 중이야.”
가게 주차 공간은 잘 주차하면 3대, 어설프게 주차하면 2대가 끝이다. 한데 의외를 차를 끌고 오는 이들이 많아서 항상 차 있다고 봐야 했다.
굳이 더 넓힐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차가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면 곤란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집 주차장 써.”
“그래도 돼?”
“여유로워. 편하게 사용해도 돼. 주차비 얘긴 말고. 오빠가 항상 나에게 해주는 게 있잖아.”
누가 오해하면 어쩌려고 말을 저렇게 어정쩡하게 하는 건지.
아니나 다를까 이효원이 눈이 동그래져서 두삼에게 물었다.
“응? 오빠가 언니한테 뭘 해주는데?”
“몸 상태를 체크하는 거야.”
“···몸을?”
이효원은 하란의 몸을 아래위로 훑었다.
“건강 상태! 무슨 상상을 하는 거냐? 아침 다 먹었으면 일어나서 각자 일들 봐.”
“그렇게 경우가 없으면 안 되지.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미령 씨는 차 좀 준비해 줄래요?”
“괜찮아.”
“오빤 앉아 있어. 얻어먹었음 먹은 값을 해야지. 효원인 남는 반찬 냉장고에 넣어줘.”
세 사람은 결국 차까지 마신 후 복분자 엑기스를 한 병씩 챙기고 돌아갔다.
“후우~ 다 좋은데 정신이 없네.”
소파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다.
받을까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한 선생? 날세, 이방익.
이효원의 담당 한의사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안마과 과장이 될 사람이다.
“아! 네, 이 선생님.”
-오늘 병원에 언제쯤 오나?
“제가 휴가 기간이라 모레 나갈 겁니다.”
-그래? 그럼 지금 가게에 있나? 시간되면 좀 봤으면 하는데.
“오후엔 나가봐야 하긴 한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한데 무슨 일이신지요?”
-가서 얘기하지.
30분 정도 지나자 이방익의 차가 들어왔다.
그는 소파에 앉으며 내부 인테리어에 대해 평가했다.
“젊은 사람답지 않게 고전적인 걸 좋아하나 보군?”
“나무향이 좋아서요. 차 드시면서 말씀하세요.”
“후룩! 음, 차 끓이는 솜씨가 대단하군. 향과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아.”
“재료가 좋습니다.”
“재료가 좋다고 해도 약초가 가진 바를 온전히 끌어내는 건 사람이지.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맡게 될 안마과에 대해 얘기를 나누러 왔네.”
“···전 과장님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입장인데요.”
“한 선생이랑 함께하기 위해 한강대학병원에 지원했지 혼자 하려고 지원한 게 아닐세. 게다가 우리 과의 특성상 한 선생이랑 나 빼곤 다 안마사들만 고용되지 않나.”
“···그렇습니까?”
어쩐지 면접을 볼 때 안마과 지원자가 한 명도 없더라니.
“몰랐나?”
“예. 솔직히 면접보고, 병원 일과 가게 일을 병행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민 원장님도 그리 말씀하시더군. 아무튼 내가 원하는 건 상의해서 발전적으로 나아가는 걸세.”
“그러길 원하신다면 일단 듣겠습니다.”
솔직히 운영까지 신경 쓸 자신은 없었다. 다만 얘기를 듣고 첨언 정도만 할 생각이다.
“다름이 아니라 어제 센터 회의가 있었네. 거기서 클리닉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우리 과는 어떤 클리닉을 하는 게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