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21. 휴식(2)
***
요즘은 TV를 잘 보지 않아 모르겠다.
전엔 홈쇼핑에서 앞다투어 차를 팔았다. 그리고 그 방송은 채널을 마구 돌리다가도 마법처럼 멈춰서 쳐다보게 되는 힘이 있었다.
차에 시선을 두는 것도 잠깐, 솔직히 차 옆에 서 있는 늘씬한 미녀들에게 더 눈이 갔다.
그때 함께 TV를 보고 주해인이 물었었다.
[저 여자까지 함께 준다고 하면 당장 사겠지?]
[옆에 있는 한 명에게 집중해도 행복하게 해주기 벅찬데 두 명? 그냥 준다고 해도 싫다.]
···라는 말로 대답을 무사히 넘겼었다.
사실 그때의 속마음은 ‘응!’이었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이유는 나경록이 보낸 선물이 혹시나 차가 아니고···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 있는 여자가 섹시했기 때문이다.
그 미녀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한두삼 선생님?”
“네, 네. 전데요.”
“자동차 리스 회사에서 나온 소유연 대리예요. 저희 회사의 주요 고객 중 한 분이 차를 갖다드리라고 해서 가져왔습니다.”
“리스요?”
“그분이 그러셨습니다. 리스를 싫어하면 매매 계약을 해도 괜찮다고요.”
“아뇨! 리스가 좋습니다.”
솔직히 끌고 다닐 여유는 있다. 그러나 현재의 자신에겐 비싼 차가 필요 없었다.
차가 공짜로 생긴다고 공짜로 굴러가는 건 아니다.
취득세, 등록세, 개별소비세, 보험료는 기본으로 들어가고 의료보험이 올라가 이후에 세금 역시 만만지 않게 나온다.
약간의 허세를 위해 지불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차 값을 대신해 리스 비용은 그분의 회사에서 총 10년간 지불할 거예요. 2년에 한 번 최신 차량으로 바꿔 탈 수 있으니 타고 싶은 차가 있으면 연락주세요. 그리고 이 카드 받으세요.”
10년간 리스 비용을 대주고 2년에 한 번 새 차라니, 이젠 더 놀랄 일도 없을 것 같다.
“이 카드는 뭡니까?”
“주유 카드예요. 회사에서 처리하기 위해선 꼭 이 카드로 주유를 하셔야 한다네요. 오토바이 역시 주유하셔도 되고요.”
“···그러죠.”
놀람도 계속되니 점점 담담해진다.
“이 차 타본 적 있으세요?”
“아뇨.”
“그럼 운전석에 앉아보세요. 간단히 조작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보조석에 앉은 그녀는 부담스러울 만큼 친절하게 차에 대해 설명했다.
이게 네 번째 선물인가 싶었다.
“시험 운행 해보세요. 미사리 쪽으로 가서 덮개를 열고 달리면 아주 좋아요. 제가 동행할게요.”
그녀가 가까이 기대어 왔지만 딱히 이렇다 할 감흥이 없었다.
비교할 이유는 없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옆집에 대자연의 풍경이 있는데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에 마음이 움직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일 타야 할 일이 있으니 그때 해볼게요.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그분께도 잘 받았다고 전해주세요.”
담담하게 내리자 그녀는 잠시 어이없어하더니 금세 원래의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 차를 타고 바람을 쐬면 어떨까 싶었는데 아쉽네요. 이상이나 의문이 생기면 언제든지 아까 드린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주세요.”
“그러죠. 수고하셨어요.”
휑하니 떠나는 그녀를 일별하고 하란의 집 쪽 CCTV를 향해 말했다.
“나 차 생겼는데 바람 쐬러 안 갈래? 간 김에 저녁 사줄게.”
······.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 어디 나갔거나 지금은 보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빤히 CCTV를 바라보는 꼴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기에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섰을 때였다.
CCTV에서 하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씻고 나갈게.
“그래, 천천히 나와도 돼.”
헬멧을 써서 눌린 머리를 손봐야 했기에 가방을 들고 얼른 2층 욕실로 뛰어갔다.
***
형편과 상황에 맞지 않는 차를 타는 걸 꺼려할 뿐 드라이빙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대학 입학과 함께 할아버지가 선물로 차를 사주셨고 대학 내내 타고 다녀 운전 역시 익숙했다.
부우우웅~
날씨가 추워 덮개를 열진 않았지만 좋은 차답게 시원하게 고속도로를 내달린다.
현재 부모님이 계신 곳은 전북 고창이다.
고향과도 동떨어진 곳에 계신 이유는 당신의 망한 모습을 고향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고, 아버지의 돈을 왕창 해먹은 이에게서 받은 땅이 고창에 있어서이기도 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인터체인지를 나와 달리길 30분.
복분자 농공단지에서 제법 벗어난 한적한 곳에 이르자 내비게이션이 도착을 알렸다.
“여긴가?”
풀이 자란 도로 한켠에 주차를 하고 내리자 띄엄띄엄 집들이 보였다.
그중 가장 오래되고 낡은 집이 눈앞에 있는 것이 부모님의 집인 모양이다.
콘크리트길에서 벗어나 흙길을 따라 조금 걷자 7, 80년대에나 있을 법한 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집 마당에서 들깨를 말리고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엄마!”
“···아들? 어머! 아들 맞구나! 아이고, 내 새끼!”
어머니는 얼른 다가와 껴안곤 연신 등을 토닥였다.
두삼 역시 반가워하면서도 기를 내부로 보내 어머니의 상태를 살폈다.
‘역시 할아버지가 길을 닦아놓으셨구나.’
두삼은 부모님이 잔병치레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혹시나 할아버지가 두 분의 건강을 챙긴 게 아닐까 추측했는데 예상이 맞았다.
연세가 연세인지라 세맥과 조금 약해진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십이경맥은 약간의 찌꺼기가 쌓여 있을 뿐 잘 뚫려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물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으세요?”
“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언제나 살펴주셔서 그런지 없다. 우리 아들은?”
“어느 때보다 튼튼해요.”
“그래 보인다. 더 젊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밥은 먹었니?”
“휴게소에서 간단히 먹었어요.”
“그걸로 되겠니. 잠깐만 기다려라 얼른 챙겨줄게.”
괜찮다는데도 굳이 밥상을 차려주셨다.
“니 아버지는 다른 집에 일 도와주러 가셨다.”
“···핑계 삼아 술 드시러 간 거겠죠.”
“술 많이 줄이셨단다. ···그리고 그때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던 건 너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셨어.”
“···글쎄요.”
아무리 기억이 주관적이라고 해도 미안함 때문에 돈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셨는데 그게 두삼 자신을 위해서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지난 과거에 연연할 마음은 없었다.
“이미 지난 얘기 그만해요. 근데 그동안 이 낡은 집에서 사셨던 거예요?”
마루가 악양 집처럼 나무로 되어 있고 벽은 황토벽인 듯 울퉁불퉁 고르지 못했다.
“여기가 어때서. 전에 집에선 네 아버지 술 먹고 오면 온 방이 술 냄새로 찌들었는데 이곳에선 아무 냄새도 안 나고 좋다.”
“부엌이 밖에 있는데요?”
“그건 조금 불편하지만 악양 별채 생각나서 괜찮아.”
긍정적이신 건지 아들 앞이라 괜찮은 척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엄마, 집 사드릴 테니 옮기세요.”
“됐어. 네가 준 돈으로 근처에 괜찮은 집 충분히 살 수 있는데 안 산 거야. 우리 걱정 말고 우리 아들이나 잘 살려무나.”
“···엄마 저 잘살고 있어요. 할아버지가 물려준 만큼은 아니더라도 집도 있고, 가게도 있고, 차도 있어요. 조만간 예전보다 더 부자가 될 거예요.”
“아이고~ 내 새끼, 잘살고 있다니 좋구나. 근데 사귀는 아가씨는 없니?”
“···엄만 집 얘기하다가 갑자기 여자 얘긴 왜 해요?”
“엄마, 아빤 잘 살고 있으니 너나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하라는 소리다.”
“······.”
맥락 없는 엄마의 ‘너나 잘 살아라’라는 공격을 어찌 당할까.
입씨름을 하느니 그냥 매달 용돈 보내 드리고 자주 찾아와서 뵙는 게 나을 것 같다.
“병원에 다닌다는 건 어떻게 됐니?”
“1월부터 정식으로 들어가서 3월부터 업무를 시작할 거예요.”
“내년 설에도 못 오겠구나?”
“시간되면 올게요.”
“애쓰지 마라. 시간되면 오고, 아니면 다음에 오면 돼지. 참! 그동안 복분자 많이 담갔는데 맛 좀 볼래?”
“네.”
복분자 한 접시를 마시고 나니 예전에 좋아했던 부추부침을 해주셨고 그마저도 다 먹자 이번엔 과일을 내오신다.
“좀 이따 저녁엔 네가 좋아하는 전어 구워줄게.”
“······.”
간만에 온 아들에게 좋은 걸 주려는 엄마의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위가 따라주지 않았다.
“엄마, 그만하고 여기 엎드려 보세요.”
“왜?”
“소화시킬 겸 안마해 드릴게요. 예전에 배울 때 한 번 해드리고 지금까지 못 해드렸네요.”
“그럼 오랜만에 우리 아들에게 안마를 받아볼까?”
엄마는 펼쳐둔 방석 위에 엎드렸고 두삼은 하얗게 빛나는 손으로 주물렀다.
쌓여 있는 찌꺼기들을 몽땅 없애 버릴 생각이다.
거의 끝냈을 때 밖이 시끄러워졌다.
“김 여사! 나왔소. 어느 놈이 집 근처에 좋은 외제차를 세워뒀기에 바퀴에다 오줌 싸놓고 오느라 좀 늦었소. 마누라! 임자!”
취기가 가득한 아버지의 목소리.
5년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취한 모습이었는데 오늘도 취한 모습이라니······.
드르륵!
“여보! 뭘 하기에···!”
문이 열리며 아버지가 들어왔다. 한데 두삼을 보곤 그대로 멈췄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험! 너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네. ···밥은?”
“엄마가 이것저것 챙겨줬습니다.”
“그거 가지고 되겠나? 여보, 저녁 준비 좀 하지!”
“그래요. 끙차! 아들 안마하느라 고생했어.”
어머니는 무거운 공기가 싫으셨는지 얼른 부엌으로 가버리셨다.
“크흠! ···재미있는 거 하나?”
남의 집에 온 사람마냥 어정쩡하게 들어온 아버지는 TV를 켰다.
‘후··· 5년이나 지났는데 말하기도 힘드네.’
각오를 하고 온 일이다. 한데 엄마와 달리 아버지에겐 평범한 얘기조차 꺼내기도 힘들었다.
TV를 켜준 것이 고마울 정도다.
어색함은 맛있는 전어구이를 앞에 두고도 계속됐다.
평소라면 보지도 않았을 TV에 시선을 둔 채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저녁을 모르게 먹었다.
“어쩜, 이런 건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은지······.”
엄마는 포기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설거지를 하러 가셨다.
그렇게 또 한참을 있다 보니 도무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틀 정도 머물다 갈 생각이었는데 다음에 다시 와야겠어. 나이를 헛먹었는지 도무지 말이 나오질 않네.’
언젠가 아버지를 이해할 날이 오지 않을까.
좀 더 빨리 왔으면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저······.”
일어나겠다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용세 아저씨! 용세 아저씨!”
드륵!
아버진 현관문을 열고 밖을 보더니 말했다.
“윗집 수한이 아니냐? 무슨 일이냐?”
“어머니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뭐? 얼른 가보자!”
아버지는 슬리퍼를 신고는 수한이라는 남자를 따라나섰고 두삼은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를 뒤따랐다.
‘어설프게 아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자식이 그 꼴을 당하는 걸 보고도 못 느끼시나?’
아버지의 병에 대한 지식은 사실 어설픈 한의사보다 낫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에게 배웠고 한의대 시험도 준비를 했었다.
다만 시험 운이 없어서인지, 재능이 없는 건지 번번이 미끄러졌고 결국 한의대에 입학을 하지 못했었다.
아버지가 평생 꿈이던 한의사의 꿈을 접고 사업에 몰두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결국 사업에도 재능이 없으셨지.’
차를 주차해 둔 도로로 나가 조금 올라가 옆길로 빠지니 바로 환자가 있다는 집이었다.
“아이고~ ···배야! 으으~”
끙끙 앓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아저씨, 이 방이에요!”
수한이 재촉을 하자 막 방으로 들어가려던 아버지가 두삼을 흘낏 보더니 멈췄다.
그리곤 등을 밀며 말했다.
“의사가 있는데 의사가 진맥을 봐야지. 수한아, 얘가 전에 얘기했던 내 아들놈이다.”
“아! 서울의 큰 병원에 다닌다던. 부탁합니다.”
“아, 예······.”
다닐 거라고 정확하게 고쳐주려 하다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안으로 들어갔다.
나이든 할머니가 배를 두 손으로 꼭 쥐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
“할머니 잠깐 진맥을 해볼게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안으로 들어간 기운은 금세 배가 아픈 원인을 찾았다.
급성 충수염, 맹장에 붙어 있는 충수라는 작은 기관에 염증이 생기는 질환이다.
“급성 충수염, 흔히 맹장염이라고 부르는 질환입니다. 얼른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합니다.”
“택시를 부르겠습니다!”
“아뇨. 제 차가 있으니 타고 가시죠. 할머니 아프지 않게 해드릴 테니 조금만 참으세요.”
얼른 충수에 있는 신경들을 막았다. 아픔이 가셨을 텐데 고통스러웠던 기억 때문인지 할머니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얼른 안아서 차가 있는 곳으로 뛰었다.
“차 키는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있어요.”
“···네 차였냐?”
아버지는 실례를 한 차바퀴를 보며 물었다.
“네. 세차하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진즉에 말하지 그랬냐.”
아버진 이상한 논리로 말을 하곤 문을 열었다.
할머니와 수한은 뒷좌석에, 아버지는 보조석에 태우고 차를 출발시켰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가고 있는데 문득 아버지가 차창을 본 채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말투가 차에 실례를 한 것에 대한 사과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물었다.
“···뭐가요?”
“이것저것. 모두 다.”
이것은 과거의 일이고 저것은 오늘 일인가?
“···괜찮아요.”
“···뭐가?”
“이것저것. 모두 다요.”
짧은 대화를 끝으로 다시 아까 전처럼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좀 전의 분위기완 달랐다.
어색함이 아닌 쑥스러움에 의한 침묵이랄까.
“······.”
“······.”
어머니 말씀처럼 부자(父子)는 쓸데없는 걸 참 많이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