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70화 (69/122)

# 70

21. 휴식(1)

선선해서 좋았던 날씨는 이제 발코니에 오래 앉아 있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추워졌다.

“그동안 바빠서 날짜 가는 줄도 몰랐네. 아~ 간만에 여유롭다.”

가장 바빴던 뇌전증 환자 치료는 일단락됐다.

입원 환자들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해본 결과 확실하게 치료 효과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후 김영태 교수의 말처럼 뇌전증 치료를 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환자들이 밀려드는 통에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 치료와 환자 유입을 조절하면서 지금은 여유를 찾은 상태다.

물론 곧 치료제 개발을 도와야 하니 이 여유가 계속될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노력한 덕분에 추석 때 못 쉰 거 쉬라고 한 주 동안 휴가를 얻었다.

가끔 농담처럼 민규식에서 등을 떠밀려 일을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은 이미 병원의 소속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저 개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가게와 신혜경과 한미령에게 미안해서 아닌 척 하는 것뿐이었다.

이효원의 경우는 근육, 혈관, 신경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이제 다음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과연 생각대로 될지, 나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형! 형! 엉덩이에 완전히 힘이 들어가요! 방금 끊기까지 했어요.”

“···천천히 말해라. 옆집에도 들리겠다.”

“까짓 거 들으라고 해요. 이제 형이 안 막아줘도 되는 거죠? 다 나은 거죠?”

나연섭의 항문조임근 신경이 연결 직전이었다. 그래서 일주일 전에 신경을 전기적 신호를 이용해 연결시켜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치유할 수 있으면 그 편이 낫다는 생각에 내버려 두었다.

“앉아봐. 다 연결됐나 보게.”

손을 잡고 조임근을 살펴봤다. 세 개의 조임근이 70퍼센트 이상씩 연결됐다.

‘허어~ 어젠 고작 10퍼센트였는데. 낫기 시작하니 순식간이구나.’

살펴보고 있는 중간에도 연결되고 있었는데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힘이 느껴진다.

“어때요? 나았어요?”

나연섭은 잔뜩 기대한 얼굴로 물어봤다.

그 모습에 장난을 칠까 하다가 포기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한 애한테 할 짓은 아니었다.

“축하한다. 이제 집으로 가도 되겠다.”

“진짜죠? 거짓말 아니죠? ···와아! 정말 기쁜데 쪽팔리게 왜 눈물이 나는 걸까요? 하하하! 그래도 기분은 정말 좋네요. 하하하하! 우아아아~ 나았다!”

울다가 웃다가,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고, 나연섭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이해가 됐기에 그냥 내버려 뒀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됐을 때 물었다.

“다 했냐?”

“아뇨. 오늘은 하루 종일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아침 먹고 해라.”

“지금 밥이 문제예요? 형은 안 기뻐요?”

“기뻐. 드디어 군식구 없이 조용히 지낼 수 있잖아?”

“대박··· 그게 기쁜 거예요?”

“너는 집에 가는 거 싫냐?”

“그건 아닌데. 형이랑 헤어진다니··· 왠지 슬프네요.”

“요즘은 아침, 밤으로 잠깐 보잖아. 정 슬프면 가끔 놀러 와라.”

새벽같이 일어나 치료 겸 운동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소속사 연습실에 다녀오면 늦은 밤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잠깐 얘기하는 게 다였다.

“자주 올게요.”

“곧 데뷔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잘도 그렇게 되겠다. 괜히 사람 기다리게 하지 말고 올 때 전화하고 그냥 와. 형이 맛있는 거 사줄게.”

“···진짜로 자주 올 건데.”

덩치는 어른이지만 아직 미성년자이긴 한가 보다.

그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모습에 코끝이 살짝 찡해져서 얼른 부엌으로 가며 중얼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기세는 다 어디로 가고, 사내놈이 울긴······.”

“안 울었거든요!”

굳이 있어보이게 회자정리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헤어질 때가 있는 법이었다.

***

“이제 샴페인을 터뜨려도 되는 거야?”

아침을 먹고 나연섭이 학교를 갈 준비를 할 때 오향희가 다가와 말했다.

전에 요도조임근을 고쳤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네. 마음껏 터뜨려도 돼요.”

“고생했어··· 정말.”

“누님도요. 이제 집으로 가면 진짜 연섭이의 엄마가 되는 거예요?”

한집에 살다 보니 오향희와 가끔 맥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원래 나연섭이 데뷔를 하고 나면 그때 나경록과 결혼을 할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연섭의 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밀려 버린 것이다.

“그야 할 때까진 모르는 일이니까. 짐은 내일 빼야 할 것 같은데 괜찮지?”

“내일 부모님 댁에 이삼 일 정도 다녀올 것 같으니 천천히 빼도 돼요.”

“아! 추석 때 연섭이 때문에 못 갔지?”

“꼭 그때문은 아니고요. 이번에 안 다녀오면 또 언제 갈 수 있을지 몰라서요.”

“그럼 경록 씨에게 연락해 오늘 만나라고 해야겠다. 샴페인 값은 지불해야지.”

“이미 충분히 주셨어요.”

“그래선 안 돼. 오늘 병원에 안 가지?”

“휴가예요.”

“그럼 점심 같이 먹는 걸로 잡아볼게.”

“그래요, 그럼.”

받든 안 받든 어차피 한 번은 봐야 했다.

작별 인사를 할 때 다시 한번 자주 오겠다는 걸 강조하고 나연섭은 떠났다.

‘이래서 같은 집에서 살기 싫었던 건데··· 대우 형이 왜 사람들이 떠날 때 고시원 옥상에서 바라봤는지 알 것 같네.’

대문 앞에서 차가 완전히 사라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두삼은 착잡한 표정을 지우고 하란의 집으로 갔다.

-오늘 표정이 안 좋네요?

가장 먼저 루시가 반겨줬다.

“그런가?”

-네. 평소에 비해 눈이 살짝 더 닫혔고 입꼬리 역시 내려간 상태예요. 보통 슬픈 일이나 안 좋은 일이 있는데 애써 담담한 척하기 위해 짓는 표정이랄까요.

“···의학 서적이라도 읽었어?”

-아뇨. 평소 하란 님이 두삼 님이 돌아갈······.

“뮤트! ···프로그램 오류가 난 건지 쓸데없는 소리를 다 하네. 오빠, 어서와.”

갑작스럽게 나타난 하란이 당황한 표정으로 루시를 조용하게 만들고 인사를 했다.

“···으응.”

“조금 전에 연섭이의 비명에 가까운 함성이 들리던데 다 나은 거야?”

“응. 여기까지 들렸어?”

“벽에 CCTV가 있잖아.”

하란의 CCTV는 소리까지 듣는 모양이다. A.I형 말하는 프로그램도 있는데 특별할 것도 없다.

“다 나았어.”

“역시 오빠야. 오늘은 나부터?”

“아니. 이제 넌 지켜봐야 해. 3분의 2쯤 열었는데 더 이상은 안 열리더라. 강하게 밀어붙이면 가능할 것 같긴 한데 너무 위험해.”

“그럼 어떻게 해?”

“네가 하는 요가를 계속해 봐. 어쩌면 자동으로 열릴지도 몰라.”

“위험하다는데 어쩔 수 없지. 대신 자주 살펴봐 줘.”

“그야 물론이지. 효원인?”

“위층 피트니스 룸에.”

올라가자 이효원은 러닝을 하고 있었다. 한데 그 모습이 왠지 불만에 차 보인다.

아이스링크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올라서지도 못하게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효원아, 그만 뛰고 이쪽으로 와서 앉아봐.”

“···또 근골 만지려고요?”

그녀는 앉으라는 말에 흠칫 놀랐다.

“아냐. 거의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어.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고 이제 2단계로 넘어갈 거야.”

“그래요! 2단계는 뭔데요?”

근골을 만지지 않는다니 쪼르르 달려와 앉았다.

“왼발의 맥과 오른발의 맥을 똑같이 만들 생각이야.”

“어떻게요?”

“글쎄다.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지.”

양손으로 각 발목을 잡고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살펴봤다.

‘일단 보이는 건 완벽해.’

더 세밀하게 들어가 혈과 맥, 근육과 근육 사이, 혈관 하나하나를 비교하면 당연히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완벽하게 똑같이 한다는 건 요원한 일이다.

사실 그 정도면 다 나았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어때요? 2단계로 들어가도 돼요?”

“응. 나흘 뒤부터.”

“시작하려면 바로 시작하지 왜 나흘 후부터예요?”

“수영장 얼려야지. 그동안 부모님께 다녀오려고. 무리하진 마. 괜히 무리했다간 다시 1단계부터 해야 될지도 몰라.”

“···가장 무서운 협박이네요.”

이효원을 아니까 하는 협박이다. 괜히 무리하는 것보다 차라리 쉬는 게 나았다.

이효원까지 끝마치고 나자 할 일이 없었다.

점심 12시에 집 근처에서 만나자는 메시지가 와서 어디론가 가기도 어정쩡했다.

그냥 집에서 TV를 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미령이 2층으로 올라왔다.

“오빠, 점심 어떻게 할 거예요? 제가 국수 좀 할까 하는데 같이 먹을래요?”

2층에서 옥상으로 가는 문을 막아뒀기에 옥탑으로 오가려면 비상계단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한 달 전에 이사를 왔는데 가끔 점심을 같이 먹었다.

“오늘 연섭이 아버지와 약속이 있어. 혼자 먹기 그러면 좀 이따 형이랑 누나 오면 같이 먹어.”

“···알았어요.”

미령이 다시 내려간 후 시간을 보니 슬슬 출발할 때가 됐다.

오토바이를 타고 보내준 주소로 가니 조용한 일식집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기모노 차림의 직원이 물었다.

“예약하셨습니까?”

“나경록 사장님과 약속이 있어왔습니다.”

“안내해 드릴게요. 이쪽으로.”

안내한 방 앞으로 가자 신발이 놓여 있는 것이 이미 와 있는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나경록은 평소 무뚝뚝한 표정이 아니라 밝은 표정으로 두삼을 맞이했다.

“어서 오게, 한 선생.”

“잘 지내셨습니까?”

“하하! 한 선생 덕분에 오늘부터 잘 지내게 될 것 같네. 고맙네. 그저 연섭이가 살아갈 희망만 줘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완치라니! 하하핫!”

나경록이 이처럼 감정을 내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자리에 앉자 1인용 불판이 두 개 들어왔고 고기 역시 각각의 접시에 담겨서 왔다.

“고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 이곳으로 잡았네. 오늘 이 집의 고기를 다 먹어도 좋으니 마음껏 먹게.”

“최선을 다해 먹어보겠습니다.”

“하하! 그러게.”

몇 점의 고기를 올리고 익은 후 먹는 것이 답답하긴 했지만 무슨 고기인지 맛이 기가 막혔다.

게다가 얘기하면서 먹기엔 제격이었다.

“혹시 앞으로 그런 일이 발생할 일은 없겠나?”

“음··· 저나 나 사장님이 그런 일을 당할 확률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다시 발생한다고 해도 어떻게 고쳤는지 연섭이가 아니 희망을 잃을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든든하군. 혹시 원하는 바가 있으면 말해주게.”

“한 것에 비해 이미 과분하게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매달 받은 돈만 해도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하하! 한 선생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래서 고마움의 크기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세 가지를 준비했네. 첫 번째는 이거네.”

그는 뒤쪽에 놔뒀던 백팩을 건넸다. 묵직한 것이 아무래도 돈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안을 열어보니 돈이 백팩 가득이다.

“많다는 소리는 말게. 그저 들고 가기 힘들 것 같아 그 정도만 준 거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네 핸드폰 좀 줘보겠나?”

그는 핸드폰에 어플을 깔곤 주민번호를 묻거나 아이디, 비밀번호를 만들어서 불러달라고 했다.

고기를 거의 다 구워먹었을 때 그가 스마트폰을 돌려줬다.

“비상장주식 일부를 자네 이름으로 샀네. 가방 앞에 보면 통장과 도장이 있는데 그 계좌와 연동시켜 놨으니까 2년간 손대지 말고 놔둬. 그럼 돈이 제법 될 거야.”

“···상장이 될 주식이란 말입니까?”

“그렇다네.”

“제가 소문을 내면 어쩌려고······?”

“어차피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주식이네. 그렇다고 소문은 내지 말고.”

도대체 얼마를 챙겨주려고 이러는 건지 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실제로 가방 안에 있는 돈만 해도 상당하다.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못 받겠다고 박차고 나가지 않는 이상 어차피 받게 될 것 기분 좋게 받기로 했다.

“기분 좋게 받으니 내 기분도 좋군. 세 번째는··· 집에 가서 확인해 보게. 내일 부모님께 간다면서? 급하게 준비해서 마음에 들지 모르겠군.”

세 번째 선물이 뭔지 대충 감이 왔다. 하지만 집에 가서 보기 전까진 확신할 수 없었다.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하게 느껴지는군. 고맙네. 혹시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부담 갖지 말고 찾아오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돕지.”

“왠지 든든해지는군요. 감사히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저도 사장님처럼 말하고 싶은데 직업이 직업인지라··· 찾아올 일이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이 사람, 본인이 의사임과 동시에 마사지사임을 잊은 모양이군. 가끔 식구끼리 마사지 받으러 가겠네.”

“아! 그렇군요. 언제든 환영입니다.”

나경록은 입에 밴 듯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떠났고, 두삼은 돈 가방을 아기처럼 앞으로 안고 사고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당 한쪽에 서 있는 세 번째 선물.

“···대박!”

잘 빠진 오픈카와 그 오픈카 옆에 더 잘 빠진 짧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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