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19. 진정한 의사(5)
김영태는 환갑 전후의 나이에 덩치는 젊은 자신보다 더 커서 일견 험악하게 보였다. 하지만 마흔이 넘으면 살아온 삶이 얼굴에 나타난다고 환자를 보는 그의 얼굴은 인자함으로 가득했다.
“···어제는 몇 번이나 발작이 일어났지?”
“세 번입니다, 선생님.”
“음······.”
뇌파 측정기와 신체 측정기를 부착한 작은 아이의 차트와 기기가 알려주는 정보를 번갈아가며 살피는 김영태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선생님, 우리 애 상황이 많이 안 좋은가요?”
“···그렇습니다. 이대로 계속되면 뇌의 다른 부위마저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만간 뇌 절제 수술을 생각하는 것이······.”
“흑! ···절제를 한다는 건 뇌의 일부를 떼어낸다는 거잖아요.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요?”
“병변 부위가 어느 정도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생각보다 커지면······.”
말을 아꼈지만 병실 내에서 알아듣지 못할 사람은 자고 있는 아이뿐이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병변 부위가 더욱 커질 겁니다.”
울고 있는 엄마에게 위로를 건넸지만 소용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김영태는 그녀를 놔두고 돌아서 병실을 나오다 민규식과 두삼을 보고 다가갔다.
“민 원장이 여긴 무슨 일입니까?”
“선생님이 회진하는 모습을 간만에 보고 싶어서요.”
“볼 게 무에 있다고··· 이 마스크 쓴 청년은 누굽니까? 혹시! 벌써 찾은 겁니까?”
김영태는 빙긋이 미소 짓는 민규식을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생님.”
“반가워요. 한데 이름이?”
“···여기서 말씀드리기가······.”
그의 주변에 서 있는 수련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 마스크를 쓴 이유가··· 무슨 얘긴지 알겠어요. 회진이 곧 끝나니 그때 조용하게 내 방에서 얘기하죠.”
“알겠습니다.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그러겠네. 민 원장 좀 이따 봅시다.”
막 그가 떠나려 할 때였다. 방금 전 병실의 환자 엄마가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선생님, 민호가 다시 경련을······!”
김영태는 서둘러 병실로 들어가며 속삭였다.
“아이들을 물릴 테니 들어와 주게. 너희들은 밖에서 대기하도록. 민 원장 들어갑시다.”
이렇게 빨리 치료할 기회가 올 줄이야.
민규식이 들어가자는 듯 눈을 마주쳐 왔다. 그에 안으로 들어가는데 신경과 수련의들이 묘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이미 혈관외과와 소아과에서 많이 겪은 익숙한 눈빛이었다.
자고 있던 아이는 손을 앞으로 뻗은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뇌파 측정기 모니터엔 의미를 알 수 없는 전파가 출렁이고 있었다.
“제가 잠시 보겠습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아이 엄마를 지나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곧장 목에 손을 댔다.
‘조금만 참으렴.’
권진영보다 훨씬 심하게 떨었기에 마취가 쉽지 않았다. 내부로 기를 보내 막고 밖으로는 그냥 누르는 척을 하며 마취를 시켰다.
“머, 멈췄어요! 무슨 일이죠? 한번 시작하면 20분 정도는 지속됐는데, 혹시······.”
아이의 엄마는 김영태를 보며 물었다.
김영태는 두삼의 실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곤 내심 아이 엄마 못지않게 놀랐지만 태연하게 말했다.
“···민 원장이 데려온 선생입니다. 뇌전증 치료에 새로운 치료 방법을 가지고 있다 하니 잠깐 지켜보시죠.”
“그, 그래요?”
기대 어린 시선이 등에서 느껴진다.
‘우연이면 큰일 나겠는데.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니 일단 지난번에 한 것처럼 일부만 제거하자.’
아이 뇌의 전기적 신호에만 집중을 하자 기대 어린 시선도, 또 약하게 울리고 있는 측정기의 비프음도 점점 멀어진다.
오직 사람만 생각하자. 그렇게 집중했다.
신호를 따라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상 전류로 번쩍이는 공간에 도착했다.
‘권진영보다 범위가 훨씬 넓군. 아직 어린 아이이니 신경세포가 살아나겠지.’
한 번 시도를 해서 좋은 결과가 나와서인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강하게 번쩍이는 신경세포에 죽이고자 생각했다.
아이에게 대고 있던 손에서 파란빛이 빛나며 몸으로 스며들었고 눈 깜빡할 사이에 와서 이상이 있는 신경세포들을 죽여 나갔다.
어느 정도 죽이자 진한 파란색을 뿜던 신경세포들이 점점 옅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이상이 있는 신경세포를 다 죽여도 된다고 해도 단숨에 낫게 하는 건 지양해야 할 일이었다.
끝내자고 생각한 순간 신경세포들은 사라지고 편안해진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때 김영태가 바싹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
“측정기가 안정화됐네. ···다 된 건가?”
“일단은요.”
“생각보다 빠르군.”
“빠른 만큼 에너지 소비가 많습니다.”
에너지 소모가 많다는 건 사실이었다.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전기적 신호가 에너지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를 소모했을 때와 비슷하게 치료를 하고 나면 약간의 허탈감이 들었다.
“고생했네. 조금만 기다려 주게. 여기서 깊은 얘기를 하긴 힘드니 자리를 옮기지.”
“환자 보호자에게 설명을 하고 회진을 마저 하셔야 할 테니 저와 한 선생은 선생님 방에 가 있겠습니다.”
“아! 회진. 그게 낫겠구려.”
병실에서 나와 김영태의 방으로 갔다.
“···헌책방 느낌이네요.”
삼면이 책장인데 그곳을 가득 채우고도 자리가 부족한지 책이 여기저기에 잔뜩 쌓여 있었다. 다행인 건 퀴퀴한 책 냄새 대신에 향긋한 커피 냄새가 난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끊임없이 공부를 하시지. ···소파를 치우고 앉으세. 좀 더 큰방으로 옮겨 드려야겠군.”
소파에 있는 책을 치우고 어색하게 앉아 기다리길 30분.
김영태 선생이 들어왔다.
“이런 손님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 커피 마시겠나? 지금쯤 맛있게 내려졌을 걸세.”
그는 머그잔에 세 잔의 커피를 따라 왔다.
두삼은 큰 기대 없이 커피를 마셨다. 일반 커피숍에서 파는 커피와 달리 연했는데 향과 맛은 훨씬 좋았다.
“···정말, 맛있군요.”
“많이 마시게. 연해서 많이 마셔도 부담이 없다네.”
김영태는 오로지 커피에 집중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모금까지 마신 후에 입을 열었다.
“한의사라고 들었네. 마취를 시키는 게 놀랍더군.”
“감사합니다.”
“사실 병원에서 돌고 있는 마스크 맨에 대해 소문을 듣고 한쪽 귀로 흘렸는데 그 소문의 주인공이 내가 찾는 사람일 줄이야··· 몰랐군.”
엥? 웬 소문? 게다가 촌스럽게 마스크 맨이라니.
누가 소문을 냈는지 모르지만 당장 달려가 멱살이라도 잡고 다른 별명으로 만들어달라고 하고 싶다.
“···소문요?”
“몰랐나? 간호사들 사이에선 꽤 유명하다네. 민 원장의 숨겨둔 아들이라는 얘기도 있고, 유명한 집안 아들이라는 얘기도 있다네.”
“···원장님도 아셨습니까?”
“모를 리가 없지.”
“근데 가만히 놔두셨습니까?”
“소문은 막아봐야 더 커질 뿐이야. 이럴 때 그냥 못 들은 척하는 게 자네 정체를 숨기기에도 훨씬 나아.”
맞는 말이다. 공연히 해명을 해봤자 설명해야 될 일만 늘어날 뿐이다.
‘그래도 마스크 맨은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불만을 뒤로하고 다시 김영태의 말에 집중했다.
“소문이 안 나는 게 이상한 일이지. 사실 오늘 일을 수련의들이 봤다면 귀신이라는 소문이 났을 걸세. 근데 마취 때도 놀랐지만 이상 뇌파를 잡는 그 순간은 기절할 만큼 놀랐네. 어떻게 했는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말씀드리는 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예상하고 있었기에 이미 머릿속으로 정리를 해뒀다.
“아까 그 아이, 민호라고 했나요? 민호의 전신을 마취시킬 수 있었던 건 제가 기를 잘 느끼고 기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극장에서 권진영 씨를 살펴볼 때 기를 이용해 이상 뇌파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음을 알게 된 거고요.”
“치료, 아니, 아직까지 대상자가 적으니 진정시켰다고 해야겠군. 진정을 시킨 것도 기를 이용해서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가진 기운을 넣은 겁니다.”
“기가 무한한 건 아닐 터. 민호와 같은 환자를 본다면 몇 명이나 볼 수 있겠나?”
“···글쎄요, 해보진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5명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나연섭과 이효원, 그리고 소아과와 혈관외과의 급작스러운 일까지 고려해서 한 말이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수로군. 음······.”
숫자를 너무 적게 불렀나? 생각에 잠긴 김영태의 표정이 좋지 않다. 그래서 조심히 물었다.
“···너무 적습니까?”
“아! 오해했군. 자네의 행위가 치료에 도움이 된다면 하루에 치료할 수 있는 숫자가 1명이라고 해도 환자와 보호자에겐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 될 걸세.”
“그러시군요. 갑자기 인상을 쓰셔서······.”
“허허허! 그건 생각할 때 타고난 인상이 드러나서 그렇다네. 종종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지.”
“그런 줄도 모르고 생각을 방해했군요. 죄송합니다.”
“허허! 아닐세. 그런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나?”
궁금하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그는 말을 이었다.
“나름 자네의 능력의 한계가 과연 어디까지일지 고민해 봤다네.”
왜 그게 궁금하지?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고치라고 하면 되지 않나?
자신의 생각이라도 읽었을까 그는 피식 웃었다.
“훗! 그냥 환자를 낫게 하면 되지 않느냐는 표정이군. 우리 병원만 생각하면 그것도 나쁘지 않네.”
이어지는 말에서 그릇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현재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는 뇌전증 중증 환자는 50명이 넘네. 정기적으로 내원하는 환자까지 치면 수천 명은 될 거야. 만일 자네의 기운으로 치료를 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하루 5명씩 진료를 하면 몇 년 정도면 모두 치료가 가능하겠지?”
“그렇겠죠.”
“그럼 어떻게 될까? 자네나 내게 여유가 생길까? 아니네. 우리나라에만 10만 명이 넘는 뇌전증 환자들이 있다네. 만일 치료가 가능하다는 소문이 퍼지면 우리 병원으로 죄다 몰려들 터. 그럼 자네가 죽을 때까지 뇌전증 환자들만 봐도 다 못 고치네.”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는데 듣고 보니 문득 소름이 돋았다.
그저 눈앞의 환자에게만 집중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과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다.
“요즘은 해외 원정 진료와 치료도 일반화됐으니 세계의 뇌전증 환자들이 몰려들면?”
“······.”
“사실 자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될지 생각해 보면 한평생 그렇게 사는 것도 좋다고 보네. 하지만 만일 뇌전증이란 병을 없앨 수 있다면 어떨 것 같나?”
“···치료제를 만들 생각이십니까?”
“마음이야··· 그러고 싶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불가능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노력해 볼 만하지 않겠나. 내가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일단 치료가 가능하다는 게 밝혀지고 나면 그땐 치료와 함께 내 연구를 도와줬으면 좋겠네.”
“치료가 된다는 걸 확인하면 그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잘 부탁하네.”
김영태는 치료가 된다고 어느 정도 단정 짓고 있는 모양이었다.
방에서 나와 원장실로 향하는데 민규식이 물었다.
“어째 고민이 있는 듯한 표정이군.”
“솔직히 김 선생님을 뵙고 나니 제가 현재 하고 있는 행동이 속물처럼 느껴집니다.”
“허허! 그런가?”
진지하게 말하는데 민규식은 의외로 담담했다.
“선생님께서 보기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김 선생님의 환자와 병에 대한 생각에 많이 놀랐습니다.”
“자네 말처럼 큰 목표를 두고 끝까지 매진하는 대단한 분인 건 확실하지. 근데 당장 그분처럼 살라고 한다면 말리고 싶네.”
“왜요? 진정한 의사 아니십니까?”
“여러 사람이 많은 걸 희생해야 하는 힘든 길이거든. 먼저 스스로 됐다 싶을 만큼 행복해지게. 그 다음 환자와 치료를 위해 노력한다면 그땐 말리지 않겠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사는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의사라고 생각하네. 김 선생님은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지.”
“···그렇습니까?”
존경받는 의사가 진정한 의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건 아닐 터, 그렇다면 굳이 존경받지 않아도 진정한 의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민규식이 뭘 말하려고 하는 건지 솔직히 모르겠다. 다만 김영태를 보고 이것저것 따지는 스스로가 속물처럼 느껴졌던 마음이 조금은 치유가 되는 것 같다.
‘민 원장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셨나?’
흘낏 그를 보니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만 빙긋이 짓고 있다.
어쩌면 그도 한때 자신과 같은 고민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자신이 왜 의사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봤다.
처음엔 할아버지가 의술을 펼치는 모습이 멋있어서 닮고자, 한없이 사랑해 주는 당신의 기대감에 부응하고자 하는 마음에 한의사가 되고 싶어 했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러한 생각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환자에 대한 사랑, 병을 정복하고 싶은 욕구. 이런 것보다 ‘할아버지가 좋아하실 거야’, ‘내가 누군가를 낫게 할 수 있어!’, ‘의술을 통해 많은 돈을 벌겠어!’ 라는 허세와 욕망이 대부분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섬의 보건지소에서 환자들을 직접 상대하면서 조금씩 바뀌었다.
그리고 죽음을 보고 나서야 처음으로 의사라는 직업이 가진 무게감을 알게 되었고 침을 놓고 나서야 할아버지의 기대감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도 의사이길 바랐다는 걸 깨달았다.
목표를 바꿔 마사지사로, 물리치료사로 전전한 것도 침이 아닌 방법으로도 누군가를 고칠 수 있길 바라서였는지도 모른다.
현재 그토록 바라던 일을 지금 하고 있다. 한데 뭔가에 떠밀리듯이 일을 하고 있다.
아마 자신의 실력이 장갑의 힘이라는 것과 장갑의 힘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그 역시 극복해야 할 시점에 온 듯하다.
어떻게 힘을 얻고 언제 사라질지 모르지만 사라지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예전처럼 후회하지 않는 길이 아닐까.
‘진정한 의사라······.’
평생을 두고 고민해야 할 문제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