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63화 (62/122)

# 63

19. 진정한 의사(1)

병원에 갔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한미령이 부동산을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응? 미령이잖아. 미······.”

이름을 부르려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수그리는 모습에 멈춰야 했다. 축 처진 어깨가 ‘말 걸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대신 방금 나온 부동산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사장님. 방금 나간 아가씨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뭐 때문에 그런데요?”

“우리 가게 직원이거든요. 기운이 많이 없어 보여서 무슨 일인가 해서요.”

“그래요? 다른 건 아니고 방을 구한다고 왔어요.”

“방이 없었나 봐요?”

“방이 없긴 왜 없어요. 가격에 맞는 방이 없는 거죠. 아가씨가 500만 원에 월세 20만 원 하는 방을 찾는데 요즘 그런 방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자신에게 집이 생기고 난 후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다. 그러나 최근 월세가 고공 행진 중이라는 기사는 제법 봤다.

‘너무 무심했나?’

신혜경과 같은 보육원 출신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름 돈도 챙겨주고 빠르게 피부마사지를 유료화시킨 것이다.

물론 보육원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그런 건 아니다. 애가 참 바르고 착했다. 만일 자신이 처한 현실도 모르고 허튼 곳에 돈을 썼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몰랐다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알고 나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오빠, 다녀왔어요? 오늘은 일찍 왔네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밝게 맞이하는 그녀다.

“···어어.”

“무슨 일 있어요? 얼굴에 근심이 있는 거 같아요.”

“사상 체질에 대해 공부하더니 곧 점까지 보겠는걸?”

“선생님이 훌륭하잖아요. 호호.”

“별거······.”

별거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옥탑방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방 한 칸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다. 그리고 비상계단을 이용하면 2층을 거치지 않고 오갈 수 있었다.

약재 말릴 공간과 휴식 공간이 사라지지만 누군가에겐 살 공간이 될 수 있다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별거 아니고 갑자기 오백 정도가 필요해서.”

“오백만 원? 그 정도면 빌려줄 수 있어.”

신혜경이 대뜸 빌려주겠단다.

‘누님! 돈은 저도 있거든요!’

“네? 아, 근데 제가 남한테 돈 빌리는 걸 싫어해서요.”

“와아~ 이거 서운하네. 방금 남이라고 했어?”

청소나 하세요! 누님!

“그, 그게 아니라··· 옥탑방 세주면 되는 걸 굳이 빌릴 필요가 없다는 거죠.”

“모르는 사람한테 세주면 그게 더 불편하지 않나? 늦게까지 가게 영업도 하잖아.”

“미리 말해주면 되겠죠. 부동산에 다녀와야 하는데 점심 먹고 다녀올까.”

일부러 한미령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허접한 연기지만 통했을까, 한미령이 다가와 물었다.

“···오빠, 옥탑 세주게요?”

“그럴까 생각 중이야.”

“얼마에 내놓을 건데요?”

“글쎄다. 그런 쪽으로 잘 몰라서. 일단 급한 돈이 오백 정도니 보증금 오백에 ···십만 원 정도면 되지 않을까? 작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하니까.”

“헐~ 얘가 요즘 시세도 모르네. 옥탑치곤 작지도 않고, 마당도 있고, 거기에 완전 새 건물이잖아. 1,000에 30만 원이라도 들어온다는 사람 많을걸.”

이 사람이 진짜. 확! 말을 못하게 혈을 막아버릴까 보다.

“아뇨? 옥탑에 올 정도면 사는 게 빤하잖아요. 저도 삼 년간 고시원에서 지내서 집 없는 설움 잘 아는데 그럴 수가 있나요?!”

저리 가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꾹 참으며 한미령을 보고 말했다.

“왜? 혹시 관심 있어?”

“···네? 아, 네. 지금 살고 있는 데가 재개발이 되면서 집을 옮겨야 하거든요. 제가 500에 20, 아니 25만 원 드릴 테니 제가 써도 될까요?”

드디어 말이 떨어졌다. 잘됐다 싶어 대답하려는데 신혜경이 다시 나섰다.

“어머! 미령이 너 이사해야 해?”

“네, 언니.”

“재개발할 때 이주비 나오지 않아?”

“···오백이 이주비예요. 사실 주인아주머니가 저희 보육원 자원봉사자셨거든요. 그래서 공짜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셨어요.”

“···그랬구나.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좋은 분 만났네. 아직 살 만한 세상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마지막 말은 두삼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대답했다.

“그, 그렇죠.”

“너도 집 없는 설움 잘 알고 있다며?”

“···잘 알죠.”

“근데 작고 시끄러운 방을 25만 원이나 받아야겠어?”

어라? 방금 1,000에 30이라고 했던 사람이 태세 전환이 이렇게 빨라도 되나?

“그건 누나가······.”

“그러지 말고 내가 미령이한테 오백 빌려줄 테니까. 1,000에 10만으로 하자.”

뭔가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됐지만 모양새는 차라리 이게 나을 것 같았다.

“오백만 원만 있어도 되니까 500에 10으로 해요. 방은 오늘 치워둘 테니까. 네가 편할 때 들어와. 참! 이삿짐은 많아?”

“옷가지밖에 없어요. 가방 두 개면 충분해요.”

“알았다. 내가 이사 선물로 냉장고랑 TV는 적당한 크기로 구해줄게.”

“아, 아니에요! 싸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더 받을 수 없어요, 정말!”

“옥탑에 들어갈 정도면 좋은 것도 아냐. 그리고 이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하고 받는 거야. 우리 사이에 이 정도도 못 해주는 거냐?”

“···고마워요, 오빠.”

“밥은 내가 준비할 테니 가게 청소 좀 해라.”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안 하던 짓을 하려니까 참 쑥스럽다.

연어가 있어 연어 스테이크를 하고 있는데 신혜경이 올라왔다. 그리고 숟가락을 식탁에 놓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

“우연히 부동산에서 나오는 걸 봤어요.”

“그럼 눈치라도 주지 그랬어. 갑자기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잖아?”

“갑자기 옥탑이 생각났어요.”

“마지막에 내가 나서서 기분 안 나빴어?”

“전혀요. 오히려 누나가 나서줘서 더 자연스러웠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뭐가?”

“돈 빌려준다는 말요.”

공중보건의에서 소집 해제 했을 때 수중에 있는 돈이라곤 마지막으로 받은 월급 이백이 다였다.

아버지가 사업을 한다며 말아먹고, 그나마 조금 남아 있는 걸 보상금으로 탈탈 털어주고 나니 할아버지의 유산도 남은 게 없었다.

이백이면 혼자서 생활하기엔 문제가 없었다. 고시원 생활을 하며 일을 하면 충분했다.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돈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쪽팔림을 무릅쓰고 몇몇 돈 있는 이들에게 연락을 했었다.

돈 오백을 빌리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좋은 시절 같이 웃고 즐겼다고 모두가 친구가 아님을 그때 알았다.

물론 그때완 사정이 다르다. 그럼에도 망설임 없이 빌려준다는 말은··· 참 따뜻했다.

“난 네 마음이 더 고마워. 미령이 챙겨줘서 고마워.”

“오빠로서 당연한 일이었어요.”

“훗! 나도 누나로서 당연한 일이었어.”

두삼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밥 다됐으니 미령이 불러요.”

밥을 같이 먹어서일까 점점 식구가 되어간다.

***

한강대학병원 한방의학센터 직원 모집은 4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1단계, 서류 전형.

인사과에서 너무하다 싶은 서류를 거른다.

2단계, 2차 서류 전형.

병원장과 이사진이 지원자를 50%로 줄인다.

3단계, 실습.

지원자들의 실력을 본 후 그들의 실력을 평가.

4단계, 한방의학센터 각과 과장의 최종 면접.

두삼이 맡은 건 3단계였다. 물론 물리치료사와 과장 아래 한의사들에 한해서다.

“너무 많은데요? 이 정도면 아무리 짧게 봐도 일주일은 족히 걸릴 것 같습니다.”

지원자들의 명단을 보고 놀랐다.

“많을 수밖에. 물리치료사의 경우 10 대 1이고, 한의사들의 경운 15 대 1이었네. 걱정 말게. 절반 정도로 줄였고 한 달 동안 자네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수만큼만 보면 되니까.”

“일은 시키지 않으시는 겁니까?”

“글쎄, 환자가 우리 사정을 봐주는 건 아니잖나?”

못 빼준다는 얘기다.

“아? 일요일 날 하라는 소리처럼 들리는군요?”

“그런 방법도 있군. 사실 현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아서 주말 면접을 선호하는 이들도 제법 많아 걱정했는데 자네가 그래준다면 좋지.”

“······.”

능구렁이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삼켰다.

이제 와서 못 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빌어먹을 문희원 자식 때문에라도 해야만 했다. 이런 때 권력은 좀 이용해도 괜찮을 듯했다.

“주말에 일한 것에 대해서는 1.5배로 쳐줄 테니 그런 표정 짓지 말자고! 자자! 면접 장소가 될 한방의학센터나 구경하러 가세.”

그러고 보니 한방의학센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가본 적이 없다.

“사실 한방의학센터 신설 얘기는 전부터 있어왔는데 1년 전쯤에 갑자기 결정 났다네. 그래서 새로운 건물을 지을 틈이 없어 예전에 암센터로 쓰던 곳을 리모델링했지.”

현재 암센터는 점점 늘어나는 암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본관 옆 동에 아주 크게 지어져 있다.

“이곳이네. 서문 바로 앞이라 독자적인 센터 느낌도 나서 괜찮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훌륭하네요.”

한방의학센터는 다른 곳과 확실하게 차별이 되어 있었다. 복도 하나 차이일 뿐인데 고즈넉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카페 느낌마저 났다.

나중에 환자들이 북적인다면 비슷해지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렇게 보였다.

“2층으로 가볼까?”

“아직 구경을······.”

“한 달 동안 실컷 볼 거 아닌가.”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그런데 혼자 해야 하는 건 아니죠?”

“나도 양심이 있지. 힘든 일 시켜놓고 잡다한 일까지 시키겠나. 자넨 그저 면접이 가능한 시간만 알려주면 되네. 그럼 나머지는 인사행정과에서 다 알아서 할 걸세.”

“···다행이네요.”

“허허허! 설마 면접 전화까지 하라고 했겠나. 조만간 자네를 도울 사람과 자리를 마련해 주겠네. 그건 그렇고 나 사장과 식사를 했다면서?”

“네. 소고기 사주시더라고요.”

“내게 자네에 대한 칭찬을 많이 하더군. 잡지 않으면 현성병원으로 데려가겠다는 말을 했다네.”

“제가 병원에 근무하게 된다면 그건 한강대학병원일 겁니다.”

“허허허. 듣기 좋은 말이군. 한데 아직 가게가 마음에 걸리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병원에서 일하기로 마음이 기울어진 상태에서 마지막까지 고민하고 있는 건 두 사람 때문이었다.

“다정이 병이었군. 다른 병원엔 안 간다는 말을 들었으니 너무 채근하는 것도 좋지 않겠지. 결정될 때까지 기다려줄 터이니 정리되면 말하게. 이런! 가이드가 안내를 게을리 했군. 2층과 3층은 검사실과 치료실이 준비되어 있다네.”

X-ray실, CT실, 조직검사실, 재활운동실 등 각 방마다 검사, 치료 장비가 즐비했다.

일반 병원, 대형 한방병원들은 점점 성장하는데 동네의 작은 한의원들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이유 중 하나는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장비가 구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어깨가 뻐근하고 아프다고 호소하는 환자가 있다고 하면 검사를 하지 않는 상태에선 여러 가지 진단이 나올 수 있다.

단순한 어깨 근육통, 어깨 염증, 오십견, 어깨 연골 빠짐, 어깨 회전근개파열 등등.

근육통으로 진단을 내리고 간단한 약과 파스를 처방한다면 설령 잘못 진단했을 경우에도 환자가 아파하는 시간은 길어질지언정 크게 문제가 없다.

문제는 오십견과 어깨 연골 빠짐 혹은 어깨 회전근개파열을 잘못된 진단을 하면 환자가 크게 고통 받는다.

오십견의 원인은 ‘퇴행’이다.

염증 및 관절 유착으로 팔을 제대로 들지 못하는데 그대로 두면 팔을 쓰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그에 염증을 치료하면서 아픔을 참아가며 팔 운동을 해야 한다.

그에 반해 어깨 연골 빠짐, 어깨 회전근개파열은 무리하게 움직이면 약물치료로 가능한 병이 수술을 해야 될 정도가 된다.

진단은 치료의 시작이다.

시작이 잘못됐는데 제대로 된 치료가 될까? 만일 낫는다면 그건 치료가 아니라 자연 치유다.

검사실이 완비되었다는 건 한강대학병원 한방의학센터의 시작이 나쁘지 않음을 보여주는 듯해 기분이 좋았다.

“여기 있는 의료 기기가 모두 한방의학센터에서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것들입니까?”

“그렇다네. 몇몇 연식이 된 장비가 있지만 작동엔 문제가 없을 걸세. 물론 정밀기계가 필요한 경우라면 언제든 다른 센터의 장비를 써도 되고.”

“5층 -실제로는 4층으로 한강대학병원에선 4라는 숫자를 쓰지 않았다- 은 원래 수술실이었는데 연구실과 탕약실로 바꿨다네.”

“탕약실은 이해가 되는데 연구실요?”

“왜? 모든 병원에서 하지 않나. 다만 우리 병원이 다른 곳과 다른 점은 누구든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점이지. 연구 내용을 보고하고 채택이 되면 연구비가 지원된다네. 그리고 연구 결과가 나오면 병원과 일정 비율로 나누지.”

“신약 연구를 그런 식으로도 하다니 어떤 면에선 대단하군요.”

“거창한 연구만 이루어지는 건 아닐세. 얼마 전 간호사가 수술 도구 중 하나를 조금 더 편하게 고쳐서 실용신안을 해뒀는데 의료기기 제조사에서 700만 원에 샀다네. 간호사는 보너스처럼 400만 원을 받고, 병원은 귀찮은 일을 대신해 주는 것으로 300만 원을 가지게 되었고 말이야. 4층에 직접 가서 보세. 혹시 아나 자네가 돈이 되는 물건을 만들어낼지. 연구 많이 해서 부자가 되게. 병원도 덩달아 부자가 되게 말일세. 허허허!”

‘부자’라는 말에 두삼은 연구할 거리가 있는지 생각하며 그를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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