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18. 소소한 휴일(3)
“실력이 좋은 줄 알았지만 설마 한의사였어요?”
박기영 작가가 PPL용 커피를 내밀며 물었다. 얼마 전 가게 앞에 허리 때문에 엎드려 있던 이다.
“근데 왜 한의원이 아니라 마사지 숍을 하고 있어요? 아! 마사지 숍을 무시하는 건 아니고요.”
“사정이 있었어요. 근데 박 작가님이 ‘원더풀 라이프’ 메인 작가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요.”
“몇 년 전이었으면 묻지 않아도 내가 떠벌렸겠죠. 하지만 요즘 시청률 알잖아요.”
흘낏 담당 PD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낮게 속삭이는 걸 보니 누구 때문에 시청률이 떨어졌다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요즘은 꾸준히 운동하시죠?”
“꾸준히는 아닌데 허리가 뻐근하다 싶으면 해요.”
한번 호되게 당하더니 정신을 약간이나마 차린 모양이다.
“그나저나 아까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침을 탁탁 꽂는 것만으로 피가 멈추다니, 대단하더군요!”
“그냥 침술이죠.”
“···내가 아무것도 모르나 생각하나 본데 요즘 마사지사, 물리치료사, 한의사, 의사에 대해 알아보고 있어요. 내가 겪었던 일자 허리로 인한 척추기립근 경직, 마사지로 풀 수 있는 사람은 없더군요. 정형외과에 가서 신경주사를 맞고 운동을 해야 낫는다더라고요.”
“···웬만한 실력이 있으면 충분히 가능해요.”
“글쎄요. 뭐,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으니 이 얘기는 그만하죠.”
가게에서 봤을 땐 방구석 폐인처럼 굴더니 일터에선 꽤 날카롭다. 더 이상 묻지 않는다니 다행이다.
하지만 화제만 바꿨을 뿐 다시 물어왔다.
“취미가 직캠이에요?”
“네. 이상한가요?”
“이상해서 물은 게 아니에요. 내 취미에 비하면 한결 고상한데요. 큭큭! 험! 아무튼 그냥 오늘 일도 있고 해서 취미 생활에 도움을 줄까 해서요.”
“······?”
“보기엔 이래도 방송국에 인맥이 넓어요. 다른 방송국에도 이직한 PD들 많이 알고요. 음악 방송 티켓은 많이는 아니더라도 몇 장씩은 구할 수 있죠. 당연히 촬영하기 좋은 앞줄로.”
솔직히 갈 시간이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카페 사람들을 생각하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주신다면이야 좋은데······.”
“조건 없어요. 다만 가끔 가면 서비스나 잘해주세요.”
“그럼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티켓은 편지로 보내거나 지나는 길에 갖다줄게요. 근데 올해 몇이에요?”
“서른셋입니다.”
“헐~ 얼굴은 20대라고 해도 믿겠네요. 난 서른여덟이에요.”
“···형님이시네요. 편하게 말하세요.”
말투가 말을 트자는 신호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을 편하게 했다.
“그러자. 너도 편하게 형이라 해.”
“···네, 형. 전 카페 회원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일어나 볼게요.”
“몇 명이 왔어?”
“네 명요.”
“자리 잡으려고 애쓰지 마. 맨 앞자리에 네 자리 마련해 둘 테니까.”
무슨 속셈으로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나 싶었다. 하지만 곧 의심을 지웠다. 스태프 생명을 구해준 것에 고마워서 그러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내려가니 후니사랑이 도착해 있었다.
“후 준장님, 준장 다셨다면서요.”
“대장님이 올려준 거지. 근데 어딜 갔다 왔냐?”
“요 위에 캠핑장 있는데 거기서 촬영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잠깐 구경했어요.”
“그래? 밥 먹고 구경하러 가야겠네.”
“어딜 가. 늦게 온 사람이 자리 잡아야지.”
“에이~ 쓰리고는 구경하고 왔으니까 쓰리고한테 시키면 되죠.”
“규칙은 규칙이야.”
원더보이가 어림없다는 듯 말했다.
“이제 스타인데 좀 봐주세요.”
“헐~ 별 하나가 까분다.”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에게 위에서 만난 아는 작가가 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것과 음악 방송 티켓을 주기로 했다고 알렸다.
“후 준장 운은 타고 났다니까. 근데 쓰리고야, 티켓 남는 건 어떻게 할 거냐?”
“대장님 다 드릴게요. 시간이 날 것 같지 않거든요.”
“그래? 카페를 위해 잘 쓰마. 쓰리고 덕분에 줄 설 필요 없게 됐으니 그늘진 곳에 가서 도시락 먹자.”
사람들이 오면서 줄이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두삼 일행은 오히려 줄을 벗어나 조용한 곳에서 식사를 했다.
공연 1시간 전, 박기영 작가가 마련해 준 자리에 앉아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을 때 다친 이를 병원에 데리고 갔던 이 중 한 명이 다가왔다.
그는 꼼꼼히 포장된 침을 건넸다.
“선생님,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술은 잘됐습니까?”
“아, 네. 수술 끝난 것 보고 왔습니다. 병원에서 출혈이 조금만 더 심했어도 위험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무사했으면 됐습니다.”
“참! 병원에서 누가 조치를 취했냐고 물었는데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 대충 얼버무렸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주목받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남자는 몇 차례 더 고맙다고 하고 떠난 후 일행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적당한 핑계를 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공연.
오랜만에 봐서인지 재미있었다. 특히 노래하는 중간에 티니스가 무대 아래로 내려왔는데 우연인지 누군가의 입김인지 자신의 일행 앞이었다.
덕분에 40대가 넘은 원더보이 형이 걸그룹의 춤을 따라 하는 모습을 봐야 했고, 저녁을 먹는 내내 그 얘기를 들어야 했지만 나름 즐거운 하루였다.
***
“용돈이랑 두 분 보약 보냈으니 꼭꼭 드세요. 추석 때 잠깐 들를게요.”
-지난번에 그렇게 많이 보내놓고 또 무슨 돈을 보내? 혹시··· 이상한 짓 하고 다니는 거 아니지?
“이상한 짓은요. 잘 살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그 대답이면 됐다.
핑계겠지만 전화를 자주 드리지 못하는 건 수화기 너머에서도 느껴지는 걱정하는 목소리 때문이다.
완전히 결정이 될 때까진 말하지 않으려던 얘길 꺼냈다.
“그리고 내년쯤엔 대학병원에서 일할 것 같아요.”
-···다시 의사가 되기로 한 거니?
“네.”
-잘 생각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수천만 원의 돈을 보내주는 것보다 다시 의사가 된다는 말이 더 기쁜 모양이시다.
“또 전화 드릴게요.”
왠지 뭉클해지는 기분에 얼른 통화를 마무리했다.
“······.”
기분을 풀고자 하늘로 시선을 올렸는데 손바닥만 한 뭔가가 공중에 떠 있었다.
풍뎅이 여러 마리가 동시에 날아가는 듯한 프로펠러 소리, 바람에 살짝 움직였다가 금세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이 영락없이 드론이다.
“누가 날리는 거야?”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딱히 날리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한데 그때 스르르 아래로 내려오더니 드론이 말을 했다.
-오빠, 나야.
“어? 하란이 너냐?”
-응. 오늘 새벽에 완성해서 테스트해 보는 중이야.
“깜짝이야. 난 또 누가 날 감시하나 했네. 그나저나 통화가 가능한 드론이라, 신기하네.”
-스마트폰을 이용해 만들었거든. 근데 밥은 먹었어?
“시간이 몇 신데.”
-아직 8시밖에 안 됐거든.
“아! 그런가? 연섭이 학교 때문에 하루 일과가 일찍 시작돼서 헷갈린다.”
어제부터 연섭이가 다시 학교랑 소속사 생활을 시작했다. 상태가 좋지 않으면 바로 달려오면 됐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많이 좋아졌나 보네?
“약간. 배고프면 집으로 와. 챙겨줄게.”
-나 밥 좋아하는 거 알지?
“네네. 된장찌개 준비하겠습니다~”
부엌으로 가는데 드론이 졸졸 따라온다. 신기한 건 장애물을 피해서 오는 점이었다.
“왠지 감시당하는 기분이네.”
쌀을 씻어 불에 올리고, 된장찌개를 만들고, 간단한 반찬을 만드는 내내 드론이 지켜본다.
준비가 거의 다 됐을 때 하란이 들어왔다.
평범한 옷차림에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않았는데 반짝반짝한다.
“뭐야, 비밀번호 안 바꿨어?”
“응. 부자가 가난뱅이 집을 털 이유가 없잖아.”
“혹시 엉뚱한 걸 기대한 거 아냐?”
“엉뚱한 거?”
“···아무것도 아냐. 이야! 오빠 장가가면 와이프한테 사랑받겠는데. 그새 이만큼을 준비한 거야?”
“있는 거 데치고 무친 것뿐인데, 뭐. 근데 지켜보고 있었던 거 아냐?”
드론을 흘낏 보며 물었다.
“아 저거. 오빠를 목표물로 지정해 놔서 그래.”
“···킬러냐?”
“무기를 장착하려면 크기가 커져서 눈에 쉽게 띄어서 안 돼. 뭐, 독살이라면 가능하겠다. 잘 먹겠습니다!”
하란은 합장한 후에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한데 방금 전에 한 말이 있어서 죽은 자에게 기도를 하는 모습처럼 느껴져 순간 섬뜩하다.
“계란 더 줄까?”
“아니. 앞에 앉아 있어주면 돼. 혼자 먹는 밥은 질색이거든.”
이효원은 옛날부터 지원을 했던 기업의 광고를 찍는다고 2박 3일로 해외에 나갔다.
“어머니랑 같이 살지 그래?”
“엄만 지금 있는 집이 좋대. 그리고 내가 매일같이 찾아가는 것도 싫은지 요즘은 동창회다 뭐다 밖으로만 나도셔. 딸이 일하는 걸 당신이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 봐.”
“네가 놀아도 될 만큼 부자라고 말하면 되지 않아?”
“그건 예전에 치료를 안 받겠다고 하실 때 이미 말했어. 연구하고 사업한다고 몇 년씩 얼굴도 안 보여주던 딸이 갑자기 매일같이 나타나서 친근하게 구니 오히려 부담스러우신가 봐. 아니, 아마 내가 어떤 것에 행복함을 느끼는지 너무 잘 알아서 그럴 거야.”
“어디서 행복을 느끼는데?”
“연구실에 박혀 저런 걸 만들 때.”
“부모님의 마음은 자식을 낳아봐야 안다고 했으니······.”
“오빠도 불효자구나?”
“그렇지 뭐.”
분위기가 무겁다고 생각했는지 하란은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근데 그날 이후부터 몸이 이상해.”
“응? 언제부터?”
“왜, 있잖아. 엄마랑 오빠 기절했던 날.”
“어디가 이상한데?”
깨어난 후 혹시 하란에게 이상이 있을까 봐 그녀의 몸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오늘로 사흘째 밤 샜는데 예전처럼 피곤하지 않아.”
“그러다 몸 상하는 거야. 있을 때 아껴 쓰라는 말, 사람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야. 손 줘봐.”
드론을 만들면서 다쳤는지 손에 상처가 제법 보인다.
손을 잡고 기를 보내 천천히 몸을 살폈다. 사흘 밤을 샌 것치곤 상당히 기가 깨끗하고 왕성했다.
이유는 단전에서 시작해 독맥으로 올라가던 기운이 입술-독맥과 임맥이 만나는 곳-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그대로 백회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알았다.
‘백회가 일부 뚫렸어.’
예전엔 분명 막혀 있었다.
‘그날 백회의 벽이 약해졌다가 매일 하는 요가 때문에 뚫린 건가?’
꽤 가능성이 높은 추측이다.
“임독양맥이 살짝 뚫렸어.”
“아하~ 엄마가 뚫렸다는 거 말이지?”
“응. 그날 충격에 머리에 있는 막힌 공간이 헐거워졌고 네가 하는 요가 때문에 살짝 열린 것 같아.”
“그럼 내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나는 건가?”
“서서히 뚫린 거라 그럴 염려는 없을 것 같은데. 완전히 뚫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완전히 뚫릴까?”
“글쎄다. 막힐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나이가 들어감에 맥과 혈이 많이 막히거든.”
“음, 그럼 완전히 뚫는 게 좋겠네. 혹시 오빠가 뚫어줄 수 있어?”
“이미 넓어진 구멍을 넓히는 거라 딱히 위험은 없을 것 같은데 확신은 못 해. 그러니 가급적 시간을 두고 천천히 뚫는 게 낫겠지.”
새로 뚫는 거라면 너무 위험해서 반대했을 것이다.
“그럼 해줘.”
“넌 지금도 건강해.”
“건강도 건강인데 사실 요즘 머리가 너무 맑아서 좋아. 코드 만드는 것도 너무 수월하고. 혹시 그게 뚫린 것 때문이라면 다 뚫리면 훨씬 좋잖아.”
“지금도 충분히 좋은데 더 좋아져서 뭐 하게?”
“세계 정복!”
“···냉수 줄게.”
정수기에서 시원한 물을 뽑아 건넸다. 한데 혹시나 싶어 말을 이었다.
“성공하면 한 자리 주나?”
“물론. 오빤 ···통일 세계 보건복지부 장관.”
“뚫어줄게.”
절대 장관직에 욕심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리고 절대 하란의 손을 잡고 싶어서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