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18. 소소한 휴일(2)
분위기 좋은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양복 입은 모습 잘 어울리네요. 늦었지만 공무원 시험 합격한 거 축하해요.”
“9급인데, 뭐. 그나저나 시골 공기가 좋긴 좋은가 보다. 어떻게 너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젊어졌다?”
“형만 하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젊어 보인다고 하지만 매일 보는 얼굴이라 그런지 딱히 감흥이 없다.
“근데 공무원이 토요일 날 일해요?”
“내가 속한 서초구청은 일한다.”
“놀고먹는 것이 좋아서 공무원이 되겠다고 하더니 실제는 안 그런가 봐요?”
“복불복이야. 한가한 부서는 그런데 일하는 부서는 죽음이다 죽음. 정시 퇴근은 꿈도 못 꿔. 게다가 윗대가리들이 무슨 정책을 내놓잖아? 그럼 지들은 일 안 하고 다 밑으로 내려 보내. 즉, 나 같은 9급 공무원들만 죽어나는 거야. 동사무소에 떨어졌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구청에 떨어져서······.”
노대우는 온갖 불평불만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총무로 빌빌댈 때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넌 뭐 하고 지내냐?”
“장충동 근처에 작은 마사지 숍 하나 냈어요.”
“오! 사장님이구나. 가면 그냥 해주냐?”
“물론이죠. 스트레스 받으면 오세요. 하하!”
“농담이다. 돈 버는데 제값 주고 받아야지.”
“그냥 음료수나 세 개 사오면 돼요. 이제 돈 모아서 장가가야죠.”
“장가? 어느 세월에. 포기했다. 가진 거라곤 부랄 두 쪽밖에 없는 9급 공무원이랑 결혼할 여자가 어디 있냐. 그리고 설령 있다고 해도 내가 싫다. 결혼해 봐야 나, 와이프, 아이 셋 다 고달프다. 그건 죄악이야, 죄악.”
“죄악까지야······.”
“아무튼 됐다. 그냥 돈 벌어 혼자 쓰다가 죽을래. 음식 나왔다. 먹으면서 얘기하자.”
노대우와 하는 얘기는 평범했다.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얼마 전에 드라마를 봤는데 재미가 어땠는지, 직원들과 노래방을 갔는데 최신 노래 중 아는 것이 없었다는 소소한 얘기들.
시원한 맥주를 반주로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여기서 조금 가면 싸면서 괜찮은 바 있는데 거기 가서 한 잔 더 하자. 나랑 동갑인 계장이 소개해 준 곳인데 가끔 가는데 꽤 재미있는 바야.”
“그래요. 이번엔 제가 낼게요. 근데 계장이랑 꽤 친한가 봐요?”
“내가 누구냐. 총무를 하면서 별 거지 같은 녀석들과도 다 친해진 총무계의 전설 노대우 총통이잖아. 구청에서 얼음장이라고 불리는 그를 단 석 달 만에 친구로 만들었다.”
“하하! 형은 공무원 안 했어도 절대 굶어죽진 않았을 거예요.”
“굶어죽진 않겠지만 빌빌거렸겠지.”
대화를 하는 동안 바에 도착했다.
지하에 위치한 바는 입구부터 꽤 고급스러웠다.
“고급스럽게 보이지? 나도 처음엔 비싸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더라고.”
안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고급스럽지 않다는 건 아니다.
그저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다. 그래서일까 제법 사람이 있음에도 무척 조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노 주임님, 어서 오세요.”
바텐더 복장의 여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반겨줬다. 그리고 두삼에게도 살짝 눈인사를 한 후 말을 이었다.
“동생분?”
“헐~ 너무하네. 친구가 아니라 동생으로 보여?”
“그렇게 말해 드리고 싶은데 저 심한 거짓말은 못 하는 거 아시잖아요?”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말솜씨가 아주 능숙했다. 게다가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까지 짓고 말하니 살살 녹는다.
‘아니, 그보단 목소리 탓인가?’
약간은 느린 듯 차분한 목소리가 묘하게 사람을 편안하고 늘어지게 만들었다.
“뭘 마실래요? 평소에 마시던 거?”
“응. 사케랑 회로 줘.”
“에? 바에서 회를 팔아요?”
“훗! 노 주임님 처음 왔을 때랑 똑같은 말을 하네요. 저흰 손님이 원하는 술과 안주가 있으면 가급적 맞춰 드려요.”
바텐더는 싱긋 웃으며 두삼의 놀람에 답해줬다. 그리고 노대우도 한마디 더했다.
“내가 재미있는 곳이라고 했잖아.”
“···확실히 그렇군요. 근데 여기 오는 이유가 술값이 싸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자식이··· 술이나 마셔.”
“오! 진짠가 보네요? 데이트 신청은 해봤어요?”
“넌 네가 좋아하는 연예인한테 데이트 신청해?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경우가 있는 거야.”
마음에 와닿는 비유라 더 놀릴 수가 없었다.
안주용으로 나온 회는 깔끔했다. 시원한 사케와 잘 어울렸다.
점심때부터 시작된 노대우와 만남은 10시쯤 해장국을 먹으며 끝났다.
***
“연섭아, 일어나.”
“···형, 저 어제 간만에 친구들 만나고 와서 새벽에 잠들었어요.”
휴가는 자신만 보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요도조임근이 고쳐지면서 하루 종일 돌아다닐 수 있게 된 나연섭도 그동안 못 누리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나 지금 나가면 밤늦게나 올 거야. 하루 종일 속이 부글거리고 싶으면 자든가.”
“···그건 안 되죠. 저도 약속 있어요.”
“그럼 얼른 일어나. 운동도 하려면 시간이 빠듯해.”
오늘은 오랜만에 출캠(?)을 하기로 했다.
운동과 화장실 문제까지 해결한 후에 카메라를 챙겨 서둘러 약속 장소인 종로로 갔다.
“원 대장님! 오 중령님!”
“어서 와라. 이제 서울에 완전 눌러 살기로 한 거냐?”
출캠은 하지 않았지만 카페엔 간혹 들어가 어떻게 지내는지 글을 남겼다.
“네. 가끔이라도 나가고 싶은데 짬이 안 나네요.”
“살다 보면 바쁠 때도 있고 한가할 때도 있지. 자! 다 왔으니 갈까?”
차에 오르자 차는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남원 멤버랑 같네요. 참! 다련천사는 잘 지내요?”
“한동안 바싹 하다가 활동 안 한 지 두어 달 됐다. 원래 그러잖아.”
취미 활동이다 보니 들고 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천 명 가까운 카페 회원 수에 비해 실제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들은 스무 명 남짓이다.
중간에 마트와 도시락 전문점에 들러 먹을거리를 사서 오늘 행사가 있는 경기도 가평군 위치한 수궁유원지로 향했다.
유원지라고 해서 사람이 북적이는 곳을 생각했는데 발을 담글 수 있는 개울 옆에 넒은 잔디밭이 있는 풍광 좋은 시골이었다.
도착하니 잔디밭에 무대를 설치하는 중이었다.
“한적해서 좋긴 한데, 오늘 무슨 행사예요?”
“엄밀히 말해 행사는 아니고 예능프로그램에서 게릴라 콘서트처럼 하는 거야.”
“편하게 찍을 수 있겠네요.”
행사에 비해 짧게 공연을 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관객이 적어 좋은 영상을 찍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공연은 오후에 하니까 일단 근처에서 편하게 있어.”
마트의 분식 코너에서 사온 김밥을 들고 슬슬 산책을 했다.
유원지 바로 위에 오토캠핑장이 있었다. 그곳이 예능프로그램 촬영지인지 많은 방송국 차량과 보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접근하자 아침을 준비 중인 연예인들과 그들을 찍고 있는 스태프들이 있었다.
촬영에 협조해 줘서 고맙다는 푯말과 안전 라인이 쳐져 있었기에 그 밖에서 구경했다.
‘그나저나 인기도 많지 않은 프로그램치곤 촬영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구나.’
연예인의 수는 초대 손님인 티니스까지 합치면 열 명 정도인데 스태프들은 백 명쯤 되는 것 같다.
수요일 밤에 하는 ‘원더풀 라이프’는 예능 장수프로그램으로 한때는 엄청 인기가 좋았다. 한데 최근엔 ‘아직도 하고 있어?’라는 소릴 듣는 프로그램이 됐다.
하지만 재미완 상관없이 TV에서 보던 사람들을 실제로 보게 되니 꽤 신기했다.
“저, 실례합니다! 지나갈게요!”
들고 있던 김밥을 다 먹을 때까지 멍하니 보고 있는데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스태프로 보이는 두 사람이 한 사람을 부축하고 있었는데 부축받고 있는 남자의 허벅지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촬영장에선 조심하라고 했지! 한눈팔다가 잘하는 짓이다.”
“···죄송합니다. 발을 헛디뎌서······.”
“일단 치료받고 나서 보자.”
오른쪽의 사내는 다친 이에게 화를 냈지만 목소리엔 걱정이 가득했다. 생각보다 많은 피가 났기 때문이다.
‘색깔과 양을 봐서는 정맥이 다친 것 같은데··· 근데 내 오지랖은 치료 안 되나.’
저렇게 대충 묶고 늑장을 부리며 가다간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짐작에 불과했지만 확인해야 할 일이었다.
“저기요. 잠시만요.”
“···뭡니까?”
“한의사인데 상처 잠깐 볼 수 있을까요? 피 흘리는 양이 너무 많아요. 아무래도 정맥을 다친 것 같은데 서두르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
가타부타 말은 없었지만 두삼은 벌써 사내의 상처에 손을 올렸다.
“찔린 겁니까?”
“···아, 네. 장비랑 같이 쓰러지면서··· 근데 정말 정맥이 다친 겁니까?”
“예. 빨리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으셔야 합니다.”
“···정맥이라면 버틸 수 있습니까. 여기서 아무리 가까운 병원도 2, 30분은 가야 하는데요.”
“그냥 가면 위험합니다.”
“바, 방법이 있습니까, 선생님?”
갑작스러운 선고에 세 사람은 패닉에 빠진 듯 당황했다. 특히 다친 남자는 당장 쓰러질 것 같다.
“제가 조치를 취해 드릴 테니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가세요. 일단 앉으세요.”
두 사람이 다친 이를 앉히는 동안 허리춤에 찬 침을 만지작거렸다.
조금은 망설여졌다. 침을 다시 들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리라.
‘···이걸 쓰게 될 줄이야.’
은사님이 준 침 중에 일부를 부적처럼 차고 다니고 있었다.
한강대학병원으로 간다면 기를 이용해 혈관을 막고 전철희에게 수술을 부탁하면 된다. 그러나 일반 병원에 가는데 기로 막으면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피가 나지 않으니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고, 설령 수술을 한다고 해도 신기한 현상이라고 떠들고 다니면 곤란했다.
기운이 사라지는 시간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지만 분 단위까지 맞출 능력은 없었다.
가능하게 하려면 침을 써야 했다.
찌익! 찌익! 퓨슉!
입고 있던 청바지를 손으로 찢어 버리고 감아둔 압박붕대를 풀자 피가 솟구쳤다.
“으··· 으~”
솟구치는 피를 보곤 쇼크가 왔는지 어느새 피를 많이 흘린 다친 남자는 창백한 얼굴이 되어 쓰러지려 했다.
“잡아주세요. ···시작합니다.”
침을 들고 잠깐 머뭇거렸다.
‘두 번 다시 잡지 않겠다고 한 침인데······.’
자신이 한 약속과 한 사람의 생명의 무게가 머릿속에서 저울질됐다.
물론 결과는 볼 것도 없었다.
푹!
기를 잔득 머금은 침이 남자의 허벅지에 꽂혔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망설임이 없었다.
현재 혈과 맥을 찌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여러 개의 침을 이용해 조립품처럼 예전과 같은 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꽤 번거로운 작업이다. 하지만 침을 뽑는 순간 기운이 사라지게 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피가 멈췄어요! 선생님.”
“됐습니다. 침을 뽑으면 피가 나게 되니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절대 뽑으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렇다면······.”
뭔가 요구를 하려 한다고 생각했을까 살짝 긴장해서 쳐다본다.
“이 침, 제 은사님께 받은 것이니 버리지 말고 꼭 챙겨주십시오.”
“무, 물론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챙기겠습니다. 근데 어떻게 연락을?”
“오늘 공연을 보러 왔으니 여기 있겠습니다. 직캠을 찍는 무리 가운데 있을 거예요. 찾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존경심 가득한 표정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서두르라는 말을 하고 일어나는데 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짝짝짝!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많은 이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촬영을 하던 연예인들은 물론 스태프들도 다 몰려온 모양이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슬그머니 도망가려는데 누군가가 이름을 불렀다.
“두삼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