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17. 진상들(2)
병원으로 매일 나가기 시작했다.
5시 30분에 일어나 30분간 호흡을 한 후 아침을 먹고 7시까지 나연섭을 치료했다.
너무 일찍 일어난다고 작은 강아지처럼 짖어대다가 하란의 집으로 가서 이효원과 함께 운동을 하게 해준다니 양처럼 순해졌다.
물론 효원이 먼저 제안한 일이었다.
8시까지 이효원의 오른 다리 근육을 왼 다리 근육처럼 만들기 운동을 시킨 후에 바로 병원으로 향하는 일상이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민규식과 김진선, 전철희의 일을 돕다가 가게로 돌아오는 생활.
일로 시작해 일로 끝나는 생활이지만 체력적으로는 문제는 없었다. 다만 기운이 매일 간당간당했다.
자기 전에 3분의 1을 채우고 자면서 또 3분의 1, 자고 일어나서 3분의 1을 채워 100퍼센트에서 하루를 시작하는데도 부족하다.
‘보약이라도 먹어야 하나?’
막 만성신부전 환자의 혈관에 주사를 꽂을 수 있게 기운으로 원통을 만들고 나니 기운이 벌써 절반 가까이 사라졌다.
“전 선생님, 더 시킬 일 없음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혈관에 혈액 투석기를 꽂고 있는 전철희에게 말했다.
“아! 그래요. 근데 오늘은 일찍 가네?”
“아무래도 경동시장에 들렀다가 가게로 가야 할 것 같아서요. 보약이라도 한 첩 지어야겠어요.”
“이런··· 내가 그동안 너무 부려 먹었나? 잠깐만.”
그는 혈액 투석기를 작동시킨 후 황급히 지갑을 꺼냈다.
“이거 얼마 안 되는데··· 그래도 살 때 보태. 미안해서 그래.”
“아, 아닙니다. 돈 있습니다.”
“알아. 큰손 환자를 맡고 있다며? 이건 밥 한 끼 사주려고 했는데 한 선생이 시간이 없다니까 대신에 주는 거야. 받아줬으면 좋겠어.”
“선생님도 참··· 그럼, 잘 쓰겠습니다.”
50만 원. 밥값치곤 많았다.
옷을 갈아입고 로비로 내려갔다. 그리고 정문 옆에 세워둔 오토바이를 향해 갈 때였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녀가 아는 척을 했다.
“어? 두삼이 형!”
“두삼 오빠.”
“어! 현수랑 은수구나. 이런 데서 다 보네?”
“여기 한방의학과에 지원한다고 지난번에 말했잖아요. 오늘 접수했어요. 간단한 면접도 보고 오는 길이에요.”
“둘이 같이?”
“네, 원래 둘이 한의원 할 생각도 했었는데 좋은 기회인데 접수는 해봐야죠. 그리고 우리 은수처럼 예쁜 애는 한눈팔면 다른 놈이 낚아채 갈 텐데요. 옆에 꼭 붙어 있어야죠. 헤헤!”
“······.”
“오빠도 참, 그런 소릴······.”
“뭐 어때, 사실인데. 근데 형은 여기 웬일이에요?”
“아, 그게··· 그러니까······.”
“아! 형도 접수했군요?”
자의로 접수한 건 아니지만, 민 원장이 강제로 접수시킨 것이나 다름없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잘했어요. 형 실력 진짜 아까웠어요. 제대하고 형이 겪었던 얘길 듣고 진짜 그 개새끼들, ···가서 패고 싶었어요.”
“실제로 몇 명 때렸잖아?”
은수가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그야 두삼이 형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소곤대니까 그랬지. 걱정 마. 내가 아무나 패고 다니냐? 아무튼 형도, 우리도 잘됐으면 좋겠다. 형한테 다시 침술도 배우고 싶고요.”
은사님 말고 두눈박이가 또 있었나 보다.
“손 놓은 지가 언젠데. 이제 내가 배워야지.”
“행여나 그러겠어요. 솔직히 아직도 형이 예전에 가르쳐 준 거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있어요.”
“그건 네가 공부를 안 하는 거고. 참, 밥은 먹었냐?”
“오! 밥 사주려고요? 이르긴 한데 눈치 없이 배가 고프네요, 형.”
“돈 생겼는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지난 번에 밥 한끼 같이하자고 했잖아.”
“그럼··· 거절하지 않을게요. 은수야 뭐 먹을래. 너 일식 좋아하니까 일식 먹으러 갈래?”
“얻어먹으면서 일식은······.”
“일식이 좀 그러면 소고기? 그것도 좋아하잖아.”
아주 지랄을 한다.
대학 다닐 때 완전 상남자였는데 팔불출이 다 됐다.
두 사람을 데리고 병원 근처에 있는 일식집으로 갔다. 얼마 전에 민규식과 와본 곳이었다.
“맛있네요. 근데 너무 비싼 곳 아니에요?”
“비싼 걸 걱정하는 사람치곤 젓가락질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냐?”
“하하! 먹을 땐 복스럽게 먹어야죠. 참! 근데 예전 일에 대한 소문 들었어요?”
“···무슨 소문인지 모르지만 별로 듣고 싶지 않다. 이제 그만 잊었으면 하고.”
“어떤 새끼가 고의로 일을 키웠다는데··· 억울하지 않으세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몰랐나 보네요. 형에 대한 소문이 많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누군가가 일부러 일을 키웠다는 거였어요.”
실제로 너무 어이없게 일이 커져서 한때는 음모이론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속이 편해지는 건 아니기에 아예 지우려고 했었다.
한데 학교에서 그런 소문이 돌았다니 관심이 갔다.
“꽤 구체적이었는데 학교 교수 중에 한 명이 적극적으로 형을 비난했다는 거예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소문의 출처를 찾아봤죠. 근데 소문을 낸 사람은 못 찾았는데 형을 잘못했고 처벌해야 한다고 비난했던 교수는 찾았어요.”
“···누군데?”
“탁고성 교수요.”
“···그 양반은 예과 때부터 날 싫어했어.”
“저도 마찬가지예요. 근데 아무리 싫다고 해도 별것 아닌 걸 굳이 공론화시킬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만 하자, 좀 불쾌하네. 오랜만에 너랑 밥 먹는데 기분 좋게 먹고 싶다.”
개인적으로 피해를 준 적이 없는데 탁고성 교수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류현수의 얘기만 듣고 판단할 수 없었기에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넘길 생각은 없었다.
“그래, 두 사람 사귄 지는 얼마나 됐어?”
다시 그 얘기가 나올까 대화를 가급적 두 사람에게 물으며 이끌었다.
둘은 제대 후 전문가 과정을 할 때 만나 연인이 됐고 자리를 잡는 즉시 결혼할 거란다.
점심을 먹고 나자 12시, 가게에서 나왔다.
“잘 먹었어요, 형.”
“맛있게 먹었어요, 오빠.”
“응. 다음엔 같이 술 한잔하자.”
“그래요. 그땐 제가 살게요. 형이나, 우리나 꼭 붙었으면 좋겠네요.”
“그러게. 아! 전화 왔다. 그럼 다음에 보자.”
“네!”
두 사람을 보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원장님.”
-어딘가?
“전에 점심 같이 먹었던 일식집입니다. 오늘 일이 있어 좀 일찍 나왔는데 후배를 만나서 방금 식사를 마치고 나왔습니다.”
-그래? 같이 식사나 하면서 얘기나 할까 했더니. ···그럼 시간 좀 되나? 차나 함께했음 좋겠는데.
“급한 일입니까?”
-내일 출장을 가는데 다녀와서 말하면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서 말이야.
이미 경동시장을 가기엔 늦었다. 내일 갈 생각을 하고 민 원장을 기다리기로 했다.
가까운 곳이라 10분도 채 되지 않아 민규식이 도착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 차를 주문했다.
“바쁠 텐데 미안하네.”
“아닙니다.”
“후배라면 경해대 후배? 무슨일로?”
“네. 학교 다닐 때 꽤 친하게 지내던 녀석이죠. 우연히 병원 로비에서 만났습니다.”
“오~ 우리 병원에 지원을 한 모양이군?”
“그랬다더군요.”
“그래? 그 친구, 이름이 뭔데?”
“···모른 척해주십시오.”
“내가 자네를 봐서 편의를 봐줄까 봐 그런가?”
“원장님이 그럴 분이 아니란 건 잘 압니다. 다만 제가 좀 불편합니다.”
“융통성이 없군. 근데 나에 대해 잘못 알고 있어. 자네가 아는 후배라면 아주 좋은 점수를 줄 생각이네. 아니, 합격을 시켜줄 수도 있지.”
“······.”
“왜? 이상한가? 하지만 우리 일을 생각해 보면 일반 회사와는 모집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나. 공정함보단 그 사람의 이력이, 인성보단 실력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네. 물론 개차반 같은 성격이라면 문제가 되겠지. 하지만 비슷하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네.”
“이해했습니다. 근데 제 후배의 실력을 모르지 않습니까?”
“자네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지. 자네와 친하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해.”
표정을 보니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절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녀석의 실력이 엉망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가 되는 이에게 큰 기대를 하는 게 이상하지. 그땐 자네처럼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곤 비슷해. 진짜는 전문의가 된 후 수많은 임상 경험을 겪으면서 나타난다고 봐야지.”
수십 년 의사 생활을 한 병원장이 그렇다는데 뭐라 할 수 있을까. 두삼은 그냥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어요?”
“사람 참 갈수록 급해지는구만. 자. 다름 아닌 이거 때문이네.”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건넸다.
제일 위에 있는 장은 직원 모집 공고였고 아래는 지원자 정보였다.
“이걸 왜 저에게 주십니까?”
“한의학에 대해서 내가 뭘 알겠나. 결국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이력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들의 말만 듣고 판단하자니 좀 마음에 걸리는 게 많더군.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 좀 하려고 이렇게 가져왔네.”
“경험도 많지 않은 제가 어떻게··· 말도 안 됩니다.”
“센터장, 과장급을 뽑으라는 게 아니네. 그리고 온전히 맡길 생각은 없으니 너무 부담 갖지 말게. 함께 일하게 될 한의사와 물리치료사들의 실력을 확인한다고 생각하고, 걸러야 할 사람이 있으면 말해주면 되네.”
“생각만 해보죠.”
“너무 딱 잘라 선 긋지 말게.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답은 출장에 다녀온 후에 들었음 좋겠군.”
대답을 했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누가 누굴 판단한단 말인가.
게다가 누군가의 인생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는데 괜한 스트레스는 받기 싫었다.
***
전철희는 신부전증 환자들의 약해진 혈관에 기를 둘러 혈관을 보호하게 하는 일을 주로 부탁했다.
소아과의 김진선은 말 못하는 아이들의 병을 찾거나 열을 떨어뜨리는 일을 주로 부탁했다.
오늘 환자도 마찬가지.
태어난 지 고작 8개월 된 아기가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갑자기 열이 나서 부른 것이다.
심방중격 결손.
크게 걱정할 것 없는 선천성 심장 질환으로 폐렴 때문에 병원에 왔다가 발견돼 수술까지 하게 됐다.
결손이 더 작아지거나 자연 폐쇄가 되는 경우가 많아서 지켜보다가 좀 더 큰 후에 해도 되는데 이 아이의 경우 급속히 커지는 것이 발견되어 어쩔 수 없이 수술이 결정됐다.
으에엥!
조금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안쓰럽게 느껴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괜찮아.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잠깐 안은 것뿐이야. 금방 끝날 거야.”
바동거리는 아이를 가볍게 않고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차갑게 만든 기운을 아이의 몸에 넣었다.
자신의 품에 있으니 몸이 편해진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아이는 금세 얌전해졌다.
가만히 서서 지켜보던 김진선이 말했다.
“언제 봐도 신기해. 세상 서럽게 울던 애가 어쩜 금세 울음을 멈출까?”
매번 같은 말이다.
처음엔 몇 번 기운을 차갑게 만들어서 몸을 식혀주는 거라고 설명을 했지만 이제는 버릇처럼 중얼거리는 걸 알기에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다 됐어요.”
살짝 차가운 상태로 만든 후 잠든 아이를 작은 침대에 눕혔다.
“수고했어요. 근데 전신 마취도 가능해요?”
“가능해요. 해드려요?”
그녀는 양의학으로 가능한 것은 양의학으로 해결하자는 주의였다. 자신을 이용은 하되 의존하진 않는다고나 할까.
물론 그녀의 생각을 존중한다. 의존적이 되면 두삼이 괴로울 뿐이었다.
“네, 부탁해요. 갑자기 열이 난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네요.”
“부작용이 걱정되시나 보군요?”
“미신이나 징크스를 믿는 건 아닌데···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네요.”
“그러세요. 수술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30분 정도?”
임상 경험이 많은 의사들 중 가끔 수술이 잘못될 것 같다고 본능적으로 느끼는 이들이 있었다.
물론 실제로 어떨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신병교육대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을 할 때 꿈자리가 뒤숭숭한 훈련병을 열외로 빼듯이 그럴 땐 수술을 미루거나 다른 사람에 맡기는 게 나았다.
“지금부터 두세 시간쯤 마취될 거예요. 아기라 조금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고마워요.”
“선생님, 푸드코트에서 점심 먹고 있을 테니 문제 생기면 연락주세요.”
두삼은 좀 전에 들은 얘기 때문에 그냥 가기가 찝찝했다.
“연락하는 일 없을 거예요.”
그녀는 다짐하듯 말한 후 아기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두삼 역시 연락이 오지 않기 바라며 탈의실로 갔다. 사실 탈의실이라기 보단 혼자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방인데 민규식이 마련해 줬다.
탈의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가 올라탔다. 한데 아는 얼굴이 엘리베이터 구석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어! 저 인간 왜 이곳에······.’
또 만나면 싸대기를 날려 버리겠다고 생각했던 인간이었다. 한데 막상 실제로 보게 되자 과거 일이 떠올라 화는 났지만 뺨을 때리진 못했다.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을까, 놈이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