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무르면 다 고칭-54화 (53/122)

# 54

16. 지난 일은 흘려보내고(3)

“음식으로 기를 보충한다고 해도 그것이 즉각적으로 기로 흡수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흠, 그야 당연히 그렇죠. 그래서 꾸준히 관리하고 보충하는 거 아니겠소.”

“그런데 약효가 발휘되기도 전에 기운이 빠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기에 대해서 선천적으로! 민감합니다. 몸에 떠도는 기운과 흡수된 기운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일부러 선천적임을 강조했다.

실력과는 무관하고 운이 좋은 케이스임을 은연중에 알리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내친걸음이다. 다행히 이방익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효원 양의 다리 속 뼛조각을 찾은 것도?”

“그렇습니다.”

“하면 한 선생의 말에 따르자면 멀쩡하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인데 무엇 때문이라 생각합니까?”

“효원이의 특이체질과 부상당한 발 때문입니다.”

“특이체질?”

“편의상 쓴 단어입니다. 일반 운동을 할 때는 기의 움직임이 심하지 않습니다. 스케이트를 타면 기의 움직임이 갑자기 왕성해지죠. 그리고 그 기운이 다친 다리로 내려갔다가 올라오질 못하고 그곳에 머물다가 사라집니다.”

“···그런 기의 변화를 다 느낀단 말입니까?”

“선천적으로 느껴지네요. 대답이 되었으면 전 확인할 것이 있어서.”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에 대해 나름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하곤 돌아서 이효원에게 갔다.

이효원이 살짝 고개를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의사라고 말해줄 걸 그랬나 봐요?”

“이미 늦었거든. 발 좀 보자.”

발을 잡고 기를 느끼는 동안 이방익은 바싹 붙어서 바라봤다.

기가 발할 때 빛이 나는 건 자신에게만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긴장된다.

‘카메라가 있으면 찍을 기세군. 가만······!’

카메라 하니까 그의 이름과 얼굴이 왜 낯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TV에 자주 나오는 유명한 한의사로 사상체질과 전문의인데 전문 분야보다도 오히려 물리치료와 마사지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허리가 아파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던 사람도 그가 몇 번 주무르면 일어났고, 오십견으로 팔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던 사람도 팔을 움직였다.

훨씬 대단했던 할아버지가 계셔 목표로 삼진 않았지만 한때 존경했던 이였다.

“발목 근처 구허, 상구혈을 통해 진맥을 하는 거요? 나도 거길 만져봤지만 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던데······.”

“현재 효원이의 구허혈과 상구혈은 기가 통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느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다니 대단하군. 현재 상태는 어떤가?”

“기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상탭니다.”

“용천혈로 빠져나가는 건가? 아니 현재 혈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으니 특정한 혈로 나간다고 보기 어렵겠군. 어떤 식으로 치료를 할 생각인가.”

“글쎄요.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건 근육부터 왼발과 같이 자리를 잡아볼까 하고 있습니다.”

경맥, 낙맥, 혈은 해부학적으로 보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피부와 근육에 나타나는 반응점과 그 반응점을 연결한 경로가 경혈, 경락이다.

혈이 있는 위치는 실제로는 빈 공간이 아니다. 혈관, 신경 따위가 지나가기 때문에 혈을 누르는 것만으로 몸이 마비되거나 팔 전체를 못 쓰거나 하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는 거다.

즉, 맥과 혈이 막혔다는 건 그 경로에 독소가 쌓이거나 사혈이 고여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근육이 뒤틀리며 맥이 끊긴 것을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혈과 맥은 언급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지만 말이다.

이효원의 치료 방향을 생각하며 두삼은 생각을 최대한 단순화시켰다. 그에 일단 보이는 것부터 고치자 판단했다.

“마사지와 물리치료를 할 생각이군? 하지만 그것만으로 근육을 자리 잡는 건 쉽지 않을 텐데?”

“곧바로 좋아질 방법이 없으니 일단 해봐야죠.”

마사지와 물리치료 말고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지만 얘기하지 않았다.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나에 비하면 원인을 파악하고 치료 방법까지 강구하고 있었다니, 한 선생 참 대단하군.”

“감사합니다.”

“어떻게 하는지 봐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뭘 보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싫다고 말하긴 힘들었다. 그가 대화를 마친 후 효원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다리 상태를 살필 거야. 그 전에··· 씻고 올래?”

운동을 마치고 바로 달려온 이효원에게서 땀 냄새가 슬슬 올라오고 있었다. 국민요정이라고 해도 다를 게 없었다.

“그, 그래서 씻고 한다고 했잖아요!”

냄새가 난다는 말에 상처받았는지 이효원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그, 그게, 효원아.”

***

“······!”

욕실에 준비해 둔 바디 샴푸 향으로 무장한 이효원이 나오고 첫 치료가 시작됐다.

먼저 근육이 말랑말랑할 정도로 마사지를 했다.

“와아~ 오빠도 마사지 잘하시네요.”

“이걸로 밥 먹고 사는데 잘해야지. 근데 이제부터는 많이 아플 거야.”

“어느 정도요?”

“글쎄다. 내가 겪어본 건 아니라서.”

“마취를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네 근육의 움직임을 파악해야 하거든. 일단 왼발부터 살펴볼게.”

장딴지의 근육과 근육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꾹꾹 누르며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만 벌렸다.

“많이 아파?”

“···차, 참을 만해요.”

“제대로 말해야 해. 왼다리는 몇 번 안 하겠지만 오른 다리는 제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반복해야 해.”

협박처럼 느껴졌을까, 얼른 대답했다.

“···눈앞이 하얘질 정도로 아파요.”

“그럼 좀 살살할게.”

“아악! ···사, 살살하는 거 맞아요?”

“응. 입에 물을 거라도 줄까.”

“···네.”

입에 재갈을 물리는 이유는 참다가 이가 상하지 말라는 의도이기도 했지만 집중을 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만질 때마다 경직되고 꿈틀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을 기억해서 오른 다리의 움직임 역시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두삼의 손은 거침없이 계속됐다.

이효원은 참으려고 두 손을 꼭 쥔 채 건네준 수건을 악물었다. 그러나 소리가 새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모습이 외국인 코치의 눈엔 야만스럽게 보였을까, 내내 가만히 지켜보던 그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고통스럽게 만드는 게 무슨 치료라는 거요! 내 눈에는 아프게 하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소!”

치료할 때 아무도 데리고 오지 못하게 하든지 해야겠다. 사사건건 이러면 치료하기 힘들다.

막 말을 하려는데 이방익이 나섰다.

“밀턴 코치. 당신이 고칠 수 없다면 나서지 마세요. 근육을 바로잡는 일인데 아프지 않은 게 이상하죠.”

“미국으로 가면······.”

“수술한 곳이 미국임을 잊지 마세요. 그리고 그들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도.”

“······.”

“한 선생. 계속해도 돼.”

“···감사합니다.”

미국에서 내린 결론이 뭐였는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자신이라 해도 똑같이 얘기했을 거다.

왼 다리의 반응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오른 다리를 잡았다.

“지금보다 더 아플 거야.”

“···참을 수 있어요. 헤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괜찮다는 듯 미소 짓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적어도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다.

왼 다리의 경우는 근육의 모양을 살피기 위해서였고, 오른 다리는 사실상 시술이었다.

수술한 발목 부근의 장딴지근, 가자미근, 앞정강근은 왼발과 달리 깔끔하지가 않고 조금 달랐는데 뼈가 부러지면서 손상되고 회복되는 과정에서 변형이 일어난 것이다.

일단 흡착된 부분은 떼어내 정확히 구분 지어준 후 차후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비슷하게 만들어줘야 했다.

뿌드득!

기로 내부를, 눈으로 외부를 동시에 봐서인지 흡착되어 있던 근육이 떨어지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마치 배경음처럼 ‘악!’하는 소리가 이어서 들렸지만 무시하고 계속했다. 같이 아픔을 공감하기보단 빨리 끝내주는 것이 이효원을 돕는 일이었다.

빨리 끝낸다고 했지만 15분이 넘게 계속됐다. 그리고 손을 뗐을 땐 이효원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마치 사우나에 들어갔다고 나온 사람처럼 땀에 젖은 모습으로 물었다.

“···끝났어요?”

“일단은.”

“···그럼 저 여기서 잠깐 잘게요. 온몸에 힘을 너무 줬는지 일어날 힘도 없네요.”

“인상 쓰느라고 주름이 생겼으니 오빠가 얼굴마사지 해줄게.”

“···피이~ 병주고 약주네요. 잘 참았으니까 서비스로 전신마사지도 해줘요.”

“그럴게. 그리고 집 근처에 숙소 마련해. 운동할 수 있는 체육관은 내가 알아볼게.”

“그럴 필요 없어요. 치료받는 동안 하란 언니 집에 머물기로 했거든요. 그리고 웬만한 운동 기구는 다 준비해 놓는다고 했어요.”

아까 이삿짐이 많은 건 이 때문인가?

“가까워서 좋네. 화장품은 내가 임의로 해줄게.”

“···곧 광고 찍어야 한다는 거 염두에 두세요.”

“자고 일어나면 놀랄 거다. 물론 좋은 쪽으로.”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따뜻한 수건과 그녀에게 맞는 화장품을 가져오니 이미 잠들어 있었다.

“고생했다.”

고통이 여운이 가시지 않은 건지 인상을 쓰며 잠든 이효원에게 중얼거린 후 수건을 씌웠다.

자고 있다고 해도 약속한 일은 해야 했다.

***

“오빠, 차 드세요.”

마사지실 청소를 마치고 나오자 한미령이 차를 내밀었다.

“아, 고맙다. 손님은?”

“계산하고 가셨어요. 팁이라고 이만 원주고 가셔서 팁 통에 넣어뒀어요.”

“다음에 오시면 서비스해 드려야겠네. 그나저나 너무 늦어서 어떻게 하냐?”

오늘은 손님이 많았다. 꽉 차서 돌려보낸 손님도 있었는데 벌써 11시가 넘었다.

“괜찮아요. 재미있는데요.”

배시시 웃는 모양이 예의상 한 말은 아닌 것 같다.

“미령아, 앉아볼래?”

대걸레를 놓고 앉는 걸 보고 말을 이었다.

“요즘 마사지 실력 많이 늘었더라.”

“다 언니랑 오빠 덕분이죠.”

“그래서 다음 주부터 얼굴마사지는 따로 분리해서 영업을 할까 해.”

“네? 아, 아니에요. 전 아직 멀었어요.”

“마사지는 부족하지만 얼굴마사지는 충분해. 대단한 전문가를 키우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경험이 없는 전문가는 없어.”

“하지만 아직 손님의 몸 상태를 파악하는 건 젬병이나 다름없잖아요.”

얼굴 피부는 피시술자의 몸 상태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몸이 나쁜데 아무리 비싼 화장품을 바르고 마사지를 해봐야 일시적으로 좋아보일지 모르지만 나중이 되면 똑같아진다.

그에 환자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간단히 조치할 수 있는 마사지도 병행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

“그건 시행착오를 최대한 적게 겪게 하고 네 미래를 위해서 가르쳐 주는 거지 모든 걸 알아야 돈 받고 마사지를 할 수 있는 건 아냐. 그리고 한동안 얼굴마사지를 원하는 사람들은 내가 먼저 체크할 거야. 그러니 걱정 말고 해.”

“···알았어요. 근데 손님이 있을까요?”

“첫술에 배가 부를 순 없지. 그리고 손님들 중에 얼굴마사지만 따로 안 하느냐고 묻는 손님들이 제법 있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열심히 할게요.”

“그래 그 말이면 돼. 혜경이 누나 나온다. 드디어 끝났나 보다.”

“어? 근데 얼굴 표정이 별론데요.”

“그러게. 무슨 일 있었어요?”

마사지실에 성희롱이나 추행을 할 시 경찰서에 신고한다는 포스터까지 붙여놨는데 혹시 문제가 있었나 싶어 얼른 물었다.

다행히 걱정하던 문제는 아니었다.

“아니 손님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뭐가 이상해요?”

“특별한 건 아니고,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안 된다고 해서 네가 가르쳐 준 혈 자리를 눌러봤거든. 근데 반응이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달라서.”

“어떻게요?”

“평소엔 누르면 아파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어. 그리고 끝나고 나면 위가 편하다고 했는데 이 손님은 전혀 반응이 없어. 아프지도 않대. 그래서··· 손님 나온다!”

옷을 갈아입은 40대 후반의 남자 손님이 마사지실에서 나왔다.

두삼은 잠깐 망설이다가 계산을 하고 나가는 그에게 말했다.

“손님, 제가 잠깐 맥을 좀 잡아봐도 되겠습니까?”

“···왜요?”

“저희 직원이 마사지를 하면서 뭔가 조금 이상했다고 해서요.”

“얼른 집에 들어가서 자고 싶은데······.”

“5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손만 주시면 됩니다.”

“허참, 무슨 마사지 숍이 한의원 같은지.”

남자는 가볍게 투덜거리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두삼은 그의 맥을 잡고 기를 그의 몸속으로 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위의 전정부(아랫 부분) 바깥쪽에 암 덩어리를 발견했다.

‘불행 중 다행이군. 초기 암이야. 근데 어떻게 말을 한다.’

속 시원하게 암입니다, 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병원에서 철저하게 검사를 받은 사람도 암이라고 하면 일단 부정하고 본다.

담담하게 ‘그렇습니까?’라고 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게다가 마사지 숍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화를 낼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어정쩡하게 말해줘서 병원에 가질 않으면 죽음을 방치하는 것과 같았다. 문득 외벽에 생긴 암 때문에 돌아가신 은사님이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위의 아랫 부분에서 나쁜 기운이 감지됩니다.”

“···나쁜 기운이요?”

“병원에 가서 정확한 검사를 해봐야겠지만 혹이 아닌가 싶습니다.”

“···암이라고 말하는 거요? 올 초에 내시경을 했을 땐 멀쩡했는데?”

“외벽에 있는 것이라 내시경으로 발견이 안 됐을 겁니다. 암인지는 저도 확신을 못 하겠습니다. 다만 크지 않으니 반드시 병원에 가세요. 빠를수록 좋습니다.”

“······.”

“혹시나 가볍게 생각하실까 말하는 건데 저희 한의대 교수님도 매년 건강검진을 받으셨지만 위 외벽에 발생한 암에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원하신다면 한강대학병원에 아는 분이 있으니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멍하니 서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마 나름 판단을 내리고 있을 것이다.

얼른 메모지에 민규식 원장의 전화번호와 이름을 적어서 그에게 건넸다.

“꼭! 연락하십시오. 꼭입니다!”

남자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 몇 번이고 입을 실룩였다. 그러나 자신의 일인 양 간곡하게 말하는 두삼을 보고 화를 낼 수 없었던지 돌아서서 나갔다.

다행히 메모지는 손에 꼭 쥔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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