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16. 지난 일은 흘려보내고(2)
쇼핑백을 구해 보자기를 잘 넣고 장례식장을 벗어나 택시를 타러 병원 입구로 향했다.
나가는 길은 많았지만 택시를 타기에 병원 입구만 한 곳이 없었다.
하지만 10초도 되지 않아 후회했다.
장례식장 근처 주차장과 연결된 병원 입구에서 나오는 의사 차림의 여자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여자 역시 두삼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멈췄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두삼이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여자 앞으로 가서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그래, 오랜만이야. 교수님 장례식장에 온 거야?”
“응. 방금 인사드리고 이제 가려고.”
“나도 지금 가는 중이야.”
“그렇구나.”
헤어진 연인을 오랜만에 만나니 어색함이 있었다.
“이제 전문의겠네?”
“아, 응.”
그러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서로 바라보자 그런 어색함이 차츰 사라졌다. 해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담담함을 자신 역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보니 시간이 약임을 새삼 느낀다.
장례식장에서의 류현수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 그걸 따져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마음이 떠난 사람에게 미련을 가져봐야 그것만큼 추해지는 것도 없다. 물론 미련이 있지도 않지만 말이다.
“응. 잘 지내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잘 지내.”
“다행이다.”
“혹시 아직 신경 쓰고 있으면··· 그러지 마. 네가 옆에 있었으면 오히려 더 괴로웠을 거야.”
“그래, 자신보단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건 여전하네.”
“그렇지 않아. 이젠 사회의 때가 묻어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뻔뻔하게 살고 있어.”
이제 그만 돌아간다 입을 떼려 한 순간이었다.
“커피나 한잔할래?”
“장례식장에 갔다가 들어가 봐야 하지 않아?”
“퇴근하고 들러도 괜찮아.”
“···그럼 그러자.”
거절하고 도망치듯 가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서 그러자 했다. 주차장 너머에 있는 제법 큰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케익이랑 디저트 몇 개 시켰으니까 점심 겸해서 먹어.”
“고마워. 의외네, 취향도 다 기억하고.”
“그러게. 나도 의외네.”
“여자 친구는?”
“아직. 딱히 관심도 없고.”
연인에 대한 얘기는 적당히 마무리하고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병원 생활은 어때?”
“학생일 때 생각하던 것과 다르더라. 예전에는 솔직히 현실만 강요하는 김일교 교수님이 별로였어. ···근데 막상 병원에서 생활하다 보니 교수님 말씀 중에 틀린 게 없더라.”
“힘내. 그래도 꿈은 이뤄야지.”
주해인의 꿈은 교수였다.
“글쎄, 전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돼. 에휴~ 무거운 얘긴 그만하자. 넌 요즘 뭐 하고 지내?”
“장충동에 작은 가게 하나 냈어.”
“한의원?”
“아니. 마사지 숍. 의학에 도움이 될까 틈틈이 배워둔 것이 직업이 돼버렸네.”
주해인은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았다.
“잘 살고 있으니까 그렇게 안 봐도 돼.”
“···그래.”
이후론 누가 결혼했고, 누군 가게를 차려 망했고, 누군 돈을 많이 벌고 따위의 시시콜콜한 얘기였다.
주해인과 임동환의 결혼이 임박했다는 얘기도 자연스레 나왔고, 두삼은 별 미련이 없는 관계로 그저 듣고만 있었다.
“점심시간 끝나겠다. 이제 슬슬 일어날까?”
“···그래. 참! 전화번호는? 알려줘야 결혼할 때 연락을 할 거 아냐.”
카페를 나오며 전화번호를 불러주자 주해인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게 내 전화번호야. 혹시 근처에 오면 연락해. 밥이나 같이 먹자.”
“알았다. 그럼 간다. 고생해라.”
손을 흔들어 준 후 돌아섰다. 그리고 병원 정문 쪽으로 걸어가 마침 오는 택시에 올랐다.
‘마주하길 잘했네.’
종이가 타고 나면 재가 남듯이 수년을 열렬히 사랑했는데 감정의 찌꺼기가 남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만나게 되면 그 찌꺼기로 인해 심장이 다시 뛰면 어쩌나, 혹시 그녀가 다시 시작하면 어쩌나 따위를 걱정했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감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 것이겠지만 심장이 다시 뛰는 일은 없었다.
이번 일로 지난 일을 잊기 위해선 정확히 마주해서 부딪혀야 함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장충동으로 가주세요.”
목적지를 말하고 사이드 미러로 점점 멀어져 가는 병원을 보며 중얼거렸다.
‘행복하게 살아라.’
물론 미련은 없었다.
***
“야! 거기 조심해! 상자에 있는 ‘요주의’라는 붉은 글씨 안 보여? 아까 사장님이 안에 있는 물건에 흠집이라도 생기면 오늘 하는 일 헛일이라고 하는 소리 들었어, 못 들었어?”
아침부터 하란의 집 이사 때문에 수선스럽다.
물건을 조금만 옮기면 된다더니 대형 트럭 2대와 카 크레인, 지게차까지 동원되어 짐을 나르고 있다.
“어? 나의 예쁜 누나 오늘 이사 와요?”
나연섭이 발코니로 나오며 말했다.
“···언제부터 하란이가 너의 누나가 됐냐?”
“처음 누나를 딱 봤을 때 ‘나의 운명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솔직히 첫눈에 반한다는 거 믿지 않았는데 이젠 믿습니다.”
“하긴 상상은 네 자유니까 마음껏 해라. 그리고 오늘 오는 게 아니라 회사 일 때문에 며칠 더 미뤄졌다.”
“에이~ 그래요. 오늘 집들이 선물 사 들고 가려고 했더니. 어? 가만··· 형이 근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요? 설마! 혹시 형 나의 누나랑······.”
“···네 상상 속에서 난 좀 빼줄래? 손님 중에 하란이 어머님이 계셔. 그래서 아는 것뿐이야.”
“아하~ 월요일 날 오전에 오셨던 그분 말씀이구나?”
“그래.”
“음, 다음에 오실 때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그러든가. 근데 외출 나가냐?”
“네. 엄마랑 동대문에 가서 옷 좀 사려고요. 예전 옷들이 조금 작아져서 입을 옷이 없네요.”
자랄 나이라 그런 건지, 영양 잡힌 식사와 꾸준한 운동 덕분인지 연섭은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전엔 내려다봤는데 요즘은 거의 눈높이가 비슷했다.
“즐겁게 보내고 와라.”
외출을 권장하고 있었다.
나연섭이 스스로 낫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 주목적이지만 혹시나 최악의 경우라도 그가 살아갈 의지를 가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
오향희와 하하호호 거리며 대문을 나서는 나연섭을 보며 생각했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밝아졌지만 때때로, 특히 화장실에 들어갈 때 심한 자괴감을 느낀다는 걸 두삼은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지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가능성도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쓸데없는 생각만 나네. 음··· 약초나 말려볼까.”
차를 단숨에 마신 후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뒤쪽 베란다 쪽에 있었다.
“가을이 되니까 옥상도 꽤 좋구나.”
창고로 쓸 수 있는 옥탑이 있고 길게 그늘막이 쳐져 있어 의자만 갖다놓으면 발코니 부럽지 않았다. 다만 한여름엔 너무 더웠다.
물론 단점이 장점이 되기도 했는데 약초 말리기엔 이만한 곳이 없었다.
밤에 옥탑에 넣어놨던 약초를 꺼내 햇볕이 좋은 곳에, 그늘막 아래에 널었다.
‘집이 좋긴 좋네.’
다양한 조경수와 잔디로 이루어진 정원, 일견 미술관처럼 보이는 건물, 자신의 집도 세련되고 좋다고 생각했는데 하란의 집과 비교하면 아주 평범했다.
옥상 위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연예인들이 주로 타는 커다란 밴 한 대가 집 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왔네.”
일요일이 아님에도 한강대학병원에 가지 않고 기다린 이유는 저 밴 때문이다.
마당이자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아래로 내려갔다.
1층으로 내려가자 검은색 티에 검은색 타이즈를 입은 이효원이 코치, 그리고 처음 보는 사내와 들어왔다.
“오빠, 저 왔어요.”
“어서 와. 훈련 마치고 오늘 길이야?”
“오빠가 그러라면서요.”
“그럼 바로 볼까?”
“바로 오는 길이라 씻지도 못했는데······.”
“족욕통에 담그면 돼. 발을 본 후에 정 찝찝하면 씻어도 되고.”
“그래요, 그럼.”
대기실로 안내한 후 족욕통을 갖다줬다.
“혹시 다른 이상은 없었어?”
이효원이 훈련을 하는 곳에 세 번 방문을 했다. 그때마다 통로를 찾지 못해 발에 머물다가 기운이 사라지는 증상은 변함이 없었다.
원래는 몇 차례 더 증상을 살필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이 예전과 다름을 확실하게 느낀 이효원 본인이 먼저 치료를 요청했다.
“전과 달리 쉽게 피곤해져요. 처음엔 재활 훈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체력이 붙지 않아서 그런가 싶었는데 갈수록 더 힘이 없어요. 오전에 스케이트를 타고 나면 오후엔 타기가 힘들 정도예요.”
“스케이트를 탈 때만 유독 그렇지 않아?”
이효원을 살피다가 알게 된 건데 그녀의 기가 활발하게 움직일 때는 스케이트를 탈 때뿐이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오랫동안 스케이팅을 타면서 자연스레 몸이 그렇게 적응했다고 밖에 볼 수가 없다.
“맞아요! 체력 훈련을 할 땐 버틸 만해요.”
“기가 부족해서 그래. 이제부터 체력 훈련만 하고 스케이트 훈련은 내가 하라고 할 때만 해.”
이효원이 입을 열리기 전에 뒤에 처음 본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하는 거요?”
“누구······?”
이효원을 보곤 낮게 물었다.
“제 물리치료와 체력 관리를 해주시는 한의사 선생님이세요.”
“아! 전에 말했던.”
얼른 일어나서 인사했다. 처음 봤지만 한의학계에서 보자면 선배 아닌가.
“안녕하세요. 제64회 한두삼입니다.”
한의사 국가시험 회차를 말했다.
“···아, 그, 그래요. 난 이방익, 55회요.”
‘이방익, 이방익 익숙한 이름인데. 낯도 익고.’
가물가물할 뿐 떠오르진 않았다.
“이방익 선배님이시네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건 천천히 하기로 하고 방금 전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해줘야겠소. 맥을 짚었을 때 기가 약간 부족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약을 써서 충분히 보했다고 생각했소. 근데 맥도 제대로 짚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거요?”
목소리는 점잖았지만 말하는 바를 들어보면 자존심이 상한다는 얘기였다.
‘아까 인사를 할 걸. 그랬으면 효원이만 듣게 했을 텐데.’
이효원의 주변엔 스태프가 많았다. 그래서 이효원이 인사를 시켜주지 않는 이상 일일이 인사하지 않았다. 한데 하필이면 한의사라니.
학생이나, 인턴, 레지던트에게 배움을 전할 때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의사 앞에서 그 사람의 실력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건 금기였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싸우자는 얘기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몰라서 한 말이니 그 정도까진 가지 않겠지만 상당히 곤란했다.
‘음··· 사실대로 말하면 더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어설프게 얼버무리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고.’
이효원을 전담하는 한의사가 실력이 나쁠 리가 없다. 그런 사람에게 어설픈 변명이 통할지 의문이다.
고민을 하던 두삼은 결정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자존심이 상한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는 아니지만 기분을 덜 상하게 만들 수 있는 말로 설명을 시작했다.